어느 날 서가(書架)를 정리하는데 문득 ‘명정(酩酊)’이란 단어가 유난히 돋보이는 제목의 책이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명정사십년』. 그런데 그 뜻이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술에 취함”이란다. 게다가 그런 세월 ‘40년’이라니. 그러다가 글쓴이를 확인하고서야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기억도 아스라한 학창시절 국어 교과서에서 보았던, “거룩한 분노는/종교보다도 깊고,/불붙는 정열은/사랑보다도 강하다./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그 물결 위에/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그 마음 흘러라.”로 시작하던 시 「논개」의 시인이 바로 그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의 긍정적인 혹은 부정적인 효과를 떠나 ‘술’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작가와 예술가들 곁에서 항상 더불어 존재했었다. 술은 예술가들의 삶 속에 비중 있게 녹아들어 예술가들의 삶을 흔들어놓고, 그들의 작품에 다채로운 무늬를 새겨 넣었다. 결과적으로 술의 힘을 빌려 걸작을 만들어낸 예술가가 있는가 하면 타고난 천재성을 술로 마셔버린 불행한 예술가들도 있었다.
오래 전 ‘예술은 술에 얼마나 빚을 지고 있을까’라는 부제를 달고 나온 책 『알코올과 예술가』(마음산책, 2002)를 읽고 서평을 썼던 적이 있다. 프랑스의 소설가(1975년생) ‘알렉상드르 라크루아’는 이 책에서 알코올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소설가, 시인, 화가, 철학자들과 그들의 작품을 한자리에 불러 모아 알코올과 예술가의 유기적이고 신비로운 관계를 풀어냈다.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와 예술가라는 직업의 특성 때문에 상습성 음주(飮酒)와 금주(禁酒) 사이에서 양자택일할 수밖에 없었던 예술가들로부터 간헐성 음주가 불러오는 난폭한 행동과 위반이 예술작품 속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정당화되는지 살피는가 하면, 자신을 파괴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인 상습성 음주와 그것이 제기하는 문제, 그리고 예술가들의 육성을 통해 그들이 취기로 쌓아올린 ‘인공낙원’의 윤곽을 재미있게 그려냈다.
이 책 『알코올과 예술가들』에 따르면, 『인공낙원』의 보들레르를 비롯해 에드거 앨런 포, 제임스 조이스, 스콧 피츠제럴드, 맬컴 라우리, 게오르그 트라클, 딜런 토머스 등에서처럼 생명을 재촉할 정도로 지독하게 술에 탐닉했던 작가들과 잭 케루악, 기 드보르, 앙투안 블롱댕, 마르그리트 뒤라스, 프랜시스 베이컨, 부코프스키 등과 같이 취기의 경험을 빌려 창작했던 이들, 그리고 제임스 엘로이, 윌리엄 스타이런과 같이 알코올 중독에 빠졌다가 금주(禁酒)로 가는 힘겨운 여정을 걸었던 작가들도 있었다. 특히, 글쓰기의 흐름을 유지하기 위해 낱장의 종이를 일일이 이어 만든 120피트짜리 종이에 타자를 치고 밥(bop) 양식을 글쓰기에 도입해 즉흥성을 살리고자 애썼던 잭 케루악은 글을 쓰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술에 취해 책상에 앉을 것을 권했다고 한다. 술 마신 다음 날 아침에 그림을 그리는 습관을 가졌던 프랜시스 베이컨은 보름 동안 만취와 숙취를 거듭하는 가운데 걸작을 완성했으며, 신이 없는 공허함을 달래기 위해 술을 마신다는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하루에 포도주 6리터씩 마셔가며 소설을 쓰기도 했단다.
굳이 외국 예술가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술에 관한 에피소드를 가진 우리나라 예술가 또한 수없이 많다. 이른바 ‘관철동 시대’를 풍미했던 우리 예술가들만으로도 술과 예술에 관한 일화(逸話)는 차고 넘친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술이 묘약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많은 이들이 ‘자신을 파괴하는, 느리지만 확실한 방법’인 상습성 음주, 일명 알코올 중독을 혐오하고 있는 시대에 술을 옹호하거나 심지어 예찬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사진 출처. unsplash수주 변영로의 생애와 작품 활동
우리나라에서, 특히 문단(文壇)에서 ‘술’ 하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대표적인 이름은 누가 뭐래도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 1898~1961) 선생일 것이다. 선생의 본명은 ‘영복(榮福)’이며 ‘영로(榮魯)’는 스물두 살 때부터 쓴 필명인데, 1958년에 아예 본명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또 아호 ‘수주(樹州)’는 변영로가 어린 시절을 보낸 부천(富川)의 고려시대 지명이라고 한다.
변영로 선생은 1898년 5월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 재동·계동 보통학교를 거쳐 1910년 사립 중앙학교에 입학했으나 1912년 체육교사와 마찰이 일어 자퇴하고 만주 안동현[安東縣, 지금의 단동시(丹東市)]을 유람했고, 같은 해 결혼했다. 1915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학교 영어반에 입학해 3년 과정을 6개월 만에 마쳤다고 한다. 이후 여러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고, 1919년에는 독립선언서를 영문으로 번역해서 외국으로 보내기도 했다.
1920년 《폐허(廢墟)》, 1921년 《장미촌(薔薇村)》 동인으로 참여했으며, 《신민공론(新民公論)》 주필(主筆)을 지내기도 했다. 1923에 이화여자전문학교 강사로 부임했으며, 1931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주립 산호세대학에서 공부했다. 1933년 《동아일보》 기자, 1934년 《신가정(新家庭)》 주간(主幹)으로 일하다 광복 뒤 1946년에 성균관대학교 영문과 교수, 1950년에 해군사관학교 영어교관으로 부임했다. 1953년에 대한공론사(大韓公論社) 이사장에 취임, 1955년에는 제27차 비엔나 국제펜클럽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기도 했다.
변영로 선생은 열세 살부터 오언절구와 칠언절구의 한시를 짓고 열여섯 살에 영시를 지어 주위를 놀라게 한 천재 문인이었다. 수주의 영민함은 아마도 집안 내력인 듯하다. 아버지는 열아홉 살에 과거에 급제했고, 큰형(변영만)은 법률가이자 한학(漢學)과 영문학에 밝았으며, 작은형(변영태)은 외무장관과 제5대 국무총리를 지냈다.
시인으로서의 변영로는 1918년 《청춘(靑春)》에 영시(英詩) 「코스모스(Cosmos)」를 발표한 것을 필두로 1921년 《폐허》 제2호에 평론 「메텔링크와 예이츠의 신비사상」, 《신천지(新天地)》에 논문 「종교의 오의(奧義)」, 시 「꿈많은 나에게」·「나의 꿈은」 등 다섯 편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22년에는 《신생활(新生活)》에 대표작 「논개」를 발표하기도 했다. 다만 변영로는 초기부터 그리 많은 작품을 발표하지 않은 과작(寡作)의 시인이었다. 《신생활》·《동명》·《개벽》 등에 한 해 대여섯 편 정도를 발표했다. 1924년에는 「버러지도 싫다하올 이몸이」를 비롯한 스물여덟 편의 시와 수상(隨想) 여덟 편이 실린 첫 시집 『조선의 마음』을 평문관(平文館)에서 펴냈지만 그 내용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발행과 동시에 조선총독부가 압수하여 폐기처분하고 말았다. 실제로 그는 YMCA의 구석진 방에서 3.1운동 때 선포된 「독립선언문」을 영어로 번역해 해외 언론에 발송하고, 잡지 《신가정》 표지에 손기정 선수의 다리만 게재하며 ‘조선의 건각’이라고 제목을 붙이는 등 풍자와 재치 넘치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양심과 신념을 지킨 지식인이었다.
이 같은 일화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시인 변영로의 초기 작품들은 「논개」에서 보이는 것처럼 그 바탕에 민족혼을 일깨우고자 하는 의도가 짙게 깔려 있으며, 광복 이후에는 「실제(失題)」·「사벽송(四壁頌)」 등의 작품을 통해 자신을 둘러싼 상황인식에서 오는 절망감 속에서도 선비적 절개와 지조를 지키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또한 「돐은 되었건만」과 같이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는 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밖에 우리 문단에 영미문학(英美文學)을 소개하고 우리 작품을 영역(英譯)하는 일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저서로 수필집 『명정사십년』(1953) 외에도 영문시집 『진달래동산(Grove of Azalea)』(1948), 『수주시문선(樹州詩文選)』(1959) 및 1981년 유족들이 간행한 『수주 변영로 문선집』 등이 있다.
한편 변영로 선생은 넉넉지 못한 형편에도 서울의 일류 양복점에서 옷을 맞춰 입었고, 구두는 중국 상하이나 홍콩에서 인편(人便)으로 주문해 신을 만큼 멋쟁이였다고 한다. 나아가 돈키호테를 닮고 싶었던 남다른 성격에다가 이러저러한 경험을 맛깔나게 풀어내는 뛰어난 이야기꾼이기도 했다. 1955년 제27차 비엔나 국제펜클럽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했을 당시 자신의 술과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 세계 각국에서 모인 문인들로부터 ‘동양의 버나드 쇼’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그는 쉰세 살 되던 1951년 8월 20일, 40여 년 동안 마셔왔던 술을 끊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예순세 살에 세상을 떠났다.
수필집 『명정사십년』 초판본의 이모저모
이 책의 초판본은 가로 123mm, 세로 183mm 크기에 본문 190쪽과 표지를 반양장 제책으로 만들어 1953년 3월 30일 서울신문사에서 발행했다. 겉표지를 보면 왼편에는 뱃놀이하며 춤추는 이들을 실은 나룻배 모습의 삽화가, 오른편에는 후줄근한 양복을 입고 이미 얼큰하게 취기가 오른 늙은이가 술잔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의 삽화가 같은 크기로 실려 있고, 그 위에 손글씨 한자(漢字)로 석 줄에 걸쳐 ‘酩酊四十年(명정사십년)’, ‘無類失態記(무류실태기)’, ‘附(부) 南標記(남표기)’ 등 제목과 부제가 쓰여 있다. 그리고 그 아래 제법 큰 글씨로 ‘卞榮魯(변영로)’ 곧 저자 이름이 붙어 있다. 이런 이미지는 뒤표지로도 이어져 술병이 그려진 삽화와 함께 발행처(서울신문사) 로고가 실려 있다.
수필집 『명정사십년』 초판본 앞/뒷표지. / 사진. ⓒ 김기태
이 책에는 1949년부터 1950년에 걸쳐 잡지 《신천지》에 연재했던 「명정사십년 무류실태기」와 6·25전쟁 중 부산 피난시절 《민주신보(民主新報)》에 연재했던 「남표」의 내용이 주로 담겨 있다. 여기서 제목과 관련한 단어들의 뜻을 살펴보면 설핏 웃음이 나온다. 술에 취해 지낸 40년 세월은 그렇다 쳐도 ‘무류(無類)’란 “뛰어나서 견줄 데가 없음”이란 뜻이고, ‘실태기(失態記)’란 “볼썽사나운 모습의 기록”이니 이는 곧 ‘뛰어난 사람의 실수담’으로서 그다지 흠이 될 만한 실수는 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남표기(南標記)’는 피난시절 남쪽(부산)에서 ‘표(標)가 되게 적은 글’이란 뜻에서 정한 제목으로 보인다.
겉표지를 넘기면 주막인 듯 초막인 듯 술병에 둘러싸인 사람을 그린 그림이 전체를 차지한 가운데 맨 위에 한자로 ‘명정사십년’이라고 쓴 속표지가 나오고. 그 뒷면에 양복을 입고 넥타이까지 맨 저자 변영로 선생의 근영(近影, 최근에 찍은 인물사진)이 실려 있는데, 그 모습을 보니 바로 표지와 속표지에 나오는 그림 속 인물임을 짐작할 수 있다.
수필집 『명정사십년』 초판본 속표지와 저자근영. / 사진. ⓒ 김기태
이윽고 책의 구성을 보여주는 목차가 나오고 그 뒤를 이어 책머리에는 월탄(月灘) 박종화(朴鍾和) 선생의 「서(序)」와 저자 변영로의 「서설(序說)」이 실려 있다. 변영로 선생은 서설에서 “남들은 삼사십 년 동안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다고 대성질호(大聲疾號)하는 판에 자신은 호리건곤(壺裏乾坤)에 부침(浮沈)한 것을 생각할 때 자괴자탄(自愧自嘆)을 금할 수 없다”면서 자신의 반생(半生)은 “비극성을 띤 희극일관으로 경쾌주탈(輕快酒脫)하게 저지른 범과가 기백기천으로 헤아릴 길 없다”고 적고 있다. 변영로 선생이 이토록 술에 취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시대상에 대해 서문을 쓴 월탄은 “세상 됨됨이가 옥 같은 수주로 하야금 술을 마시지 아니치 못하게 한 것이 우리 겨레의 운명이었으며, 난초 같은 자질이 그릇 시대를 만났으니 주정하는 난초가 되지 않고는 못 배겨내었던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본문을 보면 모두 4부에 걸쳐 72편의 수필이 수록되어 있다. 이미 살핀 것처럼 표지는 주로 삽화가 차지하고 있는바, 본문 또한 심심치 않게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받쳐주는 삽화가 등장한다. 하지만 표지 장정(裝幀)을 누가 했는지, 본문 그림을 누가 그렸는지 알 수 없어 안타깝다.
수필집 『명정사십년』 초판본 목차. / 사진. ⓒ 김기태
수필집 『명정사십년』 초판본 본문삽화. / 사진. ⓒ 김기태
본문을 좀더 자세히 살피면, 제1부 ‘명정사십년’에는 「등옹도주(登甕盜酒)」·「부자대작(父子對酌)」·「가두진출(街頭進出)의 무성과」·「졸한무예보래(猝寒無豫報來)」 등 48편, 제2부 ‘명정낙수초(酩酊落穗鈔)’에는 「기인고사대불핍절(奇人高士代不乏絶)」·「교실내에 로이드극(劇)」 등 4편, 제3부 ‘남표(南漂)’에는 「현대출애급판」·「한양아 잘있거라」·「하나의 전환」·「부공부수(婦功夫守)와 기외(其外)」 등 10편, 제4부 ‘명정남빈(酩酊南濱)’에는 「서언(緖言)」과 함께 「계엄주(戒嚴酒)의 범람」·「하고방 순례」·「명정의 피날리」 등 10편이 각각 실려 있다. 그런데 글의 내용이 맛깔나고 재미있는 것은 틀림없지만 해박한 저자의 폭넓은 글솜씨 덕분에 선택된 단어들이 어려운 한자로 인쇄되어 있어서 읽기가 결코 쉽지 않다.
어쨌든 이렇게 본문이 끝나고 나오는 간기면(刊記面)을 보면 우선 한 면을 거의 다 차지할 정도로 크게 인쇄된 것이 눈에 띈다. 인쇄일 및 발행일과 함께 책 제목이 오른편에 배치되어 있고, 그 왼편으로 책값은 당시 화폐로 ‘100환’임을 밝혀 놓았다. 그 아래 저자 및 발행인과 발행처 등이, 그 왼편으로 지역별 총판매소가 표기되어 있다.
수필집 『명정사십년』 초판본 간기면. / 사진. ⓒ 김기태수주와 동료 문인들의 술에 얽힌 이야기들
이 책 말고도 술과 예술가들에 관해 쓴 것들은 많이 있다. 국어학자로 유명한 무애(无涯) 양주동(梁柱東, 1903-1977)의 『문주반생기(文酒半生記)』는 변영로의 『명정사십년』과 더불어 20세기 최고의 술에 관한 기록으로 꼽힌다. 굳이 비교한다면 수주의 그것에 비해 무애의 책에 담긴 ‘허풍’이 조금 더 세다고나 할까.
무애 양주동 『문주반생기』 표지. / 사진. ⓒ 김기태
다시 변영로 선생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그의 부친은 집에서 술을 마실 때 3남 4녀의 막내아들인 수주에게 반드시 두서너 잔 정도 술을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그렇게 된 사연이 있으니, 이 책에 실린 첫 번째 이야기 「등옹도주(登甕盜酒)」에 따르면 그것은 수주가 여섯 살 때의 일이었다. 주변에서 어른들이 술 마시는 것을 본 수주는 어느 날 문득 자기도 한번 마셔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여섯 살밖에 안 된 자기에게 누가 술을 마셔보라고 권할 것인가. 생각다 못한 수주는 몰래 훔쳐서라도 마셔보기로 하고 술독이 있는 뒤꼍 광 속으로 숨어들었다. 일단 광에 들어간 그는 표주박을 손에 들고 술독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막상 술독 앞에 서고 보니 술독 높이가 너무나 높아 표주박에 술을 담을 수 없음을 깨닫고는 주변에 있던 책상, 궤짝 등등 잡동사니들을 포개놓고 올라가 술독을 내려다보니 찹쌀로 담근 술이 찰랑거리고 있었단다. “…… 그러나 중도 실족 와르르 쾅하며 쓰러져 아이고 아이고 나 죽는다 호곡(號哭)을 하는 바람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윽고 “살려달라”는 소리를 듣고 수주의 어머니가 달려왔다. 전후 사정을 알게 된 어머니는 아들에게 표주박에 술을 가득 떠 주었고, 그날부터 도주(盜酒)가 배급을 주는 급주(給酒)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처럼 이 책은 대부분 변영로 선생 자신이 술에 취해 벌였던 이러저러한 사건들을 바탕으로 쓴 글들로 이루어져 있다. 대부분의 술꾼들에게 그렇듯이 술에 얽힌 일들이라면 대개는 추태(醜態)일 것이기에 그것을 고스란히 드러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변영로 선생은 이 책에서 자신이 주도했던 술자리에서의 일들을 세간의 눈초리에 상관없이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한편으론 당시의 상황에 공감하면서 또 한편으론 유쾌한 기분으로 읽을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변영로 선생은 술을 마셨다 하면 끝장을 보는 성미였던 모양이다. 말술, 주신(酒神), 주호(酒豪), 국보급 주객(酒客) 등으로 불렸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타고난 체질 덕분인지 아무리 독하고 아무리 많은 술을 마시고서도 이튿날이면 거뜬히 일어나 직장으로 출근했다고 한다. 이렇듯 당대 문인들 중에 ‘술’의 대표적 인물이 수주였다면, ‘담배’로는 오상순(吳相淳, 1894~1963) 시인을 이길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의 아호도 ‘꽁초’ 또는 ‘골초’를 연상하기에 충분한 ‘공초(空超)’였다. 두 사람 모두 《폐허》 동인으로 식민지 지식인의 설움을 술과 담배로 달랬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그들의 문학정신을 기리는 ‘수주문학상’과 ‘공초문학상’을 통해 매년 수상자를 배출하고 있다.
이 책에도 수주와 공초가 함께 한 이야기들이 들어 있다. 그 중 대표적인 이야기는 맨 처음 《신천지》 1949년 11월호에 실렸다가 나중에 이 책에도 「백주(白晝)에 소를 타고」라는 제목으로 실린 ‘술 취해 소를 탄 4명의 나한(裸漢)’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그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수주가 서울 혜화동에 살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주신(酒神)] 바커스(Bacchus)의 후예인지, 유영(劉怜)의 직손(直孫)들인지 몰라도” 당대 최고의 술꾼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공초 오상순, 성재(誠齋) 이관구(李寬求), 횡보(橫步) 염상섭(廉想涉)이 찾아왔다. “설사 주인이 불주객(不酒客)이라도 이런 경우를 당하면 도리가 없을 것이지만” 음주(飮酒)에 있어서만큼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수주로서는 벗들과의 회포를 마다할 리 없었다. 하지만 딱한 노릇은 네 사람의 주머니를 다 털어도 가진 돈이 불과 ‘수삼 원(圓)’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내로라하는 주당(酒黨)들인 그들에게 수삼 원은 “주객 3~4인이 겨우 ‘해갈’할 정도”였다.
그리하여 “…… 아무리 해도 별로 시원한 책략이 없어, 궁하면 통한다는 원리와 다르다 해도, 일개의 악지혜(惡智慧)(기실 악은 없지만)를 안출했다. 사동(使童) 하나를 불러서 몇 자 적어 화동(花洞) 납작 집에 위치한 동아일보사로 보냈다.……” 당시 동아일보사 편집국장은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 1887~1945)였다. 수주는 노골적으로 편지에 “좋은 원고를 기고할 터이니 50원만 보내 달라”고 썼다. 하지만 송 국장이 진짜 돈을 보내 줄지는 알 수 없었기에 수주는 “마음을 여간 졸이지 않았다”고. “…… 거절을 당한다든지 하면 어쩌나 걱정했다. 10분, 20분, 30분, 한 시간. 참으로 지루한 시간의 경과였다. 마침내 보냈던 아이가 손에 답장을 들고 오는데 우리 4인의 시선은 약속이나 한 듯 한군데로 집중했다. 직각(直覺)도 직각이지만 봉투(封套) 모양만 보아도 빈 것은 아니었다.……” 사동이 가져온 봉투 속에는 진짜 50원이 들어 있었다. 이제부터 이 50원을 어떻게 쓸지 머리를 맞댔다. 선술집에 가서 쓰기에는 너무나 큰돈이지만, 대낮부터 요정에서 먹기에는 부족하다 싶었다. 수주는 문득 야유회(野遊會)를 제안했다. “일기도 좋고 하니 술 말이나 사고, 고기 근이나 사서 나 있는 곳에서 지척인 사발정 약수터(성균관 뒤)로 갑시다.”
“…… 우리는 참으로 하늘에나 오를 듯 유쾌했다. 우아하게 경사진 잔디밭 위에 둘러앉았는데 (중략) 술은 소주로 우선 한 말을 올려놓고 안주는 별것 없이 냄비에 고기[우육(牛肉)]를 구웠다. 참으로 그날에 한해서는 특히 쾌음(快飮)·호음(豪飮)했다. 객담(客談)·농담(弄談)·고담(古談)·치담(痴談)·문학담(文學談)을 두서없이 지껄이며 권커니자커니 마셨다.……”
이야기도 길고 술자리도 길었다. 이런 복(?)스런 시간이 계속되기를 빌며 마셨다. 그러나 대취의 풍류가 의외의 순간을 맞이하고 말았다. 그때까지 쪽빛같이 푸르고 맑았던 하늘에 난데없는 검은 구름이 떠돌더니 그 구름장이 삽시간에 커지고 퍼져 비를 쏟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유연작운(油然作雲) 체연하우(滯然下雨) 바로 그대로였다.”
네 사람은 속수무책으로 살이 부을 정도로 비를 흠뻑 맞았다. “그 장경(壯景)은 필설난기(筆舌難記)”였다. 게다가 큰 소리로 만세를 외치기까지 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당대 문단의 대표 괴짜였던 오상순 시인이 “입고 있던 옷을 모조리 찢어버리자”고 제안하면서 “옷이란 대자연과 인간 둘 사이의 이간물(離間物)인 이상 몸에 걸칠 필요가 없다”고 부추겼다. 공초는 주저주저하는 세 사람에게 나 보란 듯 먼저 옷을 찢어버렸다. “남은 사람들도 천질(天質)이 그다지 비겁(卑怯)지는 아니하여 이에 곧 호응했다.” 마침내 술에 취할 대로 취한 네 명의 나한(벌거숭이)들은 빗속에서 말 그대로 ‘광가난무(狂歌亂舞)’를 즐겼다. 그러다가 그들은 언덕 아래 소나무에 소 몇 마리가 매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미 주신(酒神)과 만나 접신(接神)의 경지에 도달한 그들은 소를 타보자는 데 의기투합했다. “…… 하여간 우리는 몸에 일사불착(一絲不着)한 상태로 그 소들을 잡아타고 유유히 비탈길을 내려가 똘물을 건너고 공자(孔子)를 모신 성균관을 지나 큰 거리까지 진출했다가 큰 봉변(逢變) 끝에 장도(壯圖)는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술에 취한 네 사람은 술을 퍼마시다가 시를 읊다가, 춤을 추다가, 마침내 옷을 벗어 던지고는 벌거벗은 알몸으로 소를 거꾸로 타고서 종로 보신각으로 내려왔다. 몰려든 사람들이 아우성을 쳤고 말을 타고 달려온 일본 순사는 네 사람의 기세에 놀라 쩔쩔매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변영로 선생이 ‘동양의 버나드쇼’라는 별명을 얻은 계기를 만들어 준 것이 바로 위의 이야기였다. 1955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열린 국제펜클럽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했을 때 세계에서 모인 문인들 앞에서 위의 이야기를 털어놓았고, 이를 들은 사람들은 박장대소(拍掌大笑) 끝에 즉석에서 변영로에게 ‘동양의 버나드 쇼’라는 별칭을 붙여줬던 것이다.
수주의 주도(酒道)는 과연 몇 단일까?
이 책에 있는 내용만 보아도 변영로 선생은 술에 만취해 크고 작은 사고를 수도 없이 일으켰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잔뜩 취해 집에 와서 홀딱 벗고 덩실덩실 춤을 추는 일은 다반사였고, 상경(上京)한 첫날밤을 다리 위에서 노숙(露宿)하고, 일본에서 귀국한 첫날 벌거숭이 상태로 김치 광에 오줌을 싸고, 결혼식 날 신방에도 들지 않고 요릿집에서 만취해 처가(妻家)에 들어가고, 빗길에 실족(失足)하는 바람에 급류에 휩쓸려 혜화동 다리 밑 모래톱에 버려지고…….
그렇게 술에 취해 일제 치하를 견뎠으면서도 수주의 글 속에는 단 한 줄의 친일 문장도 들어 있지 않다. 술에 취해 비록 몸은 비틀댔을망정 민족을 생각하는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던 시인이자 지식인이 바로 변영로였다. 이 책에서 스스로 술로 빚은 만행을 책망하고 있지만, 호음(豪飮)·쾌음(快飮)·강음(强飮)하는 그의 음주 철학에는 당당함과 자부심이 차고 넘친다. 그러고 보니 최근 이 책을 현대어로 개정해서 펴낸 출판사(오트, 2021.11.)의 서평에서 “수주가 통음으로 필름이 끊기는 일은 셀 수 없을 정도다. 한겨울, 한여름에 길에서 눈을 뜨는 일도 다반사다. 술에 얽힌 ‘광태(狂態)’, ‘추태(醜態)’를 읽다 보면 노상에서 변을 당하지 않은 것이 신기할 지경이다. 세상과 주신(酒神)은 비운의 시대를 살아간 유쾌하면서도 강직했던 천재를 지켜주고 싶었는지 모른다.”는 표현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렇다면 수주의 주도는 과연 몇 단이나 될까? 박목월․박두진 시인과 함께 했던 청록파(靑鹿派) 활동으로 유명한 조지훈 시인이 그의 수필집 『사랑과 지조』(백양출판사, 1988)에 실린 「주도유단(酒道有段)」이란 글에서 주도(酒道)에 아홉 개의 급(級)과 아홉 개의 단(段)이 있어 총 열여덟 가지의 경지가 있다고 한다. 이는 술을 마신 연륜, 같이 술을 마신 친구, 마신 기회, 술을 마신 동기 그리고 술버릇 등 다섯 가지를 종합해서 나눈 것이며, 대강을 살피면 다음과 같다.
- 9급: 부주(不酒)-술을 아주 못 먹진 않으나 안 먹는 사람 - 8급: 외주(畏酒)-술을 마시긴 마시나 술을 겁내는 사람 - 7급: 민주(憫酒)-마실 줄도 알고 겁내지도 않으나 취하는 것을 민망하게 여기는 사람 - 6급: 은주(隱酒)-마실 줄도 알고 겁내지도 않고 취할 줄도 알지만 돈이 아쉬워서 혼자 숨어 마시는 사람 - 5급: 상주(商酒)-마실 줄 알고 좋아도 하면서 무슨 이익이 있을 때만 술을 내는 사람 - 4급: 색주(色酒)-성생활을 위해 술을 마시는 사람 - 3급: 수주(睡酒)-잠이 안 와서 술을 마시는 사람 - 2급: 반주(飯酒)-밥맛을 돋우기 위해 술을 마시는 사람 - 1급: 학주(學酒)-술의 진경(眞境)을 배우는 사람. 주졸(酒卒) - 1단: 애주(愛酒)-술을 취미로 맛보는 사람. 주종(酒從) - 2단: 기주(嗜酒)-술의 진미에 반한 사람. 주객(酒客) - 3단: 탐주(耽酒)-술의 진경을 체득한 사람. 주호(酒豪) - 4단: 폭주(暴酒)-주도를 수련하는 사람. 주광(酒狂) - 5단: 장주(長酒)-주도 삼매에 든 사람. 주선(酒仙) - 6단: 석주(惜酒)-술을 아끼고 인정을 아끼는 사람. 주현(酒賢) - 7단: 낙주(樂酒)-마셔도 그만, 안 마셔도 그만, 술과 더불어 유유자적하는 사람. 주성(酒聖) - 8단: 관주(觀酒)-술을 보고 즐거워하되 이미 (술병에 걸려) 마실 수 없는 사람. 주종(酒宗) - 9단: 폐주(廢酒)[열반주(涅槃酒)]-술로 말미암아 다른 술 세상으로 떠나게 된 사람
이상과 같은 주도유단 구분에 따르면 과연 수주 변영로 선생은 어디에 해당할까. 술로 인해 세상을 버린 사람에게 9단 열반주의 경지를 부여한 것이고 보면 수주 또한 9단의 반열에 오르고도 남음이 있지 않을까. 이처럼 그 이유와 태도는 각양각색이지만, 단번에 천국에 이르기 위한 방법으로 알코올을 선택한 예술가들에게 과연 술이 묘약인지 독약인지 묻는 것은 부질없어 보인다.
그렇더라도 이제 시대가 바뀐 만큼 21세기 디지털 미디어 시대에 진정 살아남고자 한다면 예술에는 취하되 술에는 취하지 말아야 할 일이다. 다만, 수주와 공초 등이 활동했던 시절의 특수성만큼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아래와 같은 월탄의 서문을 읽고 공감할 수 있는 젊은이가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로써 이 글을 마무리하는 이유는 나 또한 지금 이 순간 술 한 잔이 간절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원문 그대로 옮김)
蘭草(난초) 한 그루가 그윽한 골작이에 홀로피여 맑은 香氣(향기)를 아늑히 뿜을때 蘭草 그 自體(자체)가 누구를 請(청)한배 아니언만 아는이는 그 갸륵한 香氣를 찾어 十里幽谷(십리유곡)을 찾는것이요. 荊山(형산)의 힌 구슬은 그 自體가 조촐하고 밝으매 그몸 스스로는 原來(원래)가 無心(무심)하건만 모래알과 瓦礫(와륵)의 틈에 석겨지지 않고 남의 눈에 드러나는 것이다. 세상에 술이 얼마나 많이 없어졌으며 세상에 술마시는이 얼마나 많으리. 술의 歷史(역사)를 따저본다면 史記(사기)에 술을 빚여낸이가 禹(우)님금때 儀狄(의적)이라했으니 上下千古(상하천고) 鴻濛茫漠(홍몽망막)한 가운데 술마시고 술주정하고 술로써 亡家敗身(망가패신)하고 술로써 奉祭祀(봉제사) 接賓客(접빈객)하고 술로써 天下(천하)를 얻고 술로써 理陰陽循四時(이음양순사시)하야 太平聖代(태평성대)를 이룩하고 글보다 술로써 劉伶(유령) 李太白(이태백)이 有名(유명)했고 술로써 酒中七仙歌(주중칠선가)가 나왔다. 술의 歷史가 이렇게 길고 술마시는이 이렇게 많거니 어찌하야 오늘날 樹州(수주)의 술마신내력 酩酊四十年記(명정사십년기)가 사람의 입에 오르나리고 또한 읽어보지못한이는 冊(책)을 얻어 한번 읽어보기를 다투어 願(원)하는 所以然(소이연)이 어데있는가. 樹州는 그렇치 않다하되 樹州의 人品(인품)은 荊山의 힌玉(옥)이요, 樹州는 스스로 否認(부인)하되 樹州의 人格(인격)은 호젓한 幽谷(유곡)속에 홀로핀 蘭草인 때문이다. 이것은 樹州 죽은뒤에 내가 쓸말인데 樹州 사러있서 이 글을 쓰게되니 樹州가 알면 또한번 辱(욕)하리라 未安(미안)하기 짝이없다. 荊山의 힌구슬이 술을 마시니 光彩(광채)가 더한것이요, 幽谷의 蘭草가 술酒酊(주정)을 四十年(사십년)하니 貴(귀)한 것이다. 樹州 지나간 半平生(반평생)이 五十有餘年(오십유여년), 세상 됨됨이가 玉같은 樹州로 하야금 술을 마시지 아니치 못하게 한것이 우리겨레의 運命(운명)이였으며 蘭草같은 資質(자질)이 그릇 時代(시대)를 만났으니 주정하는 蘭草가 되지 않고는 못백여내였던 때문이다. 樹州를 欽慕(흠모)하는 젊은이 많다 樹州가 詩人(시인)이매 詩로써 欽慕하는가, 樹州가 술을 잘 마시니 술로써 景仰(경앙)하는가, 아니다, 그 本然(본연)이 玉인때문, 老少(노소)가 모두 樹州를 사랑하는것이요, 그 바탕이 蘭草인때문, 친구와 弟子(제자)가 다시 한번 애끼는 것이다. 엇찌하야 樹州가 玉이요 蘭草인가, 倭政四十年(왜정사십년)에 日本留學生(일본유학생)이면서도 樹州는 白面一窮生(백면일궁생)이다, 바야흐로 洋風(양풍)이 波濤(파도)높은 乙酉以來(을유이래) 七八年(칠팔년)에 美國留學生(미국유학생)이면서도 樹州는 毅然(의연)히 一窮儒(일궁유)다. 玉이 오히려 無色(무색)타하고, 蘭草의 香氣(향기)가 오히려 俗(속)되다하면 樹州는 또다시 나를 辱하고 酒酊하리라.
檀紀四二八五年(壬辰)七月十日[단기 4285년(임진) 7월 10일] 板門店休戰會談滿一週年(판문점 휴전회담 만1주년), 再建(재건)의 서울에서 月灘(월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