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의 시계 장인’, ‘관현악의 마술사’란 별명으로 불리던 프랑스의 작곡가 모리스 라벨 (Maurie Ravel, 1875-1937)은 1928년에 작곡한 대표작 <볼레로>를 비롯하여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밤의 가스파르>, <다프니스와 클로에>, <물의 유희>와 같은 자신만의 독자적인 음악적 특성이 풍기는 작품을 작곡하며 드뷔시와 함께 당시 ‘인상주의’라 통칭하던 음악과 예술의 유행을 이끌어 나갔던 작곡가였습니다. 1902년에 완성되었으나 약 100여 년의 시간 동안 잊힌 채 프랑스 국립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가 2025년, 지휘자 두다멜과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 의하여 세상에 선보이게 된 테너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칸타타 <세미라미스> 역시 젊은 시절 라벨의 손에 탄생한 작품입니다.
모리스 라벨의 초상. / 사진 출처. imslp 홈페이지
무소르그스키가 피아노 독주를 위하여 작곡한 <전람회의 그림>을 오케스트라를 위하여 편곡하여 지금은 원곡보다 무대 위에서 더 자주 연주되는 결과를 낳게 만든 진정한 관현악의 마술사였던 라벨, 그렇기에 상대적으로 라벨이 작곡한 성악곡들은 관현악이나 기악을 위한 작품들보다 그 유명세가 덜 한 것 역시 사실입니다. 라벨은 『천일야화』 속 주인공을 소재로 한 연가곡집 <셰헤라자드>, 프랑스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의 시를 가사로 한 <스테판 말라르메의 3개의 시>와 같은 가곡들을 다수 작곡하였으며, 그가 작곡한 최후의 작품인 백조의 노래 역시 바리톤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세 개의 모음곡인 <둘시네 공주에게 반한 돈키호테 (Don Quichotte a Dulcinee)>입니다. 스페인의 작가가 쓴 시골의 한 지주 알론소 키하노에 대한 소설에서 영감을 받은 프랑스의 작가 폴 모랑 (Paul Morand, 1888-1976)의 시 세 편을 소재로 1932년에 작곡된 이 곡은 후에 작곡가에 의하여 성악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버전으로 편곡되었습니다.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베드라 (Miguel De Cervantes Saavedra, 1547-1616)는 스페인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으로 유럽 최초의 근대 소설이라 평가받는 소설인 『라만차의 천재 신사 돈키호테 (El Ingenioso Hidalgo Don Quijote de La Mancha)』를 우리에게 남겼습니다. 20대의 젊은 나이에 군인으로 참전하여 터키군과의 전쟁에서 왼팔을 크게 다쳐 거의 쓸 수 없게 되며 ‘레판토의 외팔이 (El manco de Lepanto)’라는 별명을 얻었던 세르반테스는 스페인으로 귀환하던 길에 터키 해적의 습격을 받고 알제리에서 5년 동안 노예로 부역했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인물입니다. 그는 수도회 도움으로 스페인으로 귀향한 후에는 작가로 글을 쓰며 자신의 첫 소설인 1585년 작 『라 갈라테아 (La Galatea)』를 비롯하여 다수의 희곡을 완성하였으나 크게 흥행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세르반테스의 초상. /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그리고 10년간 몰두한 작품이 바로 ‘돈키호테’로 불리는 『라만차의 천재 신사 돈키호테』입니다. 세르반테스가 1605년에 발표한 『돈키호테』 제1부가 크게 흥행하였고 10년 뒤에는 제2부까지 완성되었지만, 작가는 금전적인 여유는 크게 얻지 못한 채 이듬해인 1616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지금은 역사상 최고의 소설이자 문학계의 중심에 있는 작품이라 칭송받고 있으며,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로 풀어낸 스페인어 문장들이 스페인어 그 자체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로 이 작품은 문학뿐만 아니라 여러 예술가들과 인류의 역사에 큰 영향을 준 작품입니다.
소설 <돈키호테>의 초판 표지. /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스페인 중남부 지방인 라 만차의 작은 마을의 지주 알론소는 기사 소설에 탐닉하여 점차 자신을 진짜 기사인 돈키호테로 착각하게 됩니다. 그렇게 허름한 중세 기사 복장을 하고 자신의 비루한 말 로시난테와 모험을 떠나기 위하여 농장의 일꾼인 산초를 자신의 시종으로 고용하고, 마을 처녀 알돈사 로렌소를 자신이 다른 기사들처럼 사랑하고 존경해야 할 공주 둘시네로 생각하며 그녀를 위한 모험을 떠나게 됩니다. 이렇게 현실을 잊고 자신이 만든 세계에 빠져드는 돈키호테에 대한 가곡 모음집 <둘시네 공주에게 반한 돈키호테>를 라벨이 자신의 유작, 백조의 노래로 선택한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물론 그가 당대 최고의 오페라 가수였던 러시아 출신의 표도로 샬리아핀 (Fyodor Ivanovich Shalyapin, 1873-1938)이 주연을 맡은 영화를 위하여 작곡을 의뢰받긴 했지만, 그가 ‘피크병’이라는 일종의 치매로 점차 기억을 잃고 현실 감각과 언어 능력을 잃어가고 있던 것 역시 하나의 이유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돈키호테에 대입했을 것이라는 학자들의 주장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라벨은 자신의 ‘백조의 노래’ 속 3개의 노래를 스페인 춤의 리듬인 과히라 (Guajira), 조르지카 (Zorzica), 그리고 호타 (Jota)에 기반을 두고 작곡하였으며, 각각의 노래를 모두 다른 세 명의 프랑스 출신의 성악가들에게 헌정하였습니다. 첫 번째 곡인 ‘낭만적인 노래 (Chanson Romanesque)’는 가장 스페인의 특징이 잘 드러난 3박자의 리듬을 담고 있으며 로베르트 쿠지누에게 헌정되었습니다. 이 곡은 둘시네 공주에게 반한 돈키호테가 그녀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고, 둘시네 공주를 축복하며 죽을 각오가 되어있음을 밝히는 노래입니다. 두 번째 곡인 ‘서사시 (Chanson epique)’는 마르티알 싱허에게 헌정되었으며 바스크 지방에서 유래한 5박자의 춤곡 조르지카에 기반하여 작곡된, 성모마리아를 닮은 아름다운 둘시네 공주를 그리워하는 돈키호테의 노래입니다. 로저 부르댕에게 헌정된 마지막 곡인 ‘술의 노래 (Chanson a boire)’는 매우 신나는 3박자의 노래로 자신이 포도주에만 취한 것이 아닌, 갈색 머리의 달콤한 눈빛을 가진 여인에게 취한 것이고 즐거움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을 가사로 하고 있기에 캐스터네츠의 반주에 맞춰 신나게 추는 호타의 리듬이 생동감 있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기억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지만, 영원히 남아 기억되고 사랑받고 있는 ‘돈키호테’와 같은 작품을 남기고 싶었던 프랑스의 위대한 작곡가 라벨의 백조의 노래 <둘시네 공주에게 반한 돈키호테>는 풍차로 달려드는 돈키호테의 무모함마저 담고 있는 마지막 곡 ‘술의 노래’처럼 유쾌하게 기억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