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원은 어둠 속에서 빛나고, 피는 흰 눈 위에서 제일 붉습니다. 영화의 핵심 갈등을 시각화해 보여주는 대비입니다. 동화 속 왕비가 하얀 눈 위로 피를 흘렸을 때 바랐던 것처럼, 검은 머리와 눈동자, 흰 얼굴을 지닌 소녀가 태어났습니다. 소녀의 얼굴은 가끔 핏빛으로 물들었습니다. 세월이 수백, 수천 년 흘렀지만, 소녀는 여전히 맑고 고운 얼굴입니다. 영화 <렛미인(2008)>은 사랑과 고독에 관한 영화입니다. 아이들의 마음에 공존하는 순수와 잔혹의 연원을 더듬는 영화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는 누군가의 존재 자체를 오롯이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아이들의 성장기입니다. “let me in” 누군가 속삭이고, 초대는 구원으로 이어집니다. 나를 받아들여 줄 수 있겠니? 내가 뱀파이어일지라도.
영화 <렛미인>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검은 하늘에서 끊임없이 쏟아지는 눈송이를 보여주며 영화는 시작합니다. 주인공 오스칼(카레 헤르브란트)은 고독하고 소외당한 소년입니다. 학교에서 당하는 폭력과 따돌림은 오스칼의 영혼 깊숙이 상흔을 남깁니다. 부모의 사랑은 오스칼의 내면에 닿을 정도로 세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스칼은 더욱 외롭습니다. 소년은 어디에도 맘 붙일 곳이 없습니다. 옆집으로 이사 온 소녀 엘리(리나 레안데르손)가 오스칼의 곁에 다가옵니다. “나는 너와 친구 될 생각 없어.” 엘리가 불쑥 내뱉습니다. 수많은 이별의 기억은 잊었지만, 그때의 아픔은 몸에 아로새겨 있으니까요. 오스칼 역시 멀어져 가는 엘리의 뒤통수를 향해 같은 말을 중얼거립니다.
영하 30도의 혹한 속에서 맨발로 서 있는 그녀에게 오스칼이 묻습니다. 춥지 않냐고. “이제 추위도 잊었나 봐.” 담담하고 자조적인 대답입니다. 엘리가 잊거나 마음에 묻은 일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요? 서로의 마음에 자리 잡은 고독을 알아보았는지, 소년과 소녀의 마음에 작은 파문이 일어납니다. 소년과 소녀의 일상은 아기자기해집니다. 이웃인 그들 사이를 가로막은 것은 얇은 벽 하나입니다. 그들은 모스 부호를 이용해 벽을 두드리며 소통합니다. 오스칼은 더 이상 외롭지 않습니다. 오스칼이 이 신비한 소녀에게 느끼는 감정은 단순한 첫사랑이 아닙니다. 자신처럼 ‘타자성’을 지니고 사는 존재에 관한 인식과 공감입니다.
영화 <렛미인>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소녀는 쉴 새 없이 허기를 느낍니다. 사랑으로도 음식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허기입니다. 엘리를 데리고 이사한 초로의 남성은 엘리를 위해 주섬주섬 장비를 챙깁니다. 물통과 칼을 챙기는 능숙한 태도는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님을 알립니다. 사냥이 시작됩니다. 한 청년을 살해해 그에게서 피를 빼내는 데 성공하지만, 곧 사람들에게 발각됩니다. 간신히 몸을 피한 남성은 그만 엘리에게 필요한 물통을 두고 왔음을 깨닫습니다.
엘리가 직접 행동에 나설 차례입니다. 흰 눈 위로 선혈이 흐르고 허겁지겁 피를 먹던 엘리는 머리를 무릎에 묻습니다. 잠시 스쳐간 자괴감도 엘리의 허기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녀에게 삶이란 저주이자 굴레입니다. 그러나 엘리는 힘겹게 운명을 받아들입니다. 희생자의 목숨을 끊는 행위만이 자신에게 주어진 굴레를 그들에게 덧씌우지 않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렇게 소녀는 자신만의 작은 윤리를 실천합니다.
엘리가 흡혈귀라는 사실을 안 오스칼은 그녀를 멀리합니다. 소년에게 살인이란 받아들일 수 없는 절대 악입니다. 오스칼이 음식을 먹으며 생존하듯, 엘리에게 사람의 피가 필요하다는 사실까지는 머리가 미치지 못합니다. 엘리의 집을 찾은 오스칼은 그녀를 ‘도덕’이란 잣대로 비난합니다. 다음날 엘리가 오스칼의 집을 방문합니다. 자신을 초대해 달라고 엘리가 말하자, 오스칼은 빈정대며 요청을 거부합니다. 엘리는 초대 없이 집에 들어섭니다. 엘리의 귀와 눈, 입에서 피가 흐릅니다. 그 끔찍한 광경에 오스칼은 허겁지겁 그녀를 초대합니다. “넌 누구야?”, “난 너와 같아.”
영화 <렛미인>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여리여리한 금발소년 오스칼의 내면에는 복수에 대한 충동이 가득합니다. 정원에서 칼을 나무둥치에 찔러 넣고, 살인 기사를 스크랩하며 충동을 억누릅니다. 엘리가 그 사실을 지적하자, 자신은 실제로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며 맞섭니다. “그렇지만 죽이고 싶잖아? 복수를 위해서. 난 살기 위해 죽여.” 오스칼이 마음으로 수백 번 누군가를 해쳤다면, 엘리는 살기 위해 폭력이란 수단을 씁니다. 그들은 서로의 어두움과 욕망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오스칼에게 엘리는 분노를 대리 실현하는 존재이자, 내면의 어둠을 비춰주는 영혼의 쌍둥이입니다. 선악에 관한 오스칼의 이분법이 힘을 잃는 순간입니다.
잠깐이라도 내가 되어줄 수 있겠느냐는 엘리의 부탁에 소년은 눈을 감습니다. 피로 물든 엘리의 얼굴 위로 잠시 주름진 노파의 얼굴이 겹칩니다. 말간 얼굴 위에 쌓인 세월의 더께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오스칼은 잠시나마 엘리가 되어봅니다. 엘리가 느낀 상처와 고독, 허무와 허기가 오스칼의 마음을 관통합니다. 늘 자신의 타자성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일은 오스칼의 몫만은 아니었습니다. 이제야 오스칼의 초대는 진정성을 갖춰갑니다. 하지만 떠나야만 살 수 있는 것이 뱀파이어의 운명입니다. 가까스로 서로를 온전히 받아들인 순간, 찾아온 이별은 더욱 아픕니다.
오스칼은 엘리의 조언대로 그를 괴롭히던 친구를 폭행합니다. 처음으로 평화로운 학교생활이 펼쳐집니다. 마음으로 수없이 상대를 죽이기보다는 때로 한 번의 물리적 폭력이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법입니다. 하지만 약자를 괴롭히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라면, 등을 보이는 순간 치명상을 입기 마련입니다. 오스칼이 방심한 사이, 적들의 복수가 시작됩니다. 학교 수영장에 머리를 박힌 오스칼은 아무것도 보고 듣지 못합니다. 물속은 적요한 정적의 세계입니다.
영화 <렛미인> 스틸컷 / 사진출처. IMDb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고요 속, 카메라는 물속으로 굴러떨어지는 사람의 머리를 비춥니다. 오스칼의 머리채를 잡고 있던 팔뚝이 주인의 몸에서 떨어져 나와 떠다닙니다. 오스칼은 물 위로 고개를 들고 엘리의 얼굴을 마주합니다. 이 끔찍한 장면은 그들을 둘러싼 폭력과 야만, 편견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소망에 관한 은유입니다. 이제야 그들은 활짝 웃습니다. 영화의 시작과 마찬가지로 영화는 눈 내리는 밤을 보여줍니다.
영화는 한 폭의 그림과도 같습니다. 울울한 하늘, 하얀 설원, 잎을 떨군 나무가 끝없이 펼쳐집니다. 그 차디찬 풍경 속에 오밀조밀 자리 잡은 정글짐이 아이들의 쉼터입니다, 아파트에서 새어 나오는 노란 불빛만이 온기를 보냅니다. 청명한 서리, 눈 덮인 가지 속에 피어난 붉은 꽃의 대비에 눈이 시립니다. 촬영감독 호이트 반 호이테마는 스프레이-라이트 기법으로 물안개 같은 빛을 창조해 어둠 속에 선 소년과 소녀를 더욱 몽환적으로 보이게 합니다.
다음 장면은 큰 상자를 옆에 둔 채 기차에 탄 오스칼을 비춥니다. 오스칼의 환한 금발이 햇빛을 받아 반짝입니다. 소년은 상자를 손가락으로 긁습니다. 누군가 상자 안에서 같은 방법으로 신호를 보냅니다. 결말은 두 가지 상반된 해석을 동시에 제시합니다. 오스칼과 엘리의 기차 여행은 진정한 사랑의 시작일 수도, 새로운 희생자가 만들어지는 순환의 고리일 수도 있습니다. 엘리의 이전 보호자가 오스칼을 향해 보낸 질투 어린 시선은 이미 그 운명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진정한 이해와 수용을 통해 함께 도피하기를 선택했을까요? 그렇다면 오스칼이 사랑과 동시에 폭력마저 수용하는 삶을 스스로 수용했음을 뜻합니다.
영화 <렛미인>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혹은 노회한 엘리가 오스칼을 이용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수영장에서의 장면은 진정한 구원일까요? 아니면 ‘가스라이팅’의 시작일까요? 오스칼은 엘리의 보호자였던 남성의 전철을 밟아 엘리에게 예속되는 걸까요? 그 순간 아이들의 순수한 사랑과 구원 서사는 착취와 순환의 서사로 뒤바뀝니다. 사랑과 의존, 구원과 착취의 경계는 어디일까요? 영화는 열린 결말을 제시하며 판단을 관객의 몫으로 남깁니다.
영화는 욘 A. 린드크비스트가 쓴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합니다. 그의 소설 중 많은 작품이 영화화되었습니다. 소설과 영화라는 매체의 차이를 잘 이해하는 작가임을 뜻하기도 합니다. 린드크비스트는 영화에서 후자의 해석을 받아들였다고 직접 밝힌 바 있습니다. 린드크비스트는 소설의 결말을 영화가 훌륭하게 재해석했다고 생각하지만, ‘나의 결말’은 아니라고 선언합니다. 그는 소설 ‘렛미인’의 외전을 발표함으로써, 영화가 제시한 결말에 대해 답합니다. 소설에서 두 아이는 서로 피를 교환함으로써 영원한 소년 소녀로 남습니다. 이는 저자가 영화를 소설에 대한 재해석으로 받아들이고, 거기에 다시 반응하는 형태로 후속작을 썼음을 의미합니다. 소설과 영화의 범위와 경계를 초월하거나 아우르는 메타적 글쓰기인 셈입니다. 영화와 소설의 결말을 비교하는 방법 역시 즐거운 ‘영화 읽기’가 아닐까요?
오스칼과 엘리의 삶이 어떤 선택의 결과물일지라도 이번 관계는 예전과는 다를 것이라는 희망의 끈을 놓고 싶지 않습니다. 어쩌면 지난번 ‘집사’와 엘리의 관계가 예외적 삶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모든 인간관계에는 구원과 착취, 이해와 원망이 함께 엮여있는 법입니다. 그들이 내린 선택이 어떤 성격일지라도 그들 앞에는 설원과 어두움, 피의 꽃이 늘 함께 할 것입니다. 눈 내리는 밤 ‘let me in’이라는 속삭임은 여전히 우리 귓가에 맴돕니다. 그 초대의 결과가 어떤 세계로 우리를 이끌지 역시 우리가 감당할 몫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