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0권의 책 만든 정병규의 손…"책의 육체는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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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디자인' 개념조차 없던 70년대부터
한수산 '부초' 표지 등 파격실험 거듭
책의 종말론 단호히 부정해
"새로운 책의 시대가 온다"
한글의 조형미에 주목
오는 31일까지 창원서 전시회
한수산 '부초' 표지 등 파격실험 거듭
책의 종말론 단호히 부정해
"새로운 책의 시대가 온다"
한글의 조형미에 주목
오는 31일까지 창원서 전시회
"그런데… 만든다는 게 큰 북입니까, 작은 북입니까?" 1980년대 초, 1세대 북디자이너 정병규(79)의 인터뷰 사진을 찍으러 온 사진기자가 물었다. 책이 디자인의 대상이라고는 상상조차 않던 시절이었다. 당시 책이란 종이와 활자의 묶음이었다. 출판사 편집자가 떠맡는 책 표지 작업은 '알록달록한 삽화, 그리고 금적색 글씨의 책 제목' 수준을 맴돌았다. 본문 가독성이나 전달력에 대한 고민도 적었다.
'한국의 첫 북디자이너가 되겠다' 선언한 정병규의 등장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그는 관행을 깨고 표지에서 제목 글자만을 조형적으로 내세우거나 제목보다 저자 이름을 키우는 실험을 즐겼다. 그의 디자인은 신문 지면을 달궜고, 숱한 모방을 낳았다. 그렇게 약 50년간 디자인한 책이 3000권이 넘는다.
"내 디자인의 본질은 신문"
"아마 나 같은 북디자이너가 다음에 나오기는 굉장히 힘들 거예요." 인터뷰를 시작하며 정 대표가 이렇게 운을 뗐을 때, 자부심의 표현인 줄 착각했다. 직업을 개척한 사람이 누릴 법한 긍지처럼 들렸다.
정 대표는 담담히 덧붙였다. "나는 디자인에서 출발한 게 아니라, 책을 좋아하고 책의 세계를 깊이 파고 들다 보니 출판사 편집자 생활을 거쳐 북디자이너가 됐어요. 지금처럼 분업화되고 디자인을 전문적으로 배우는 시대에는 쉽지 않죠."
엉겁결에 출판계 일을 시작했다. 경북고 미술반 시절부터 교지 레이아웃을 잘 짜기로 소문난 덕에 교내외 출판물 작업을 해왔던 그였다. 정 대표는 "신문 지면은 이미지와 활자의 만남"이라며 "내 디자인의 본질은 신문에서 나왔다"고 했다. 훗날 그는 문화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 한겨레 등 일간지들의 판형 혁신이나 종이 교체를 자문하기도 했다.
"처음에 북디자인만 하게 해준다고 그랬는데 결국 기획, 교정·교열, 디자인, 광고까지 도맡게 됐어요. 그 당시에 출판 환경이 그랬어요. 박 회장이 '이러다 너 쓰러진다'면서 유학을 다녀오라고 하더라고. (웃음)"
유학 경험은 정 대표가 북디자인의 세계에 빠져든 결정적 계기였다. 해외 출판의 다양성을 목격한 그는 당시를 "호되게 당했다. 신천지에 눈을 떴다"고 회상했다. "일본 서점에 갔더니 그림책 코너가 따로 있더라고요. 우리는 교양 책만 돋보일 뿐 다른 장르라는 게 없던 때였어요. 오죽하면 내가 어문각에서 만든 어린이잡지 '새소년'에 세계 명작 그림책을 직접 번역해 소개했을 정도였죠."
파리 유학에서 돌아온 정병규는 대체할 수 없는 이름이 됐다. 1989년 교보문고가 제정한 제1회 북 디자인상에서 대상은 물론 장려상, 아이디어상을 휩쓸었다. 상 쏠림에 대한 지적이 걱정됐는지 심사평에서 "심사위원들은 어느 한 디자이너와 집중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었다"며 "이 디자이너가 지금 거의 유일하게 토탈디자인 개념에서 진력을 하고 있음을 반증해주는 것"이라고 밝혔을 정도다.
그는 "북디자인이야말로 모든 그래픽디자인의 원점"이라며 "소리와 말, 그림과 글자, 텍스트와 이미지의 혼연일체의 결정"이라고 강조했다.
"책에 대한 아이디어는 책에서 얻는다"
4시간에 걸친 인터뷰 중간중간 그는 눈을 감고 말을 이어갔다. 적확한 표현을 고심할 때 나오는 습관이었다. 그러다 오늘날 '종이책 종말론'에 대해 묻자 그가 특유의 큰 눈을 번쩍 떴다. "내가 절대 안 믿는 말이 있습니다. '단군 이래 최대의 불황.' 국내 출판 산업이 제대로 구색도 갖추기 전부터 출판계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고요."
정 대표는 "1인 출판에 희망을 걸고 있다"고 했다. 그는 오래 전부터 기획(Planning), 생산(Editing), 디자인(Design), 마케팅(Marketing) 등 책의 전생애를 통합적으로 다루는 '페뎀(PEDeM)'의 덕목이 출판인에게 필요하다고 주창해왔는데, 최근 늘어나고 있는 1인 출판에서 페뎀의 가능성을 봤다.
그는 "책에 대한 희망도, 책에 대한 아이디어도 책에서 얻는다"고 말했다. "인류가 만든 것 중에 세월이 가도 안 없어질 게 숟가락, 바퀴, 그리고 종이책입니다.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이보다 더 나은 형태를 고안하기 힘드니까요. 이 얘기도 책을 통해 배웠습니다. 움베르토 에코와 장 클로드 카리에르의 대담집 <책의 우주>였던가…."
한글 타이포그래피라는 또 다른 도전
개척이 천성인 걸까. 한국 출판계에 북디자인의 세계를 처음 소개한 그가 몇 해 전부터 새로 몰두하고 있는 분야는 '한글 타이포그래피'다. 한글을 뜻을 전달하는 문자가 아니라 미학의 대상으로 바라보자고 주창한다.
생소한 작업을 이어가는 건 국내 종이책의 미래와 잠재력을 탐구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다. 정 대표는 인문학의 여러 개념을 북디자인에 반영했고, 후배들도 그래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TT의 철학을 설명할 때면 들뢰즈와 칸트, 훈민정음 해례본을 오갔다. "요즘 북디자인은 미세한 부분에서 성과를 노리지, 한국 사회나 출판에 갖는 의미를 큰 틀에서 바라보지 않는 것 같아 그게 좀 안타깝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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