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살 연상 외숙모가 내 애를 낳았다"…'막장 불륜' 금수저 최후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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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주의의 시초
테오도르 제리코(Theodore Gericault)
테오도르 제리코(Theodore Gericault)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그는 모두가 부러워하는 청년이었습니다. 평생 먹고살 걱정 없는 부자, 재능을 인정받는 화가, 파리 사교계의 멋쟁이. 하지만 지금 그 모든 건 지나가 버린 얘기일 뿐이었습니다. 그가 여섯 살 연상의 외숙모와 금지된 사랑에 빠졌고, 끝내 아들까지 낳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미친 듯이 캔버스에 매달렸습니다. 당시 프랑스 사회를 뒤흔든 대참사, ‘메두사호 뗏목 사건’을 그리며 자신의 마음속 지옥을 캔버스에 옮겼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모든 격정을 담은 걸작, ‘메두사호의 뗏목’이 태어났습니다.
자유로운 영혼
제리코는 ‘금수저’였습니다. 부잣집에서 태어난 그는 열일곱 살 때 어머니에게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았고, 평생 먹고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자유를 얻게 됐습니다. 그 자유로 제리코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학교를 때려치우고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천부적인 미술 재능이 있었거든요.제리코는 규칙과 규율을 싫어하는 ‘자유로운 영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카데미에 입학해 교육 과정을 따르는 대신 여러 화가의 작업실을 오가며 자유롭게 그림을 배우기로 했습니다. 스승의 화실에서도 제리코는 정해진 규칙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모델이 오른팔을 들면 그는 “모델을 그대로 그리는 건 지루하다”며 왼팔을 든 모습을 그렸지요. 스승의 그림을 베껴 그리는 시간에는, 차분하고 단정한 그림을 격정과 에너지로 가득한 자신만의 스타일로 멋대로 바꿔 그렸습니다. 그림을 본 스승은 화를 내며 말했습니다. “재능은 훌륭하지만 위험한 녀석이다. 이건 미친 짓이야. 그림이라고 할 수도 없어.”
스승의 작품을 제멋대로 바꿔 그리는 건 확실히 예의에 어긋나는 일. 하지만 스승이 분노했던 건 그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프랑스 미술계의 상식에서 제리코의 그림은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것이었거든요.
이렇게 폭풍처럼 몰아치는 격렬한 감정을 그대로 그림에 쏟아붓는 화풍을 ‘낭만주의’라고 합니다. 훗날 낭만주의는 프랑스 미술계의 대세로 자리 잡습니다. 제리코는 그 대표적인 선구자 격이었지요. 미술을 제대로 배운지 얼마 안 된 젊은이가 새로운 ‘대세’를 만들 수 있었던 것. 그건 제리코가 자신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작품에 담아낸 덕분이었습니다. ‘낭만주의적 기질’은 예술뿐 아니라 제리코의 삶 전체를 이끌어가고, 특별하게 만드는 동력이었지요. 하지만 이는 ‘미친 사랑’을 낳는 비극의 씨앗이 됩니다.
제리코와 불과 여섯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던 그녀는 나이 많은 남편에게 기대할 수 없는 교감과 열정을 젊은 조카에게서 찾았습니다. 제리코도 아름답고 매력적인 그녀에게 끌렸습니다. 하지만 외숙모, 그것도 아버지처럼 자신을 돌봐주던 외삼촌의 아내와 불륜을 벌이는 건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될 사회적 금기. 어떤 선택이 옳은지는 굳이 따져볼 필요도 없었습니다. “이건 미친 짓이야. 그만둬.” 제리코의 머리는 경고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가슴은 이성을 집어삼켰습니다. “그녀가 없으면 나는 살 수 없어.” 결국 제리코는 알렉상드린에게 빠져들게 됩니다.
파국, 그리고 지옥
매혹적인 사랑에 굴복했다고 해서 죄책감과 두려움까지 사라진 건 아니었습니다. 제리코가 겪는 고통은 갈수록 심해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탈리아 로마로 향했습니다. 명목은 그림 공부를 위한 유학이었지만, 사실상 외삼촌과 외숙모의 곁에서 최대한 멀어지기 위한 선택이었지요. ‘로마에서 위대한 거장들의 작품을 보면 마음이 좀 가라앉을 거야. 미술 공부에 전념하면 잡념도 사라질 테고.’
꺼졌던 미친 사랑의 불씨는 다시 타올랐습니다. 제리코와 외숙모의 관계는 전보다 더 깊어졌습니다. 그리고 1818년 8월,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외숙모가 제리코의 아들을 낳은 것이었습니다. 노쇠한 외삼촌의 아이일 가능성은 없는 상황. 결국 가족들은 제리코와 외숙모의 비밀을 알게 되고 맙니다. 가족은 이 사건을 철저히 비밀에 부치기로 했습니다. 소문이 새어나간다면 가족 전체가 엄청난 망신을 당할 테니까요. 가족들은 제리코와 의절하고, 제리코의 아들에게 ‘조르주 이폴리트’라는 상관없는 이름을 붙여 시골로 보내버렸습니다.
승객 400여명을 싣고 식민지로 향하던 메두사호. 하지만 무능한 귀족 출신 ‘낙하산’ 함장의 실수 때문에 배가 부서지게 됩니다. 구명보트를 탈 수 있었던 건 함장을 비롯한 250명의 엘리트 계층뿐이었습니다. 나머지 147명의 승객과 하급 선원들은 급조한 뗏목에 버려졌습니다. 13일간의 난파 후 구조선이 왔을 때 남아있던 건 서로를 죽이고 인육을 먹으며 간신히 살아남은 15명뿐. 그중 다섯명은 육지에 닿기 전 목숨을 잃었습니다. 당시 프랑스 사회를 뒤흔든, 그야말로 끔찍한 대참사였습니다.
제리코는 이 사건에서 자신의 모습을 봤습니다. 사회적 금기를 어기고 추방당한 채 죄의식에 미쳐 가는 자신을, 살아남기 위해 모든 걸 버려야 했던 생존자들에 비춰 본 겁니다. 금기를 어긴 사람도 살아 있을 자격이 있는가.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인간의 조건’은 무엇인가. 작품을 완성한다면 그 답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제리코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메두사호 사건을 주제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몇 달간의 연구를 거친 제리코는 마침내 어떤 장면을 그릴지 결정했습니다. 서로 죽고 죽이는 끔찍한 다툼, 인육을 먹는 처참한 순간…. 드라마틱한 장면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리코는 ‘생존자들이 저 멀리 지나가는 배를 발견한 순간’을 그리기로 했습니다. 제리코가 포착하고자 한 건 단순한 공포나 잔인함이 아니라, 절망의 가장 밑바닥에서 피어나는 가장 위태로운 희망의 불씨였기 때문입니다. 그 모습은 제리코의 내면이었습니다. 동시에 이는 자신이 지은 죄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작품 ‘메두사호의 뗏목’은 8개월 만에 완성됐습니다. 제리코와 알고 지내던 외젠 들라크루아는 작업실에서 완성된 작품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들라크루아의 기록은 이렇습니다. “작품을 보고 얼마나 깊은 감명을 받았는지, 나는 그 사람의 작업실에서 나와 그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거리의 반대쪽 끝, 당시 내가 살던 집까지 미친 사람처럼 쉬지 않고 달렸다.”
미친 사람을 그리다
1819년 살롱 전시에 ‘메두사호의 뗏목’이 공개되자 미술계는 격렬한 논쟁에 휩싸였습니다. 그림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갖가지 이유를 들어 제리코를 헐뜯었습니다. ‘색이 너무 어둡다.’ ‘드넓은 바다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 ‘그림만 보면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그의 작품에는 사람의 마음 깊은 곳을 흔들어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있었습니다. 프랑스 왕 루이 18세는 작품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리코, 당신은 위대한 걸작을 만들었습니다.”이듬해 제리코는 작품을 들고 영국 런던으로 건너가 상업 전시를 열었습니다. 전시는 당시로서는 이례적으로 많은 4만명 이상의 관람객을 동원하며 엄청난 성공을 거뒀습니다. 그가 그린 판화 작품도 불티나게 팔려나갔습니다. 이는 시골로 보낸 아들에게 드는 양육비를 마련하는 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하지만 이런 성공도 제리코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지는 못했습니다. 그의 우울증은 갈수록 깊어졌습니다. 자살을 시도하다가 실패한 적도 몇 번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리코는 붓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의 시선은 이제 바깥세상의 드라마가 아닌 인간의 내면으로 향했습니다. 정신과 의사 조르제 박사의 의뢰를 받아 그린 ‘광인 연작’은 그의 마지막 걸작으로 꼽힙니다. 사회에서 버림받은 이름 없는 환자들의 공허한 눈빛. 도박으로 모든 걸 잃은 남녀, 질투에 미친 여성, 편집증에 시달리는 남성…. 겉으로 보이는 모델의 생김새에 더해 내면의 광기까지 스냅사진을 찍듯 묘사한 이 연작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사실주의 미술을 앞서 보여준 사례입니다.
제리코라는 이름
제리코는 자기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격렬한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는 ‘낭만주의자’ 그 자체였습니다. 이런 기질은 예술가로서는 축복이었지만, 한 인간으로서는 저주에 가까웠습니다. 낭만주의적 기질로 인해 제리코는 인간의 도리를 어기는 잘못을 저질렀고, 사람이 겪을 수 있는 가장 밑바닥의 감정을 경험했으며, 그것을 캔버스에 옮길 수 있었습니다. 마치 태양을 좇는 나방이 불 속으로 뛰어들듯이.
하지만 그는 자신의 전부를 던져 두 척의 배를 육지로 밀어 올렸습니다. 한 척은 ‘새로운 예술’이라는 배였습니다. 낡은 규칙에 갇혀 침몰하던 19세기 프랑스 미술은 제리코가 밝힌 불꽃을 등대 삼아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 잿더미 속에서 들라크루아의 낭만주의 미술이, 귀스타브 쿠르베의 사실주의 미술이, 그리고 마침내 현대미술이 뭍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이번 기사는 Gericault - His Life and Work(로렌츠 아이트너 지음), 줄리언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줄리언 반스 지음)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 담당 기자가 미술사의 거장들과 고고학, 역사 등을 심도 있게 조명하는 국내 문화 분야 구독자 1위 연재물입니다. 매주 토요일 새로운 이야기로 찾아옵니다. 네이버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미술 소식과 지금 열리는 전시에 대한 심층 분석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 구독 중인 7만여명의 독자와 함께 아름다운 작품과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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