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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려움과 웃음, 그 얇은 틈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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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rte] 김수미의 최애의 최애

    웃을까, 날카로워질까

    알프레드 브렌델과 찰리 채플린이 말하는 거리두기의 힘
    단죄의 시대, 스스로 거두는 진짜 안도감

    요즘을 살아가는 우리는 사소한 말실수나 작은 허점에도 쉽게 날을 세운다. 댓글 하나에도 비난과 다툼이 쏟아지고, 누군가의 실수는 곧장 단죄의 대상이 된다. 경제적 불안, 치열한 경쟁, 허술한 안전망 등으로 불확실함이 일상이 된 가운데, 우리는 자신의 불안을 들여다보는 대신, 타인의 결점을 지적하면서 ‘나는 제대로 살고 있다’는 착각으로 안도하고 싶어 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짜 안정을 주는 건, 더 촘촘하고 엄격한 기준이 아니라 함께 웃을 수 있는 순간이다. 웃음은 본래 타인과 관계를 맺고 긴장을 풀게 하는 본질적 속성을 지녔다. 인간이 왜 웃게 되었는지에 대한 여러 가설 중 가장 마음이 가는 이야기는 이렇다. 맹수의 습격에 늘 노출된 원시인들은 극심한 두려움에 시달리곤 했다. 그런데 주위를 맴돌던 맹수가 사라지거나, 꿈틀대던 그림자의 정체가 알고 보니 사슴이었을 때, 그 사실을 가장 먼저 깨달은 이가 무리를 향해 “안심해도 된다”는 신호로 내뱉은 탄성이 웃음의 기원이라는 것이다.

    ‘어긋남’ 속에서 웃음을 붙든 음악의 유머니스트

    지난 6월 세상을 떠난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브렌델은 음악 속에 깃든 유머의 존재와 그 중요성을 일깨운 연주자다. 그는 특정한 거장의 영향력에 물들지 않고 자기만의 길을 걷고자 했다. 16살 이후로는 선생님에게 정식으로 배우기보다, 혼자서 녹음을 듣고 악보를 연구하며 긴 시간을 연습했고, 그림과 글, 책을 탐구하면서 스스로의 해석을 갈고닦았다. 하이든, 슈베르트, 모차르트, 베토벤, 리스트 등에 대한 그의 해석은 독창적이면서도 빈틈없이 치밀하다는 평을 받았다.

    ▶▶▶[관련 기사] 베토벤 전곡 음반의 전설...피아니스트 브렌델 별세

    브렌델이 유머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된 계기는 전쟁의 상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그 역시 많은 유럽인처럼 삶의 기반을 잃고 깊은 혼란과 불안을 겪었다. 2015년 마틴 마이어와의 대담에서 ‘돌이켜 봤을 때 예술가로서 인생의 어떤 측면을 바꾸고 싶습니까?’라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나치와 파시스트의 기억이 없으며, 히틀러나 괴벨스가 방송을 하지도 않겠지요. 군인도, 당원도, 폭탄도 없어요”(알프레드 브렌델, 『뮤직, 센스와 난센스』)
    알프레드 브렌델 / 출처. 위키피디아
    알프레드 브렌델 / 출처. 위키피디아
    그러나 그 고통스러운 경험은 브렌델의 세계관을 만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는 세상이 논리적이거나 공평하지 않고, 바라는 대로 흘러가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하지만 부조리에 대해 분노나 진지함으로만 대하기보다, 그 속에서 아이러니와 어긋남을 발견해 웃음으로 전환하는 것이야말로 삶을 견딜 힘이 된다고 믿었다. 그의 유머관을 접하는 동안 ‘충청도식 화법’으로 회자되는 몇몇 일화가 떠오르기도 했다. 이를테면 물난리로 도로가 엉망이 된 날, 택시를 타고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한 손님이 “감사합니다, 기사님”이라고 인사하자 택시 기사가 “선장이라고 불러~”라고 했다는 식의 이야기들 말이다.

    진지함을 일순간 뒤집고, 긴장을 누그러뜨리는 찰나의 전환은, 유머와 음악이 공유하는 힘이기도 하다. 브렌델은 클래식 음악 속에서도 그런 유머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웃음은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긴 틀이 깨지고, 익숙한 흐름에서 벗어나는 순간에 탄생한다. 감정의 흐름이 자유롭고 형식이 느슨한 낭만주의 음악에서는 이런 유머가 드러나기 어렵지만, 명확한 구조와 전통적인 어법이 살아 있는 고전주의 음악에서는 유쾌한 어긋남이 가끔 빛을 발한다. 브렌델은 그런 음악적 유머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펼쳐 보여주고자 했다.

    [알프레드 브렌델이 유머의 음악적 사례로 든 하이든의 피아노 소나타 C장조 H.XVI No.50: 3. Allegro molto. 명백하게 ‘실수’라고 느껴지는 B장조 화음이 등장하는데, 이를 은폐하려는 듯 천연덕스럽게 곡이 다시 흐르지만 그 존재감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찰리 채플린 영화를 보며 웃음 짓던 소년

    브렌델은 음악뿐 아니라 영화, 문학, 시, 다다이즘까지 폭넓게 탐구했다. 유머에 대한 그의 철학에 영감을 준 대상은 무수히 많았을 테지만, 그의 기억 속에 최초로 자리 잡은 인물을 꼽으라면 찰리 채플린이다.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브렌델은 영화관을 운영하던 아버지 덕분에 작은 영사기로 집에서 다양한 고전 영화를 보며 자랐다. 어린 시절 우연히 본 한 장면이 평생의 선택과 생각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브렌델에게는 채플린이 그런 존재였을지 모른다.
    알프레드 브렌델 / 출처. 알프레드 브렌델 홈페이지(alfredbrendel.com)
    알프레드 브렌델 / 출처. 알프레드 브렌델 홈페이지(alfredbrendel.com)
    찰리 채플린은 어린 시절부터 빈민구호소를 전전할 만큼 극심한 가난 속에서 자랐다. 그래서일까, 그의 영화들은 대부분 씁쓸한 사회 현실을 배경으로 삼는데, 역설적이게도 그 안에는 재기 발랄한 유머가 가득하다. <모던 타임스>에서는 점점 더 빨라지는 컨베이어 벨트의 속도에 맞춰 쉴 틈 없이 나사를 조이는 주인공의 모습이 우스꽝스럽게 연출되고, <위대한 독재자>에서는 히틀러를 연상케 하는 독재자 ‘힌켈’이 등장해, 권력자의 허세와 탐욕을 코믹하게 풍자한다. 알프레드 브렌델이 가장 사랑하는 영화 음악으로 언급했던 <시티 라이트>에서는 가난한 부랑자가 시각장애인 소녀를 도우려는 과정에서 빈부 격차와 현실의 모순이 엉뚱한 해프닝을 통해 펼쳐진다.

    『찰리 채플린, 나의 자서전』에서 채플린은 “유머를 통해 합리적으로 보이는 행동에서 불합리를 발견하고, 중요한 것처럼 보이는 것에서 하찮음을 본다”고 말했다. 이는 우리가 살아오면서 당연하게 받아들였거나 무조건 옳다고 믿었던 것들에 의문을 던지고, 너무나 중요하고 심각하게만 여겼던 일들이 사실은 별것 아닐 수 있다는 깨달음을 유머가 줄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채플린의 유머 미학이 어린 브렌델의 마음속에도 깊이 스며들어, 훗날 그가 삶의 부조리와 어려움을 견디는 데 힘이 되어주지는 않았을까 상상해 보게 된다.
    영화 <시티 라이트> 스틸컷 / 출처. Wikidata - 영화광으로도 유명했던 브렌델은 2012년 빈 국제영화제 상영 프로그램을 직접 기획한 적이 있다. 그는 ‘두려움과 웃음 사이’라는 주제로 오싹함과 우스꽝스러움이 교차하는 20세기 작품들을 선별했다. 이미 널리 알려진 고전 작품들은 제외했지만, 프라하 상영 프로그램에는 예외적으로 찰리 채플린의 <시티 라이트>를 끼워 넣었다.
    영화 <시티 라이트> 스틸컷 / 출처. Wikidata - 영화광으로도 유명했던 브렌델은 2012년 빈 국제영화제 상영 프로그램을 직접 기획한 적이 있다. 그는 ‘두려움과 웃음 사이’라는 주제로 오싹함과 우스꽝스러움이 교차하는 20세기 작품들을 선별했다. 이미 널리 알려진 고전 작품들은 제외했지만, 프라하 상영 프로그램에는 예외적으로 찰리 채플린의 <시티 라이트>를 끼워 넣었다.
    정색 대신 농담이라는 선택지

    알프레드 브렌델과 찰리 채플린이 말하는 웃음은 현실에서 도망치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마주한 현실을 한 발짝 물러서 바라보며,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인 ‘정답’에 물음표를 던지게 만드는 계기다. 타인의 말실수나 허점을 단죄하고, 긴장과 불안을 분노로 표현하고픈 충동을 비틀어서 대해볼 수도 있다면, 삶은 조금 느슨해지고, 마음엔 틈이 생긴다. 나를 둘러싼 수많은 문제 중 어떤 것들은 그리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브렌델과 채플린이 소중히 여겼던 유머는 바로 그런 변화의 시작점이었을 것이다.

    의미를 흔들고 기대를 뒤엎어 경직된 사고를 깨뜨리며, 인간을 해방하는 유머를 음악과 삶에서 강조했던 알프레드 브렌델. 슬픔과 고통에 압도될 때면 ‘지금 너무 진지하기만 한 건 아니야?’하고 눈을 반짝이며 말을 거는 듯한 그의 음악을 더 자주 떠올리려 한다. 혼란과 모순, 무력감을 앓으며 서로의 허점을 날카롭게 노려보게 되는 시대일수록, 그가 붙드는 웃음은 소중한 숨구멍이자 따뜻한 위로로 우리 곁을 보듬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음악과 웃음은 사랑 이외에 이 세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유익한 것입니다. 이들은 인생에 의미를, 무의미를 안겨줍니다.”
    - 알프레드 브렌델, 홍은정 옮김, 『아름다운 불협음계』(한스미디어)
    김수미 음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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