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상 조명상 수상자 김하나 디자이너
"이야기와 영리하게 맞닿은 무대 디자인"
"제주도 장면은 스펙타클의 모범답안"
작년 가을, 비디오 프래그래머 친구한테서 뜬금없는 연락이 왔다. 뉴욕에 있다면 본인이 프로그래밍을 하는 공연 리허설에 잠깐 놀러 오라는 것이었다. 마침 시간이 되니 한번 서성여볼까 하는 생각에 발을 디딘 곳에서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Maybe Happy Ending)을 처음 만났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재즈로 문을 여는 오프닝에서 세트의 아이리스(화면의 장면 전환 기법 중 하나로, 한 점을 중심으로 원형으로 확대되거나 축소되는 효과)가 닫히고 열리는 현대적인 느낌이 생각지도 못하게 어울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신선한 첫인상에, 공연이 정식 개막하면 다시 봐야겠다 싶었다. 반복해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들으면 들을수록 새로운 부분을 발견하는 느낌이었다.
몇 주 후, 뉴욕에 다시 왔을 때 '어쩌면 해피엔딩'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프로듀서들과 밥을 먹었다. 놀랍게도, 이 식사 자리의 주된 주제는 '어쩌면 해피엔딩'이었다. 그들은 "한국을 배경으로 한 아름다운 공연이 있는데, 현재는 표가 잘 팔리지 않고 있으니 빨리 사서 보고 응원해주라"며 내 등을 넌지시 떠밀었다.
기본적으로 브로드웨이는 오픈런으로 움직인다. 표가 잘 팔려 이윤이 생기는 기간에 공연하고, 이윤이 생기지 않으면 빨리 문을 닫는다. 한 공연이 예상보다 문을 빨리 닫으면 다른 공연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어서 경쟁 프로듀서들끼리 상대방 공연의 롱런을 바라는 것은 흔한 현상이 아니다. 신기하다고 생각하며 당일에 표를 사서 봤는데, 그들이 왜 그랬는지 알 것 같았다.
ⓒMatthew Murphy and Evan Zimmerman
특별한 경험이었다. 사랑과 죽음이라는,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주제를 섬세하고 조심스럽게, 무엇보다 '사랑스럽게' 풀어나갔다. 이해관계와 상관없이 마음을 흔들고, 응원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공연이 끝나자마자 소중한 사람과 다시 보고 싶어 다음 달 공연을 예매했다. 그리고 그때까지, 아니, 더 오래오래 브로드웨이에 남아있기를 바라게 됐다. 저녁 식사 때 내 등을 떠민 프로듀서도 같은 마음이었겠지.
이후 시간이 갈수록 입소문은 더욱 퍼져갔다. 그 중 많이 회자된 부분이 무대 디자인이었다. 브로드웨이를 자주 오는 관객들은 대부분 음악, 이야기와 더불어 어느 정도의 스펙터클을 기대하고 오는 것 같다. '어쩌면 해피엔딩'은 이야기의 힘이 강해서 작게 풀어도 크게 풀어도 나름의 매력이 있다. 하지만 브로드웨이라는 특정한 장소에서 상업적 성공을 거두려면 스펙터클 부분에서 핵심 요소, 소위 'X-factor'가 필요하다.
ⓒMatthew Murphy and Evan Zimmerman
무대가 바로 그 역할을 했다. 아이리스를 적극적으로 이용해 우리에게 익숙한 유저인터페이스(UI)를 연상시킴과 동시에 가림과 공개를 반복해 매 장면에서 놀라운 장면을 끌어냈다. 움직임이 워낙 많아 무대 자체가 '제5의 배우' 같기도 했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건, 이런 특수효과들이 그저 화려한 눈요기가 아니라 이야기와 영리하게 닿아 있다는 점이었다. 공연 초반에는 헬퍼봇 '클레어'와 '올리버'가 고립된 공간의 경계가 매우 분명하다. 극명히 다른 색깔의 공간이 차례차례 공개되고 처음에는 공존하지 않는다. 극이 진행될수록 이들 마음의 경계가 옅어지는데 동시에 세트의 경계선도 옅어진다. 특히 프로시니엄(무대와 객석이 구분된 액자형 무대)을 변형해 극장과 관객의 경계선을 없앤 것이 인상 깊었다. 극이 진행되면서 계속 색다른 형식으로 비슷한 디자인 서사를 풀어나가는데, 특히 제주도에서 반딧불을 보는 장면은 스토리텔링을 위한 스펙터클의 모범답안이지 않을까.
ⓒMatthew Murphy and Evan Zimmerman
'어쩌면 해피엔딩'은 한미 문화의 차이를 넘어 사랑을 배우는 두 로봇이 관객들에게 공연을 사랑하는 색다른 방법을 가르쳐줬다. 한국에서의 팬덤이 굉장히 두텁다고 들었는데, 미국에서도 공연이 흥행하지 못한 초반에 재정적 여유가 있는 관객들이 입소문을 내기 위해 '1+1' 개념으로 모르는 사람의 티켓을 사주는 운동을 벌였다. 이윤이 목적인 브로드웨이에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이례적이다. 한국에서 받은 깊은 사랑을 바탕으로 자란 공연의 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김하나 비디오 디자이너
한국계 미국인 김하나(미국명 하나 수연 김)는 서울에서 자라 서울대 미대에서 시각디자인을, 미국 UCLA에서 무대미술을 전공했다. 현재 브로드웨이에서 비디오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해 뮤지컬 '아웃사이더스'(The Outsiders)로 토니상 조명 디자인상을 수상했다. 최근 브로드웨이 작업으로는 이디나 멘젤과 함께한 뮤지컬 '레드우드'(Redwood), 이민자 이야기를 다룬 뮤지컬 '리얼 위민 해브 커브'(Real Women Have Curves)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