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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개국 음악가들, 경주에 흥을 더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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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13~15일 ‘2025 경주국제뮤직페스티벌’ 열려
    정명훈, 선우예권, 이윤국, 조수미 등 공연
    APEC 21개국 출신 단원으로 꾸린 악단도 활약
    KBS교향악단은 베토벤, 울산시향은 스트라우스 연주
    지난 6월 13~15일 ‘2025 경주국제뮤직페스티벌’이 열렸다. 올 11월 경주에서 열릴 ‘2025 APEC 정상회의 개최’를 축하하는 차원에서 3일간 하루 하나씩 공연이 열렸다. 경주 시민들의 격렬한 환호를 이끌어낸 축제의 열기를 글로 담았다.
    지난 13일 경주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베토벤 음악 공연에서 지휘자 정명훈이 관객들의 박수에 화답하고 있다. / 사진제공. 경주문화재단.
    지난 13일 경주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베토벤 음악 공연에서 지휘자 정명훈이 관객들의 박수에 화답하고 있다. / 사진제공. 경주문화재단.
    APEC 정상회의가 한국에서 열리는 건 20년 만이다. 2005년 열렸던 부산 회의에선 노무현 대통령,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 후진타오 중국 주석 등 태평양을 둘러싸고 있는 21개국 정상이 한국을 찾았다. 올해 행사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주석이 한자리에서 만나는 자리가 될지가 관심사다. 경주문화재단은 축제란 이름을 붙여 회의 개최를 기념하는 공연들을 경주예술의전당에 마련했다. 첫날엔 KBS교향악단이 계관 지휘자인 정명훈, 피아니스트 선우예권과 함께 베토벤 공연을 선보였다. 둘째 날엔 APEC 참가 21개국 출신으로 연주자들을 꾸린 악단이 각국의 민요를 들려줬다. 마지막 날은 지휘자 사샤 괴첼이 이끄는 울산시립교향악단이 조수미와 흥겨운 오스트리아 노래들을 들려줬다.

    섬세한 소리로 관객 몰입시킨 정명훈

    첫날 공연에선 KBS교향악단이 정명훈 지휘로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와 교향곡 5번 ‘운명’을 선보였다. 협연자는 2017년 밴클라이번 콩쿠르 우승자인 선우예권. 황제는 베토벤이 마지막으로 완성한 피아노 협주곡으로 3개 악장이 하나의 곡처럼 유기적으로 연결돼 장대한 서사를 드러낸다. 관객들의 열띤 박수와 함께 무대에 나타난 정명훈은 포디움에 자리하자마자 1악장을 시작했다. 선우예권은 경쾌한 손놀림으로 새가 지저귀는 듯한 고음을 띄우며 단번에 청중을 무대에 몰입시켰다. 악단과 피아노는 서로가 건넨 리듬과 음량을 고스란히 살려 곡의 흐름을 매끄럽게 이어갔다. 이따금 피아노가 속도를 더 내려는 듯할 땐 정명훈의 절도 있는 지휘가 마라톤의 페이스메이커처럼 템포를 고르는 역할을 했다.
    지난 13일 경주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베토벤 음악 공연에서 지휘자 정명훈이 관객들 앞에서 웃고 있다. / 사진제공. 경주문화재단.
    지난 13일 경주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베토벤 음악 공연에서 지휘자 정명훈이 관객들 앞에서 웃고 있다. / 사진제공. 경주문화재단.
    여유로움이 가득한 2악장에선 황제가 정원을 노니는 듯한 풍경이 그려졌다. 피아노 건반이 통통 튀는 소리를 낼 땐 현악기도 합을 맞춰 고스란히 퉁퉁거리는 울림을 줬다. 정명훈은 소리를 두텁게 쌓기보다 섬세하게 다듬은 소리들을 무대 한가운데에 응집하려는 듯했다. 세밀하고 조그만 소리가 이어지면 관객도 섬세한 음량을 들으려 귀에 신경을 쏟기 마련이다. 정명훈이 이끄는 악단이 관객의 주의를 모아 놓으면 선우예권이 이를 건반으로 폭발시키는 그림이 수차례 그려졌다. 현악기와 피아노가 긴장도를 한껏 끌어올렸다가 이완하길 반복하면서 청각적인 쾌감을 선사했다.

    피아노의 현란한 속주로 시작된 3악장은 선우예권이 에너지를 힘껏 폭발시키는 무대였다. 하이라이트는 건반을 강하게 두드린 손가락을 떼어냈을 때였다. 선우예권은 마치 건반이 쏜 총알에 맞은 것처럼 이마를 격렬하게 튕겨냈다. 피아니스트가 박력 있게 연주할 땐 망치처럼 두드린다는 말이 따라붙곤 한다. 선우예권의 강렬한 몸짓은 망치보다 반동이 느껴지는 기관총에 가까웠다. 이 박력 뒤로 섬세함이 몰려올 땐 피아노가 개구쟁이 테너가 흥얼거리는 듯한 소리를 냈다. 바이올린은 이 노래에 맞받아치는 새침데기 소프라노 같았다. 베토벤의 견고한 형식미를 노래하듯 발랄하게 풀어낸 악단과 선우예권의 해석이 빛난 마지막 악장이었다.
    피아니스트 선우예권. /사진제공. 경주문화재단.
    피아니스트 선우예권. /사진제공. 경주문화재단.
    관객들의 박수갈채를 받은 선우예권은 앙코르곡으로 그가 즐겨 치던 슈만의 ‘트로이메라이’를 골랐다. 들뜬 분위기를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연주였다. 이날의 경주는 여름을 알리는 장맛비가 한창이었다. 선우예권이 건반을 살포시 눌러서 생긴 부드러운 소리는 공연장에 감돈 습기와 어우러져 물안개가 이는 듯한 촉촉함을 만들어냈다.

    KBS교향악단만의 무대였던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은 섬세했다. 정명훈은 베토벤의 음악을 도면 삼아 콘크리트 건축물을 올리기보다는 도자기를 빚는 듯했다. 운명적 순간을 알리는 1악장의 호른은 부드러웠다. 플루트는 둥글게 다듬은 소리를 기복 없이 표현했다. 세밀한 음량 조절로 다른 악기를 훌륭하게 받쳐준 팀파니와 클라리넷의 묵묵한 헌신도 돋보였다. 저마다의 소리를 실크처럼 겹쳐가며 만든 정명훈의 지휘는 관객에게 오늘날에도 여전한 베토벤의 매력을 전달하기에 충분했다.

    21개국 민요에 흥겨웠던 무대

    둘째 날 공연은 APEC 21개국에서 모인 음악가들이 함께하는 무대가 펼쳐졌다. 이들 국가에서 연주자들을 모아 만든 악단인 ‘APEC21 앙상블’이 비발디의 ‘사계’를 계절별 1개 악장씩 들려줬다. 지휘는 헝가리의 성 겔러트 페스티벌의 음악감독을 맡고 있는 이윤국이 맡았다. 그는 비발디가 악보에 썼던 글귀들과 작곡 의도를 직접 설명해가면서 관객들에게 어떠한 그림을 상상해야 할지를 알려줬다. 가을 1악장에선 주정뱅이가 술에 곯아떨어진 숨소리를, 겨울 1악장에선 추위에 이가 덜덜 부딪치는 소리를, 봄 1악장에선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를 상기시켰다.
    소프라노 임선혜. / 사진제공. 경주문화재단.
    소프라노 임선혜. / 사진제공. 경주문화재단.
    이어선 소프라노 임선혜가 헨델의 오페라 <리날도>의 ‘울게 하소서’를 노래했다. 영화 ‘파리넬리’에서 카스트라토인 파리넬리가 불러 관객들을 숙연하게 만들었던 곡이다. 뒤이어 2023년 스위스 티보르 버르거 국제 콩쿠르에서 최연소 우승을 거머쥐었던 17세 바이올리니스트 김서현이 사라사테의 곡 ‘지고이네르바이젠’으로 깔끔한 연주를 들려줬다. 절정 부분의 애절함을 노래하듯 풀어내는 표현력이 인상적이었다.
    바이올리니스트 김서현(왼쪽)과 지휘자 이윤국. / 사진제공. 경주문화재단
    바이올리니스트 김서현(왼쪽)과 지휘자 이윤국. / 사진제공. 경주문화재단
    2부 공연은 APEC 21개국의 민요를 한자리에서 들을 수 있는 기회였다. 단원들은 저마다 출신국의 전통의상을 차려입고 무대에 올랐다. 연주에 앞서 갑자기 미국인 비올리스트인 제이슨 브라이언 피셔가 카우보이 모자를 쓴 채 작은북 소리와 함께 관객석 복도에서 나타나 좌중을 놀라게 했다. 이렇게 시작된 민요 메들리는 페루, 캐나다, 호주로 이어지며 관객들의 흥을 키웠다. 브루나이 차례에선 무용수가, 파푸아뉴기니 차례에선 내레이션이 나왔다. 임선혜가 부른 한국 가곡 ‘꿈속의 아리랑’은 플루트 연주와 어우러져 아리랑 특유의 애절함을 남겼다.

    국가별 민요를 오갈 때마다 공연장엔 다채로운 풍경이 그려졌다. 인도네시아 민요 ‘시 파토칸’에선 우거진 정글의 대자연이, 중국 민요 ‘모리화’에선 평화로운 차밭이 펼쳐졌다. 21개 민요 중 앙코르 무대의 주인공은 관객 호응이 가장 컸던 러시아의 ‘칼린카’였다. 게임 ‘테트리스’에 삽입돼 대중적으로 알려진 곡이다. 광기가 느껴질 정도로 빠르게 몰아치는 연주에 관객들은 1초에 2번 이상 박수를 치며 격하게 호응했다. 이때만큼은 경주예술의전당이 러시아 시골 마을에서 위스키와 함께하는 춤판 같았다.
    APEC 21개국 출신 단원들로 꾸린 악단인 'APEC21 앙상블'과 지휘자 이윤국. / 사진제공. 경주문화재단.
    APEC 21개국 출신 단원들로 꾸린 악단인 'APEC21 앙상블'과 지휘자 이윤국. / 사진제공. 경주문화재단.
    관객과의 소통에 탁월했던 조수미와 괴첼

    마지막 날 무대는 울산시향과 조수미가 준비했다. 지휘자는 지난 1월 울산시향 예술감독이 된 사샤 괴첼. 12년간 튀르키예의 보루산 이스탄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이끌며 유럽 변방 악단을 BBC프롬스와 같은 대형 무대에 올려놨던 인물이다. 오스트리아 빈 태생답게 그는 오스트리아 인기 작곡가인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왈츠와 폴카로 공연 1부를 채웠다. 공연 첫 곡인 오페레타 <박쥐>의 서곡이 들뜬 분위기를 표현하며 관객들의 관심을 단번에 끌었다.

    공연 내내 놀라웠던 건 괴첼의 쇼맨십이었다. 괴첼은 춤곡 분위기에 맞춰 자신의 발을 한시도 가만히 두지 않았다. 바이올린과 첼로 쪽을 번갈아 바라보며 분주하게 다리를 움직일 땐 포디움을 무대 삼아 춤을 추는 탭댄서 같았다. 가끔은 지휘봉을 검처럼 쭉 내밀며 다리를 낮추고 펜싱 자세를 취하기도 했다. 공연 2부의 서막이었던 ‘관광열차 폴카’에서 금관악기가 기차 경적 소리를 낼 땐 괴첼이 관객들을 향해 찰리 채플린같이 뚱한 표정을 지으며 웃음을 유발했다.
    소프라노 조수미가 울산시립교향악단과 공연하고있다. / 사진제공. 경주문화재단.
    소프라노 조수미가 울산시립교향악단과 공연하고있다. / 사진제공. 경주문화재단.
    다음 곡인 왈츠 ‘레몬 꽃이 피는 곳’ 차례가 되자 조수미가 손하트를 지으며 무대에 입장했다. 조수미는 말괄량이처럼 들뜬 표정으로 노래를 부르다가도 찬찬히 무대와 객석을 돌아보며 기품 있는 손짓을 건넸다. 겸양과 애교를 섞어 전달하는 표현력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왕녀가 2025년 경주에 나타난 듯했다. 프란츠 레하르의 오페라 <유쾌한 미망인>의 곡 ‘빌야의 노래’를 소화하고 나선 부끄러운 듯 왼팔을 웅크려 어깨에 바싹 포갰다. 가창 실력을 떠올리기에 앞서 ‘저 노래를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는 연기력이었다.

    마지막 곡 오페레타 <박쥐>의 ‘내가 순진한 시골 처녀를 연기할 때’에도 조수미는 무대를 장악했다. 그녀는 리듬에 맞춰 어깨를 실룩이거나 손가락을 튕기며 소울 음악의 디바 같은 분위기를 냈다. 순진한 척하며 주인을 놀리는 하녀 아델레를 연기하고 있다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사람의 가청 영역에 잡힐 듯 말 듯 초고음과 고음을 오갈 땐 좌중에서 감탄사가 나왔다. 지휘자인 괴첼은 아델레의 주인인 아이젠슈타인 남작이 돼 재치 있게 중간중간 목소리를 더하며 분위기를 띄웠다.
    소프라노 조수미가 울산시립교향악단과 공연하고있다. / 사진제공. 경주문화재단.
    소프라노 조수미가 울산시립교향악단과 공연하고있다. / 사진제공. 경주문화재단.
    세 차례나 이어진 앙코르에서도 흥겨움은 멈출 줄 몰랐다. 울산시향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는 다른 악단들이 들려줄 때보다 경쾌하고 힘찼다. 이어 조수미가 이흥렬의 ‘꽃구름 속에’를 부르자 관객들은 이번 세 차례의 공연에서 가장 컸던 박수로 화답했다. 마지막 앙코르였던 슈트라우스 1세의 ‘라데츠키 행진곡’에선 괴첼이 직접 관객들의 박수를 유도했다. 양손의 엄지손가락을 귀엽게 맞닿길 반복하며 조그마한 박수를 이끌어내다가 돌연 트램폴린 위에 있는 듯 신나게 점프해 큰 박수를 유도했다. 지휘자와 소프라노가 관객들과도 자유롭게 소통하며 열기를 더한 공연이었다.
    울산시립교향악단. / 사진제공. 경주문화재단.
    울산시립교향악단. / 사진제공. 경주문화재단.
    이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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