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만들어진 술과 맛있는 음식의 특징은 시간과 재료의 조화이다.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숙성과 블렌딩이지 않을까? 술이 익어가는 과정과 재료가 섞이는 과정이 마치 작곡과 같다. 술이 오크통에서 숙성되는 시간과 서로 다른 술이 마스터 블렌더의 혀에 의해 섞여서 특별한 블렌디드 위스키가 탄생하는 시간은 마치 오케스트라의 '향’(響, 울릴 향)과 같다.
각자가 생각하는 이유와 의미가 다르겠지만 많은 지휘자들이 자신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교향곡 레퍼토리 중 하나를 꼽으라고 한다면, 이구동성으로 브람스의 교향곡 1번을 꼽는다. 이 곡은 열정과 불안함 그리고 마주친 운명에 대한 고뇌, 평화와 행복을 통해 희망을 꿈꾸는 모습을 이야기한다. 더 나아가 역경을 딛고, 마치 알프스의 눈보라를 뚫고 비치는 햇살처럼 마침내 찾아오는 희망과 한 여인에 대한 사랑, 존경을 노래한다.시작부터 완성까지 21년이 걸렸는데, 여기에는 그간 브람스의 시간과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나에게도 브람스의 교향곡 1번은 오랜 시간 동안 매우 특별한 순간의 의미가 있다. 20세가 되던 해에 처음으로 프로페셔널 교향악단과 가졌던 음악회에서 이 교향곡을 처음 지휘했다. 흥미롭게도 지휘자와 오케스트라가 만들어내는 하모니처럼 맛과 향의 하모니를 만들어내는 위스키 마스터 블렌더의 세계를 알게 된 계기, 그리고 위스키의 맛을 즐기게 된 계기 역시 브람스 교향곡 1번이었다.
연주를 다 보고 작별 인사를 위해 무대 뒤로 찾아가니 마에스트로는 그냥 보낼 수 없다며 식사 자리에 초대해주었다. 아직도 생생하게 그려지는 시간이다. 마에스트로의 단골집인 유서 깊어 보이는 일본 전통 가옥에서 훌륭한 음식과 청주 등을 즐기며 어디로 튈지 모르는 무수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분 역시 참으로 음식을 깊게 즐기시는 분이었다. 오래전 한국에서 처음 비빔밥을 먹었을 때 대충 섞어 먹으려 하니 故 임원식(지휘자 1919~2002) 선생님께서 시간이 걸려도 모든 재료가 골고루 섞일 때까지 비벼야 한다고, 오케스트라의 사운드를 만들 때처럼 해야 한다며 혼났다고 했다.
그러면서 마에스트로는 잠시 생각을 멈추곤 위스키를 주문했다. 20대 초반의 청년이 처음 경험해보는 좋은 위스키의 그 향은 20여년이 지나도 여전히 코끝에서 맴돌고 있다. 산토리 제조사의 히비키. 산토리홀에서 연주 후 모인 자리이고 마침 산토리홀 관계자도 합석한 자리였기에 그저 마에스트로의 재치라고 생각했다. 그때에는 아직 나이도 어리고 대학생이었으니 위스키를 많이 접해보지 못했는데, 서양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위스키병에 한문으로 이름이 쓰여있던 게 매우 신기하게 느껴졌다. 울릴 향 '響'을 명사로 표현하여 울림, 히비키라고 마에스트로는 말했다. 블렌디드 위스키는 여러 개성 있는 그레인 위스키와 몰트위스키를 조화롭게 섞어서 탄생시킨다. 지휘자가 오케스트라의 다양한 악기들의 소리 밸런스를 조화시켜 울리게 하거나, 조향사가 여러 향들을 조화시켜 새로운 향을 탄생시키는 과정과 같이 위스키 마스터 블렌더가 창조해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