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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8세 어머니의 은근한 채근 [고두현의 아침 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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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대(三代)
    정성욱

    울 엄마 마흔넷에 날 가지시고
    산꽃 드신 만큼 배불러 오자
    남사스러워서 문지방 한번 넘어보지 못하시고
    진주 촉석루 초롱 빛에 넘실대는
    새벽 남강 바라보시다가
    날 낳았다고 하시네.
    구박이 서 말이라 행여 누가 볼까 봐
    다락방에 핏덩이 올려놓고
    끙끙 앓았다고 하시네,

    봉래산 마른버짐 가득한 국민학교 입학식 날
    울 엄마 손잡고 갔더니
    연지 볼그스름한 처녀 선생님
    엄마는 어디 가고 할머니 모셔 왔냐고
    어린 마음에 대못을 꽝꽝 박았네.
    지금은 선생님도 할머니가 되었겠지.

    울 엄마 날 늦게 낳은 죄
    얼마나 한(恨)이 강물처럼 깊으신지
    울 막내 연애하는 걸 눈치채고
    경로당 오랜 친구 장모님 만나서
    울 막내 장가 빨리 보내야 한다고 쑥덕대다
    날 평생 지옥에 빠뜨렸네.

    내년이면 울 엄마 백수(白壽)이시네
    소원대로 다 큰 손주 데리고 고향 가면
    오냐오냐 그놈 참 잘 자랐다고 하시네.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는데
    증손자 언제 보냐고 또 채근하시네.
    빌어먹을, 이래저래 할 일이
    아직도 난 많이 남아 있네.

    ---------------------------------
    108세 어머니의 은근한 채근 [고두현의 아침 시편]
    가정의 달 5월에 생각나는 시입니다. 1960년대만 해도 40대 중반에 아이를 갖는 일이 흔치 않았습니다. 그러니 ‘행여 누가 볼까 봐/ 다락방에 핏덩이 올려놓고/ 끙끙 앓았다’고 할 만하지요.

    아이도 자신이 늦둥이인 줄을 압니다. 입학식 때 ‘엄마는 어디 가고 할머니 모셔 왔냐고’ 묻는 선생님이야 ‘어린 마음에 대못을 꽝꽝’ 박은 사실을 몰랐겠지만, ‘마른버짐 가득한’ 초등학생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장성해 결혼을 하고 다 큰 아들 데리고 고향에 가면 어머니는 ‘오냐오냐 그놈 잘 컸다’ 하며 ‘증손자 언제 보냐’고 또 채근을 합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시인은 짐짓 ‘빌어먹을, 이래저래 할 일이/ 아직도 난 많이 남아 있네’라며 능청을 떱니다.

    거의 한 세기를 살아온 어머니와 그 뱃속에서 나온 늦둥이 아들, 또 그의 아들…. 이렇게 삼대(三代) 가족이 펼치는 인생의 풍경이 참 따뜻하고 정겹습니다.

    시인이 이 시를 쓴 게 10년 전이니, 올해로 그의 어머니 연세는 108세가 됐습니다. 얼마 전 그가 페이스북에 어머니 사진과 함께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지난 9일 토요일 어머니(108)께서 위독하시다는 연락을 받고 아들과 며느리, 아내와 함께 달려갔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우리 가족을 보시자마자 기력을 이내 회복하셨다. 정말 기분이 좋았다. 그 연세에 손자, 며느리 이름까지 기억하셨다.’

    사진 속의 어머니는 갓난아기처럼 몸이 가벼워 보였지만, 가족을 대하는 표정에는 ‘연지 볼그스름한 처녀’ 시절의 상큼함이 그대로 담겨 있었습니다. 댓글에는 “증손주 보여드리는 게 최고의 효도가 될 것 같습니다” 등의 덕담이 줄을 이었습니다.

    그 사이로 ‘새벽 남강’에 넘실대는 세월이 천천히 흐릅니다. ‘마른버짐 가득한’ 입학식 때의 모습은 어느새 삼대 가족의 역사를 짊어지고 살아온 가장의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지난 시절 시인은 가난 때문에 마음 졸이고, 자식 건사하는 일로 휘청거리기도 했습니다. 그는 ‘가장’이라는 시에서 ‘당신 낮은 어깨 위로 왜 그리 바람만 부는가// 세종대왕 하나면 아이의 내일 소풍을/ 세종대왕 하나면… 세종대왕 하나면…/ 중얼거리면서 골목길을 돌아서면/ 점점 더 낮아지는 저녁 해// 그려진 왕의 위엄이/ 오늘따라 더 높다’며 한탄하곤 했지요.

    하지만 그는 “세월이 지날수록 아련해지는 것들이 있다. 삶이 그렇고 사람이 그렇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지난날이 문득 추억이 되어 찾아온다”고 말합니다. “무릇 오래된 것에는 힘이 있어 저물어가는 것들은 모두 아름답다”고 말입니다.

    그가 네팔, 캄보디아, 미얀마 등의 벽촌에 책을 보낸 것도 이런 마음과 닿아 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네팔 오지에 학교를 짓는 봉사활동을 하던 중 추락사고와 교통사고를 잇달아 겪으며 인생에 대해 더 깊이 사유하게 됐다”고 털어놨습니다.

    오랜 편집자 생활을 거쳐 몇 년 전부터 출판사 대표로 일하는 그의 일상도 시로 세상을 어루만지고 활자로 사람을 위무하는 일의 연속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그런 아들을 ‘진주 촉석루 초롱 빛’ 같은 눈으로 고즈넉이 지켜보며 ‘산꽃’처럼 환한 미소를 짓곤 합니다.


    ■ 고두현 시인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유심작품상, 김만중문학상,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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