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을 한 후 충분한 기다림의 시간을 거쳐 마침내 김치통을 개봉했을 때, 한 겹 한 겹 정성스레 속을 채운 배추김치보다 더욱 인기를 끄는 건 다름 아닌 ‘섞박지’입니다. 그저 ‘김치통의 틈새를 메우기 위해 올려뒀던 무’가 김장의 주인공인 배추보다 큰 영광을 얻게 되는 것이죠. 아이들은 ‘한정판’에 불과한 소량의 ‘섞박지’를 조금이라도 더 맛보겠다며 귀여운 경쟁을 벌이기도 합니다. 발효된 감칠맛의 결정체인 이 반찬을 맛보기 위해선 또다시 일 년을 기다려야 하니 그 마음도 이해가 됩니다. 이처럼 우리의 일상은 신기하게도 주객전도의 순간으로 가득합니다. ‘섞박지’를 한 입 베어 물자 이제는 오케스트라의 조율음이 생각납니다.
연주회가 시작되기 전, 보통은 제1바이올린에 앉는 악장(콘서트마스터)이 오보에를 향해 신호를 하면 ‘라(A)’ 음이 흐릅니다. 각 악기 연주자들은 이 음을 기준으로 잠시 조율에 집중합니다. 현을 조이거나 풀며 활을 긋고(bowing), 목관악기의 리드(reed, 소리를 내기 위해 입과 닿는 부분에 끼우는 얇은 판)를 점검하는 것도 이 순간에 이뤄집니다. 오케스트라 본 공연의 명연주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지만, 저는 어쩐지 어릴 때부터 그 조율음이 그렇게 좋았습니다. 연주가 시작되기 전의 설렘과 긴장감을 주는 그 조율의 시간이 말이죠. 제 마음이 자꾸만 주인공보다는 주변 인물, 주류가 아닌 비주류를 향하는 것은 참 생각할수록 운명적이었습니다.
피아졸라의 반도네온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역시 보통의 오르간(Organ)보다는 반도네온(Bandoneon)의 소리가 조금 더 ‘심금을 울린다’라거나 ‘뭉클하다’는 쪽에 가깝습니다. 바로 아르헨티나 출신의 작곡가이자 반도네온 연주자인 아스토르 피아졸라(Ástor Pantaleón Piazzolla)의 탱고 덕분입니다.
아스토르 피아졸라와 아르헨티나의 탱고를 상징하는 악기인 반도네온은 원래 유럽에서 비롯됐습니다. 먼 옛날, 파이프오르간처럼 무겁고 값비싼 악기는 대륙을 횡단하며 콘서티나(Concertina), 아코디언(Accordion) 등과 같이 상대적으로 휴대와 이동이 수월한 것으로 발전했는데, 독일 출신의 하인리히 반드라는 인물에 의해 개량된 최종 결과물이 바로 반도네온입니다. 독일서 머나먼 신세계(유럽인들의 입장에서)로 이주하며 꾸린 짐 속에는 반도네온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반도네온의 음색은 정착 초기에 이민자들이 겪어야만 했던 힘겨움과 스러져간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슬픔을 모두 간직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사카모토 류이치도 그만의 ‘탱고(Tango)’를 작곡할 때 아마도 피아졸라의 탱고를 참고했을 것만 같습니다. 피아졸라가 창조한 반도네온의 세계에는 오블리비언(Oblivion, 망각), 리베르탱고(Libertango), 아디오스 노니노(Adiós Nonino)처럼 라디오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곡을 비롯해 데카리시모(Decarissimo)에 이르기까지 주옥같은 곡이 즐비하니 말입니다.
걷는 사람을 보고 걷는 사람
영국 출신의 세계적인 팝아트 작가 줄리안 오피(Julian Opie)의 연작 중에는 유난히 걷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 이미지가 워낙 강렬했기 때문인지 이제는 그의 작품을 감상하며 ‘꼭 사람이 걷는 것 같네’라고 하지 않고, 오히려 건널목을 건너는 사람을 보며 ‘마치 줄리안 오피의 작품처럼 걷네’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의 유명 연작 중 ‘워킹 인 멜번(호주의 도시 멜번의 걷는 사람, Walking in Melbourne)’을 감상한 이후에 방문한 호주 멜번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마치 줄리안 오피 작품처럼 걸어 다니는군’ 하고 말입니다. 줄리안 오피의 작품만큼이나 기억에 남는 보행 장면이 또 있습니다. 다름 아닌 비틀즈 4인방인데요. 언제부터인지 횡단보도를 건널 때마다 비틀즈의 애비로드(Abbey Road)를 떠올리게 됩니다. 차량보다는 보행자가 많고, 왕복 2차선 이내의 폭으로 놓인 길과 가로수, 건널목까지 갖춰진 모습이 영락없이 애비로드처럼 보입니다.
줄리안 오피 <워킹 인 멜번(Walking in Melbourne. 8.)> (2018) / 그림출처. Julian Opie 웹사이트
서울에도 수많은 애비로드가 있죠. 도심의 ‘이름 없는 애비로드’를 건널 때마다 속으로는 ‘마치 존 레논이나 폴 매카트니가 된 것 같네’라고 되뇝니다. 차량 통행이 드물어진 저녁에 아이들과 동네 어귀를 산책하다가 여러 차례 설명해주기도 했습니다. “여긴 애비로드고, 아빠는 줄리안 오피의 작품 속처럼 걸어”라고 말이죠.
지브리 같은 하늘과 수상한 왜가리
가끔, 어떤 풍경은 마치 지브리 스튜디오의 작품, 정확히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작품 속 한 장면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실재하는 풍경을 바라보면서 “와아, 마치 지브리 세계 속으로 들어온 것 같네”라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또 언젠가는 “오늘 하늘이 신카이 마코토 풍이다”라고 말하거나, “호소다 마모루의 작품 속 숲처럼 보인다”고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사슴신이 살고 있을 것 같은 창녕 우포늪 / 사진. ⓒ김현호
아이들과 함께 나선 주말 나들이에서도 유사한 경험을 자주 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장대비가 내리기 전 뭉게구름을 보며 미야자키 하야오의 하늘을 떠올리는 것인데요. 또 어떤 때에는 눈밭에서 뒹구는 아이들이 “아빠, 우리가 꼭 <늑대아이(2012)> 속 장면으로 들어온 것 같아”라고 소리치기도 합니다.
여름의 뭉게구름 / 사진. ⓒ김현호
호소다 마모루의 대표 작품인 이 영화에서 주요 인물인 유키(‘눈(雪)’을 뜻하는 일본어이자 인물의 이름)와 아메(‘비(雨)’를 뜻하는 일본어이자 인물의 이름)가 엄마와 함께 끝도 없이 펼쳐진 눈밭을 뛰며 해방감을 만끽하게 되는데요. 그 장면이 어찌나 강렬했던지 이제는 눈이 좀 쌓였다 싶으면 온몸을 땀으로 적셔가며 ‘늑대아이들’이 되곤 합니다. 이 대목에선 배경음악으로 ‘키토키토-4개의 발로 추는 춤(きときと-四本足の踊り)’을 떠올리기도 합니다.
한강의 여러 지류와 도심 하천을 산책하면서 마주치는 동식물에 대해서도 비슷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데요. 예를 들면, 왜가리나 백로를 볼 때면 물고기를 사냥해 삼키는 과정에서의 그 우아한 몸짓과 천천히 날아오를 때의 날갯짓을 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너 평범한 왜가리가 아니구나?” (영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2023)>의 대사를 인용) 왜가리가 ‘휘익’ 하고 날아올라 유유히 고개를 돌릴 때, 우리를 비밀스러운 장소로 초대하면 어쩌나 상상을 합니다. 특히 특유의 단아한 발걸음으로 수면 위로 도약할 때, 영화 속 장면이 중첩되어 놀랍기만 합니다.
도심 하천의 왜가리 / 사진. ⓒ김현호
물 위를 걷는 백로 / 사진. ⓒ김현호
지금은 딸들이 너무 커버린 까닭에 함께 욕조에 들어갈 수 없지만, 영유아에 가까웠을 땐 비누 거품을 내거나 과일을 먹으며 목욕을 즐기기도 했습니다. (아빠인 저 혼자 수영복을 입곤 했습니다) 수증기가 가득 차올라 손가락과 발가락이 쭈글쭈글거리기 시작하면 아이들은 꼭 이 말을 꺼냈습니다. “우리가 꼭 <이웃집 토토로(1988)>의 목욕 장면에 들어온 것 같아. 아빠와 우리가 다 같이 웃고 나면 그 ‘와삭’하는 음악(히사이시 조 ‘바람이 지나가는 길’)이 흐를 것 같네” 라고 말이죠.
지베르니의 다리를 건너며
살아가며 마주하는 순간이 영화와 그림 속 장면과 비슷한 까닭은 제 삶이 특별해서가 아니라는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영화와 그림은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장면을 인용했을 테니, 때때로 그와 유사한 근사한 현실의 풍경을 마주하면 오히려 ‘뒤바뀌었다’라고 생각하게 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이것은 망상과도 다릅니다.
특이점이 온 것처럼 뒤바뀌는 그 순간. 상황은 역전되고 눈여겨보지 않았던 풍경은 재조명되며 단지 현실감 넘쳤던 예술은 현실을 뛰어넘습니다. 살다 보면 그런 마법 같은 시간이 꽤 자주 찾아옵니다. 매일 저녁의 노을을 바라보며 클로드 모네의 하늘을 상상하고 소박한 연못으로 지베르니(클로드 모네가 직접 가꾼 정원)를 떠올릴 수 있는 반도네온, 섞박지, 오케스트라의 조율음 같은 순간들 말이죠. 마치 루벤스의 작품처럼 차츰차츰 새벽이 밝아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