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ADVERTISEMENT

    여성 국극의 성역할에 질문들 던지는 '벼개가 된 사나히'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arte] 박진서의 고전의 막이 오르면

    성역할 전복시킨다 믿어왔던 국극
    성별 특성 강화해 고정관념 고착화

    여성국극 <벼개가 된 사나히>
    남성 배역 맡고 싶지만 높은 음역대 가진
    주인공 '소년' 통해 국극의 성역할에 질문 던져
    음악극의 전성기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는 요즘이다. 뮤지컬을 향한 관객들의 열광적인 사랑은 팬데믹으로 침체되었던 공연 산업의 회복을 넘어, 영화관 산업의 매출까지 추월하는 성장세를 보였다.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과 함께 창극의 해외 공연 소식도 심심찮게 들려온다. 동시대 창작판소리의 흐름을 이끈다고 말할 수 있는 소리꾼 이자람은 지난해 ‘올해의 양성평등문화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국내외 관객을 사로잡은 흥행은 물론, 그 의미적인 측면에서도 음악극을 둘러싼 다양한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작년 하반기에는 ‘여성국극’이 재조명되기도 했다.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 tvN 드라마 <정년이>가 화제를 모았고, 해방 후 한국에서 짧지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판소리 기반의 음악극인 ‘국극’이 다시 대중들의 관심을 받았다. 여성 배우들만으로 공연이 진행되는 국극은 다양한 세대의 여성 연기자들을 통해 오늘의 관객을 다시 만났다. 그렇게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한국의 음악극이 또다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올해 1월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는 여성국극제작소의 신작 <벼개가 된 사나히>가 무대에 올랐다. 사람들에게서 잊혀가는 국극의 명맥을 이어온 여성국극제작소는 과거의 여성국극을 복원하는 것을 넘어 동시대적인 여성국극의 창작을 시도한다. 특히 이 작품은 ‘여성국극’이라는 장르로부터 출발해 ‘음악극’이라는 장르가 가진 근본적인 한계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여성국극 <벼개가 된 사나히> 공연 장면. / 사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유경오
    여성국극 <벼개가 된 사나히> 공연 장면. / 사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유경오
    여성국극 <벼개가 된 사나히> 포스터. / 사진출처. 아르코예술극장 홈페이지
    여성국극 <벼개가 된 사나히> 포스터. / 사진출처. 아르코예술극장 홈페이지
    극예술에 있어 음악은 매우 효과적인 장치 중 하나다. 인물들의 감정선을 따라 서사가 전개되는 전통적인 극예술의 흐름에 있어 음악은 감정을 관객들에게 더욱 강력하게 전달하는 힘을 갖는다. 때로는 단 한 마디의 대사나 움직임 없이 음악 하나만으로도 장면이 완성된다.

    하지만 반대로 음악의 그 힘은 마치 양날의 검처럼 공연의 가능성을 제약하기도 한다. 화성이나 음역과 같은 음악의 문법적 요소들은 그 자체로 인물과 장면의 성격을 결정짓는다. 물론 기존의 음악적인 요소들을 전복하는 시도도 가능하겠지만, 음악극이 가진 대중성을 고려한다면 그러한 실험은 다소 무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검증된’ 흐름을 거스르기란 창작자들에게 쉽지 않은 도전이다.

    뮤지컬과 같은 장르들이 가진 전형성에 대한 비판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최근 연극에서는 기존의 텍스트를 해체하고 새롭게 재조립하며 동시대적인 재창작을 시도한다. 그러나 음악은 완벽한 해체에 한계가 따라오기 마련이고, 기존의 문법에 약간의 낯섦을 더하는 것이 대부분의 창작자가 하는 선택이다. 강력한 효과만큼이나 무자비한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여성국극 <벼개가 된 사나히> 공연 장면. / 사진. ⓒ여성국극제작소/이준경
    여성국극 <벼개가 된 사나히> 공연 장면. / 사진. ⓒ여성국극제작소/이준경
    그리고 이러한 한계에 있어 가장 큰 영향을 받는 요인 중 하나가 바로 인물의 성별이다. 사람은 성별에 따라 평균적으로 다른 음역대를 갖는다. 같은 악보에 표시된 음표로 노래를 불러도 서로 다른 음으로 들린다. 뮤지컬이 남성과 여성의 듀엣곡을 선호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서로 다른 음역의 두 성별이 만나면 그 자체만으로도 화음이 완성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성 인물 간의 듀엣, 특히 여성 인물 간의 뮤지컬 듀엣곡을 찾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같은 성별 안에서도 개인이 가진 발성 구조의 특성에 따라 음역대가 나뉜다. 심지어 오페라에서는 ‘성부’라는 이름으로 이것을 제도화한다. 소프라노-메조소프라노-알토, 테너-바리톤-베이스로 분류된 성부는 각각의 음역에 따라 캐릭터가 가진 전형성을 충실히 재현한다. 그리고 여기엔 당연히 ‘여성스러움’, ‘남성스러움’과 같은 성별 요인이 극대화된다. 이를테면, ‘여성스러운’ 캐릭터는 대다수가 소프라노를 향하고 그의 옆을 지키는 ‘억척스러운’ 유모는 알토에서 결정되는 식이다.

    <벼개가 된 사나히>는 국극에서도 이러한 규칙이 작동하고 있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여성국극 배우를 꿈꾸는 주인공 ‘소년’은 국극에서 남자 역할을 맡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나 음역대, 외양과 움직임 등은 여성국극이 필요로 하는 전형적인 ‘소녀’ 캐릭터에 가깝다. 그래서 그는 자기 의사와 무관하게 여자 배역을 소화할 것을 강요받는다. 내면에 잠재된 정체성과 외면으로 표출된 모습 사이의 괴리감을 경험하는 모습을 중심으로 내용이 전개된다.
    여성국극 <벼개가 된 사나히> 공연 장면. / 사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유경오
    여성국극 <벼개가 된 사나히> 공연 장면. / 사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유경오
    사실 최근 들어 국극은 성별과 관계없이 여성 연기자가 모든 역할을 소화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전복하는 시도로 읽혀왔다. 여기에 더해 여성 연기자들끼리 러브스토리를 연기한다는 점에서 퀴어적인 해석을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단일 성별 중심의 구성은 되려 인물들의 성별 특성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연기자가 여성이라는 점이 어색해 보이지 않도록 최대한 ‘남성적인’ 모습을 해야 하는 등의 식이다. 여기에 음악이 가진 음역이라는 근본적 한계가 더해지면서, 성역할을 전복했다고 믿어 왔던 여성국극은 다시 한계를 드러낸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국극만이 아닌 모든 음악극에서 반드시 고민해야 할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러한 한계를 딛고 새로운 시도를 모색하는 작품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역할이 가진 성별에 국한되지 않고 배우를 찾는 ‘젠더 프리 캐스팅’을 시도하는 작품들이 종종 눈에 띈다. 한국의 경우를 살펴보자면, 2015년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에서 실존인물이자 ‘여성스러운’ 남성을 상징하는 역할이었던 헤롯 역에 여성인 김영주 배우가 캐스팅되며 화제를 모았다. 2017년 초연한 창작뮤지컬 <광화문연가>의 해설자 월화 역에는 기획 단계에서부터 젠더프리를 염두에 두고 정성화와 차지연 배우를 캐스팅했다. 대학로에서도 <해적>과 <종의 기원> 등의 창작뮤지컬이 하나의 배역에 서로 다른 성별의 배우가 멀티 캐스팅되는 방식을 선택했다. 여기에 더해 2024년에는 브로드웨이 오리지널 프로덕션의 젠더프리 캐스팅에 힘입어 남성인 헤르메스에 최정원 배우가 최재림, 강홍석 배우와 번갈아 무대에 올랐다.

    하지만 여전히 뮤지컬에서 성별의 한계를 뛰어넘는 시도는 그다지 활발하지 않다. 그리고 이러한 반응의 상당한 원인은 바로 음악이 가진 음역대일 것이다. 특히 여러 사람이 동시에 노래를 부르고 오케스트라까지 연주해야 하는 뮤지컬 상황 속에서 한 사람만을 위해 음역을 바꾸는 일이 쉽지는 않다. 편곡을 한다고 해서 더 좋은 음악이 나온다는 보장도 없다. 그리고 해외에서 공연 허가를 받아야만 하는 경우에는 오리지널 프로덕션이 원하는 모든 것을 최대한 근접하게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한 목표 중 하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음악이 그어놓은 경계를 넘어서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뮤지컬 <광화문연가>는 '월하' 역에 서로 다른 성별의 배우를 캐스팅하여 젠더프리를 시도했다. 사진은 차지연 배우. / 사진출처. 뉴스1
    뮤지컬 <광화문연가>는 '월하' 역에 서로 다른 성별의 배우를 캐스팅하여 젠더프리를 시도했다. 사진은 차지연 배우. / 사진출처. 뉴스1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앞서 언급했던 사례들에서도 볼 수 있듯, ‘음역대’라는 범주 안에 우리가 기술적인 한계라고 규정해왔던 것들이 사실은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었다는 점이 확인되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일부 공연에서는 배우의 음역대를 고려해 악보를 수정하는 사례도 존재한다. 이를테면 뮤지컬 <데스노트>의 경우 초연과 재연에서 주인공 라이토 역할을 맡은 서로 다른 배우의 같은 넘버를 동시에 재생하며 발생하는 불협화음이 콘텐츠화되기도 했다. 이는 각 배우의 서로 다른 음역대를 고려한 창작진들의 편곡 때문이었다. 이렇듯 우리가 으레 규정해 온 성별의 한계는 핑계였을 뿐, 사실은 그러한 음악적 경계를 뛰어넘어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여성 중심의 예술이라고 재평가됐던 여성국극 <벼개가 된 사나히>는 음악극이 규정하는 성별의 역할과 한계를 드러낸다. 이 작품 속에서 극중극으로 표현된 새로운 여성국극 <아랑애사>는 그 내용만큼이나 배우들이 연기하는 남성과 여성의 모습에 더욱 주목하게 된다. 특히나 불꽃 같은 여성국극의 전성기를 함께한 1세대 배우들과 2025년 현재 여성국극의 동시대적 계승을 목표로 활동을 이어가는 배우들의 공존은 변화하는 시대에 따라 함께 변화하는 역할의 성별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다. 여기에 실존했던 여성국극의 노랫말들을 차용한 대사가 이어질 때면 과연 오늘의 시각에서 국극이라는 20세기의 장르를 21세기에 바라보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여성국극이 국악을 기반으로 하고 있음에도, 이 작품이 ‘전통예술’이 아닌 ‘연극’으로 분류됐다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쩌면 <벼개가 된 사나히>는 여성국극 그 자체라기보다는 여성국극을 소재로, 여성국극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연극에 가까워 보인다. 오랜 시간 남성들만이 설 수 있던 무대를 여성 연기자들이 가득 채우며 과거의 전통을 뒤엎는 시도를 보여줬던 여성 국극은 그렇게 다시 한번 동시대의 질문에 답을 찾고자 노력한다. 오늘의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젠더프리’라는 동시대의 실천들도 어쩌면 여기서부터 예견되었던 것인지 모르겠다.
    여성국극 <벼개가 된 사나히> 공연 장면. / 사진. ⓒ여성국극제작소/이준경
    여성국극 <벼개가 된 사나히> 공연 장면. / 사진. ⓒ여성국극제작소/이준경
    박진서 작가

    ADVERTISEMENT

    1. 1

      도달 불가능한 말들이 도착할때…전쟁 속에서 일어난 크리스마스의 기적

      <전장의 크리스마스>(1983)를 논하기에는 조금 늦은 계절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중 일본군이 점령한 인도네시아 자바섬의 포로수용소, 모두가 뙤약볕에 지친 기색이 역력한 그곳에서 벌어지는 이 며칠간의...

    2. 2

      완벽하게 불완전했던 나의 열일곱

      나는 귀가 얇은 편이다. 친구가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하고 인생 책이 되었다는 청소년 소설을 소개받아서 출장길에 단숨에 읽어버렸다. 김혜진 소설가의 초기작 《프루스트 클럽》이었다. 무려 20년 전에 출간된 소설을 지...

    3. 3

      25년 만난 애인 저버리려 했던 남자…결말은 '죽음'이었다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30년을 함께 살며 이미 삶의 일부가 된 여인. 그리고, 가슴을 뛰게 만드는 젊고 매혹적인 여인. 두 사람의 애인 사이에서 한 명을 선택해야 했던 남자는 결국 오랜 사랑과의 결혼을 택했습니다. 대가는 컸습니다. 남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