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와 냉소의 아이콘, 마일스 데이비스 ‘쿨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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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이봉호의 원픽! 재즈 앨범
마일스 데이비스의 음반 'Birth of the Cool'
마일스 데이비스의 음반 'Birth of the Cool'
인류의 역사는 차별의 역사와 일치한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그랬고, 일제강점기 창씨개명이 그랬으며, 해묵은 지역감정이 그렇다. 재즈의 거장 마일스 데이비스에게 차별은 어떤 의미였을까. 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 그의 성장 과정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재즈맨과 비교할 때 마일스 데이비스는 매우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한 인물이다. 1926년생인 그의 부모는 신세대 맞벌이 부부였다. 게다가 직업은 아버지는 치과의사, 어머니는 음악선생이었으니 피부색만 제외한다면 선택받은 가정이었다.
아무리 능력 있는 부모를 가졌더라도 마일스 데이비스는 흑인이었다. 거칠게 표현하면 이미 피부색에서 계급이 확정된 상황이었다. 청년 마일스는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은 세인트루이스에서 노동일에 종사하는 유색인종과의 경계에 서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의 혼란을 잡아준 매개체는 재즈였다. 그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준 음악가는 ‘버드’라는 별칭을 가진 색소포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찰리 파커였다.
하지만 마일스 데이비스의 분노는 찰리 파커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뉴욕 줄리어드 음대에 진학하지만 그는 클래식보다 재즈가 자신의 본질에 가까운 장르임을 깨닫는다. 대학을 중퇴한 그는 1944년부터 1948년까지 찰리 파커 밴드의 일원으로 활약한다. 마일스 데이비스가 무대에서 바라본 객석은 어떤 풍경이었을까. 공연장에서 연주하는 재즈맨을 구경하는 이들은 대부분 백인이었다. 당시 흑인 연주자는 백인 연주자에 비해 불리한 조건으로 일을 해야만 했다. 때문에 마일스 데이비스는 관객을 등지고 연주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Birth of the Cool]은 마일스 데이비스 시대를 여는 신호탄이었다. 앨범의 발표 연도는 1957년이지만 실제 녹음은 1949년과 1950년에 걸쳐 마무리되었다. 비밥 재즈를 추구했던 찰리 파커 밴드는 마일스 데이비스의 스타일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마일스 데이비스는 고심 끝에 1948년 새로운 밴드를 만들기로 결정한다. 이후 그는 작곡가, 편곡자, 밴드 리더로 활동하던 길 에반스와 힘을 합친다. 맨해튼 55번가에 있던 길 에반스의 아파트에는 마일스 데이비스를 축으로 새로운 형태의 음악을 갈망하는 재즈맨이 모여든다.
마일스 데이비스는 1950년대 후반부터 전성기를 누린다. 그는 1959년 작 [Kind of Blue]에서 블루스와 클래식을 혼용하는 모드 기법을 도입한다. 이미 1958년 작 [Milestones]에서 모드 재즈를 시험했던 마일스 데이비스는 라벨과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을 [Kind of Blue]의 수록곡 ‘All Blues’와 ‘So What’에서 풀어내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시도는 클래식과 재즈를 섭렵한 빌 에반스의 피아노 스케일과 극강의 조합을 이룬다. 그는 [Kind of Blue]를 녹음할 당시를 자신의 최전성기라고 자서전에서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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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은 뉴욕에서 발간하는 일간지 1면을 장식한다. 마일스 데이비스는 이 사건에 50만 달러의 손해배상을 청구하지만 소송에서 패배한다. 이를 계기로 그는 세상에 더욱 냉소적인 인물로 변해버린다. 마일스 데이비스는 [Birth of the Cool]을 포함한 작품을 통해 분노와 냉소를 담아낸다. 1960년대 이후 그의 음악은 섬뜩할 정도로 정제된 사운드를 들려준다. 그는 “있는 것을 연주하지 말고, 없는 것을 연주하라"는 명언을 남긴다. 마일스 데이비는 분노 너머의 세상을 연주했던 재즈 마에스트로였다.
[♪ 마일스 데이비스 'Birth of the Cool' 앨범에 수록된 'M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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