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와 냉소의 아이콘, 마일스 데이비스 ‘쿨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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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이봉호의 원픽! 재즈 앨범
마일스 데이비스의 음반 'Birth of the Cool'
마일스 데이비스의 음반 'Birth of the Cool'
미국 영주권자인 이모가 내게 이런 말을 하더라. 하도 백인한테 차별을 당하다 보니 가끔은 그들이 위대해 보이는 착각에 빠진다고. 당시 대학 신입생인 필자에게 묵직한 화두를 전하는 말이었다. 피부색이 인간의 우월감을 좌우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식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차별이 반복되면 멘탈이 붕괴된다는 사실을 필자는 직장생활 15년 차에 뼈저리게 실감했다. 사전 설명도 없이 사사건건 짜증과 폭언을 쏟아내는 상사와 지낸 18개월은 무간지옥을 공짜로 체험하는 시간이었다.
인류의 역사는 차별의 역사와 일치한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그랬고, 일제강점기 창씨개명이 그랬으며, 해묵은 지역감정이 그렇다. 재즈의 거장 마일스 데이비스에게 차별은 어떤 의미였을까. 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 그의 성장 과정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재즈맨과 비교할 때 마일스 데이비스는 매우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한 인물이다. 1926년생인 그의 부모는 신세대 맞벌이 부부였다. 게다가 직업은 아버지는 치과의사, 어머니는 음악선생이었으니 피부색만 제외한다면 선택받은 가정이었다. 흑인 엘리트 부모가 거주하는 세인트루이스의 저택. 이는 20세기 초 미국에서 흔치 않은 풍경이었다. 당시 미국에 거주하는 흑인이라면 버스도, 식당도, 화장실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지 않았나. 게다가 여성의 직업 선택권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마일스 데이비스는 분명 수저 색깔이 다른 아이였다. 그것도 흑인사회에서 부러움의 대상인 최상류층의 자제로 말이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10대부터 트럼펫 연주를 수학한 그는 학교 재즈밴드의 일원으로 활동을 시작한다.
아무리 능력 있는 부모를 가졌더라도 마일스 데이비스는 흑인이었다. 거칠게 표현하면 이미 피부색에서 계급이 확정된 상황이었다. 청년 마일스는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은 세인트루이스에서 노동일에 종사하는 유색인종과의 경계에 서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의 혼란을 잡아준 매개체는 재즈였다. 그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준 음악가는 ‘버드’라는 별칭을 가진 색소포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찰리 파커였다. 찰리 파커가 누구인가. 그는 10대 초반부터 음악적 재능을 쏟아낸 비밥 재즈의 전설적인 인물이다. 댄스 홀의 배경음악으로 주로 쓰이던 1940년대 재즈는 찰리 파커를 거치면서 거칠고 빠른 음악으로 변신한다. 불규칙한 생활 습관에 빠진 그의 삶은 전광석화 같은 코드 변화를 시도하는 연주 스타일과 흡사했다. 찰리 파커의 파격적인 연주는 아쉽게도 미국 음악계에서 외면받는다. 이로 인해 그는 약물중독과 정신 분열에 시달리다 30대에 세상을 떠난다. 마일스 데이비스는 찰리 파커의 정열적인 아르페지오 기법에서 분노를 읽었다.
하지만 마일스 데이비스의 분노는 찰리 파커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뉴욕 줄리어드 음대에 진학하지만 그는 클래식보다 재즈가 자신의 본질에 가까운 장르임을 깨닫는다. 대학을 중퇴한 그는 1944년부터 1948년까지 찰리 파커 밴드의 일원으로 활약한다. 마일스 데이비스가 무대에서 바라본 객석은 어떤 풍경이었을까. 공연장에서 연주하는 재즈맨을 구경하는 이들은 대부분 백인이었다. 당시 흑인 연주자는 백인 연주자에 비해 불리한 조건으로 일을 해야만 했다. 때문에 마일스 데이비스는 관객을 등지고 연주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그는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분노를 연주했을까. 마일스 데이비스는 자신을 무시하는 클럽 관계자와 자주 충돌했다. 흑인으로서 감수해야 하는 불편부당함을 참기보다 당당하게 권리를 요구하는 인물이었다. 그가 분노를 극복하는 수단으로 복싱을 택한 이유도 이런 배경에서였다. 냉철한 이미지로 자신을 무장하면서 주변인과의 거리두기를 통해 분노를 다스린 마일스 데이비스. 이는 찰리 파커와는 다른 분위기로 펼쳐지는 그의 음악에서 확인된다. 그는 1957년 길 에반스, 제리 멀리건, 리 코니츠, 빌 바버 등과 함께 재즈의 유산을 꺼내 든다.
[Birth of the Cool]은 마일스 데이비스 시대를 여는 신호탄이었다. 앨범의 발표 연도는 1957년이지만 실제 녹음은 1949년과 1950년에 걸쳐 마무리되었다. 비밥 재즈를 추구했던 찰리 파커 밴드는 마일스 데이비스의 스타일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마일스 데이비스는 고심 끝에 1948년 새로운 밴드를 만들기로 결정한다. 이후 그는 작곡가, 편곡자, 밴드 리더로 활동하던 길 에반스와 힘을 합친다. 맨해튼 55번가에 있던 길 에반스의 아파트에는 마일스 데이비스를 축으로 새로운 형태의 음악을 갈망하는 재즈맨이 모여든다.
마일스 데이비스는 1950년대 후반부터 전성기를 누린다. 그는 1959년 작 [Kind of Blue]에서 블루스와 클래식을 혼용하는 모드 기법을 도입한다. 이미 1958년 작 [Milestones]에서 모드 재즈를 시험했던 마일스 데이비스는 라벨과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을 [Kind of Blue]의 수록곡 ‘All Blues’와 ‘So What’에서 풀어내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시도는 클래식과 재즈를 섭렵한 빌 에반스의 피아노 스케일과 극강의 조합을 이룬다. 그는 [Kind of Blue]를 녹음할 당시를 자신의 최전성기라고 자서전에서 밝힌다.
▶▶▶[관련 칼럼] "모든 곡이 테이크 원" 마일스 데이비스의 명반, 마티스와 닮았다 1959년, 그는 이미 뉴욕의 유명 인사였다. 재즈 클럽 버드랜드에서 마일스 데이비스가 진두지휘하는 밴드는 절정의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남부지역과 달리 뉴욕은 인종차별이 상대적으로 적은 도시였다. 하지만 주디라는 백인 여자와 함께 버드랜드 앞을 지나치던 그는 백인 경찰에게 꺼지라는 폭언을 듣는다. 경찰은 자신이 누구인지 설명하려는 마일스 데이비스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구타로 인해 머리가 깨진 그는 경찰서로 끌려간다. 체포 거부와 경찰 폭행이라는 근거도 없는 죄명을 씌운 백인발 인종차별의 현장이었다.
이 사건은 뉴욕에서 발간하는 일간지 1면을 장식한다. 마일스 데이비스는 이 사건에 50만 달러의 손해배상을 청구하지만 소송에서 패배한다. 이를 계기로 그는 세상에 더욱 냉소적인 인물로 변해버린다. 마일스 데이비스는 [Birth of the Cool]을 포함한 작품을 통해 분노와 냉소를 담아낸다. 1960년대 이후 그의 음악은 섬뜩할 정도로 정제된 사운드를 들려준다. 그는 “있는 것을 연주하지 말고, 없는 것을 연주하라"는 명언을 남긴다. 마일스 데이비는 분노 너머의 세상을 연주했던 재즈 마에스트로였다. 이봉호 문화평론가
[♪ 마일스 데이비스 'Birth of the Cool' 앨범에 수록된 'Move']
인류의 역사는 차별의 역사와 일치한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그랬고, 일제강점기 창씨개명이 그랬으며, 해묵은 지역감정이 그렇다. 재즈의 거장 마일스 데이비스에게 차별은 어떤 의미였을까. 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 그의 성장 과정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재즈맨과 비교할 때 마일스 데이비스는 매우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한 인물이다. 1926년생인 그의 부모는 신세대 맞벌이 부부였다. 게다가 직업은 아버지는 치과의사, 어머니는 음악선생이었으니 피부색만 제외한다면 선택받은 가정이었다. 흑인 엘리트 부모가 거주하는 세인트루이스의 저택. 이는 20세기 초 미국에서 흔치 않은 풍경이었다. 당시 미국에 거주하는 흑인이라면 버스도, 식당도, 화장실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지 않았나. 게다가 여성의 직업 선택권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마일스 데이비스는 분명 수저 색깔이 다른 아이였다. 그것도 흑인사회에서 부러움의 대상인 최상류층의 자제로 말이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10대부터 트럼펫 연주를 수학한 그는 학교 재즈밴드의 일원으로 활동을 시작한다.
아무리 능력 있는 부모를 가졌더라도 마일스 데이비스는 흑인이었다. 거칠게 표현하면 이미 피부색에서 계급이 확정된 상황이었다. 청년 마일스는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은 세인트루이스에서 노동일에 종사하는 유색인종과의 경계에 서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의 혼란을 잡아준 매개체는 재즈였다. 그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준 음악가는 ‘버드’라는 별칭을 가진 색소포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찰리 파커였다. 찰리 파커가 누구인가. 그는 10대 초반부터 음악적 재능을 쏟아낸 비밥 재즈의 전설적인 인물이다. 댄스 홀의 배경음악으로 주로 쓰이던 1940년대 재즈는 찰리 파커를 거치면서 거칠고 빠른 음악으로 변신한다. 불규칙한 생활 습관에 빠진 그의 삶은 전광석화 같은 코드 변화를 시도하는 연주 스타일과 흡사했다. 찰리 파커의 파격적인 연주는 아쉽게도 미국 음악계에서 외면받는다. 이로 인해 그는 약물중독과 정신 분열에 시달리다 30대에 세상을 떠난다. 마일스 데이비스는 찰리 파커의 정열적인 아르페지오 기법에서 분노를 읽었다.
하지만 마일스 데이비스의 분노는 찰리 파커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뉴욕 줄리어드 음대에 진학하지만 그는 클래식보다 재즈가 자신의 본질에 가까운 장르임을 깨닫는다. 대학을 중퇴한 그는 1944년부터 1948년까지 찰리 파커 밴드의 일원으로 활약한다. 마일스 데이비스가 무대에서 바라본 객석은 어떤 풍경이었을까. 공연장에서 연주하는 재즈맨을 구경하는 이들은 대부분 백인이었다. 당시 흑인 연주자는 백인 연주자에 비해 불리한 조건으로 일을 해야만 했다. 때문에 마일스 데이비스는 관객을 등지고 연주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그는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분노를 연주했을까. 마일스 데이비스는 자신을 무시하는 클럽 관계자와 자주 충돌했다. 흑인으로서 감수해야 하는 불편부당함을 참기보다 당당하게 권리를 요구하는 인물이었다. 그가 분노를 극복하는 수단으로 복싱을 택한 이유도 이런 배경에서였다. 냉철한 이미지로 자신을 무장하면서 주변인과의 거리두기를 통해 분노를 다스린 마일스 데이비스. 이는 찰리 파커와는 다른 분위기로 펼쳐지는 그의 음악에서 확인된다. 그는 1957년 길 에반스, 제리 멀리건, 리 코니츠, 빌 바버 등과 함께 재즈의 유산을 꺼내 든다.
[Birth of the Cool]은 마일스 데이비스 시대를 여는 신호탄이었다. 앨범의 발표 연도는 1957년이지만 실제 녹음은 1949년과 1950년에 걸쳐 마무리되었다. 비밥 재즈를 추구했던 찰리 파커 밴드는 마일스 데이비스의 스타일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마일스 데이비스는 고심 끝에 1948년 새로운 밴드를 만들기로 결정한다. 이후 그는 작곡가, 편곡자, 밴드 리더로 활동하던 길 에반스와 힘을 합친다. 맨해튼 55번가에 있던 길 에반스의 아파트에는 마일스 데이비스를 축으로 새로운 형태의 음악을 갈망하는 재즈맨이 모여든다.
마일스 데이비스는 1950년대 후반부터 전성기를 누린다. 그는 1959년 작 [Kind of Blue]에서 블루스와 클래식을 혼용하는 모드 기법을 도입한다. 이미 1958년 작 [Milestones]에서 모드 재즈를 시험했던 마일스 데이비스는 라벨과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을 [Kind of Blue]의 수록곡 ‘All Blues’와 ‘So What’에서 풀어내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시도는 클래식과 재즈를 섭렵한 빌 에반스의 피아노 스케일과 극강의 조합을 이룬다. 그는 [Kind of Blue]를 녹음할 당시를 자신의 최전성기라고 자서전에서 밝힌다.
▶▶▶[관련 칼럼] "모든 곡이 테이크 원" 마일스 데이비스의 명반, 마티스와 닮았다 1959년, 그는 이미 뉴욕의 유명 인사였다. 재즈 클럽 버드랜드에서 마일스 데이비스가 진두지휘하는 밴드는 절정의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남부지역과 달리 뉴욕은 인종차별이 상대적으로 적은 도시였다. 하지만 주디라는 백인 여자와 함께 버드랜드 앞을 지나치던 그는 백인 경찰에게 꺼지라는 폭언을 듣는다. 경찰은 자신이 누구인지 설명하려는 마일스 데이비스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구타로 인해 머리가 깨진 그는 경찰서로 끌려간다. 체포 거부와 경찰 폭행이라는 근거도 없는 죄명을 씌운 백인발 인종차별의 현장이었다.
이 사건은 뉴욕에서 발간하는 일간지 1면을 장식한다. 마일스 데이비스는 이 사건에 50만 달러의 손해배상을 청구하지만 소송에서 패배한다. 이를 계기로 그는 세상에 더욱 냉소적인 인물로 변해버린다. 마일스 데이비스는 [Birth of the Cool]을 포함한 작품을 통해 분노와 냉소를 담아낸다. 1960년대 이후 그의 음악은 섬뜩할 정도로 정제된 사운드를 들려준다. 그는 “있는 것을 연주하지 말고, 없는 것을 연주하라"는 명언을 남긴다. 마일스 데이비는 분노 너머의 세상을 연주했던 재즈 마에스트로였다. 이봉호 문화평론가
[♪ 마일스 데이비스 'Birth of the Cool' 앨범에 수록된 'M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