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상섭은 '나혜석의 연애와 결혼'으로 동아일보에 소설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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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최은규의 길 위의 미술관 - 나혜석 편
② 나경석 가옥과 염상섭 좌상
탐험하는 자가 없으면 그 길은 영원히 못 갈 것이오
② 나경석 가옥과 염상섭 좌상
탐험하는 자가 없으면 그 길은 영원히 못 갈 것이오
▶[나혜석 편 ①] 나혜석의 자화상, 한국 최초 여성화가의 초상에 담긴 근대의 흔적들
나혜석은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는 재주가 있었다고 해요. 소학교 다닐 때부터 무엇을 보면 그리고 싶어 했고, 반에서 제일 도화를 잘한다는 선생님의 칭찬을 받기도 했던 것이 화가가 된 동기라는 인터뷰 기사가 있을 정도입니다. 미술 재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진명여고보를 수석으로 졸업할 정도로 영민한 나혜석을 눈여겨보고 유학을 주선한 이가 바로 둘째 오빠 나경석(1890-1959)입니다. 나경석은 나혜석의 전 인생에 걸쳐 큰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나혜석이 “그림을 가르치는 학교가 있는지 없는지 그것조차 모르고 있을 때”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와 경력과 구심, 동아일보, 1926. 5. 18.) 아버지를 설득하여 일본 여자미술학교 유학을 성사시키지요. 그는 이미 도쿄의 구라마에고등공업학교(현 도쿄공대)에서 화공학을 전공하고 있었고 귀국 후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물산장려운동을 이끌기도 합니다.
나혜석이 일본 유학 시절 서양화 전공만 한 게 아니라, 후일 조선을 이끌게 되는 청년 지식인들과 자연스럽게 교분을 맺고 진보적 사상을 내면화하며 글을 쓸 수 있었던 배경에는 오빠의 관리와 후원이 있었습니다. 후일 나혜석과 깊은 인연을 맺게 되는 최승구, 이광수, 김우영이 모두 나경석의 친구였고, 최승구의 게이오대학교 후배이자 소설가인 염상섭은 나혜석의 신혼 시기를 소재로 하는 소설 <해바라기>(1924)를 쓰기도 합니다.
나혜석의 일본 유학은 근대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나혜석은 고희동, 김관호, 김찬영에 이어 조선에서는 네 번째로 서양화를 공부한 사람이었고 여성으로서는 처음이었어요. 서양화가로서의 화업을 이어가지 못했던 1세대 남성 화가들과 비교할 때, 1920년대에 경성에서 첫 개인전을 열고 꾸준히 작품을 하면서 지속적으로 서화협회전, 조선미술전람회와 같은 공모전에 출품하는 등 전업으로 활동한 근대미술의 선구자였습니다. 아직 화단이나 동인 그룹 등이 형성되지 않은 서양화 도입 초기에 활동을 하면서 예술적 성장에 어려움을 겪고 양식적 독자성을 구축하지 못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종로구 신교동 신교공영주차장에서 서울맹학교를 지나 위쪽으로 올라가면 멀지 않은 곳에 오빠 나경석이 살던 오래된 가옥이 있습니다. 나혜석이 이혼하고 사회적으로 거의 매장 당했던 시기에 은둔했다는 곳입니다. 일제강점기 이래 불어닥치던 세월의 풍파를 겪어 낸 이 집의 시간들에 대해서는 나경석의 딸 나영균 전 이화여대 교수가 쓴 책 <일제시대, 우리 가족은>(2004)에 상세히 소개되어 있습니다.
역사의 흔적이 켜켜이 쌓인 장소들이 개발론 앞에서 무력하게 사라져 가곤 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지요. 그래서 시대의 기억을 담은 공간이 아직 남아 있음이 오히려 신기할 정도입니다. 이혼 후 세상의 이목에서 잠시 비켜나 있으라는 나경석의 만류를 거부하고 자기 소신을 펼치는 글과 행동으로 세상에 맞서던 나혜석. 그러한 생각의 근원은 무엇이었을까요?
나혜석이 유학 생활을 하던 1910년대 일본 사회는 스웨덴의 여성학자인 엘렌 케이(Ellen Key, 1849-1926)의 연애도덕론이 청년들의 주목을 받고, 세이토샤(靑鞜社) 동인들이 이끄는 여성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던 때였습니다. 엘렌 케이는 저서 <연애와 결혼>(1903)에서 연애는 독립적 인격을 갖춘 자유로운 남녀의 정신적·육체적 결합이며 연애 없는 결혼은 부도덕한 결혼이라고 설파했습니다. 부모가 정해 주는 배필과의 결혼이 당연시되던 시절, 구시대의 질서에서 벗어나 근대적 주체로서의 길을 모색하던 청년 지식인들에게 엘렌 케이의 연애론은 선풍적 인기를 얻었습니다. 최초의 현대소설인 이광수의 <무정>(1917)에서 일본 유학생 출신인 주인공 형식의 독서 목록에 엘렌 케이의 전기가 들어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한편, 여성인권운동가 히라쓰카 라이초(平塚雷鳥, 1886-1971)를 중심으로 하는 일본의 신여성들은 여성해방을 주창하는 <세이토(靑鞜)>(1911-1916)라는 잡지를 내고 있었습니다. 히라쓰카는 “원시 여성은 태양이었다. 진정한 사람이었다. 지금 여성은 달이다. 타인에 의존하여 살고 타인의 빛에 의해 빛나는 병자와 같이 창백한 얼굴의 달이다”라는 유명한 창간사를 쓰면서 가부장적 관습과 사상을 타파하고 여성이 자신의 자아를 회복해야 함을 주장했습니다.
나혜석은 화가이면서 자유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여성해방론을 담은 글을 다수 발표한 작가이기도 합니다. 유학 시절을 풍미했던 진보적 사상을 지적 토양으로 하여 독립적 존재로서의 개인과 여성으로서의 자기 각성을 체화한 결과입니다. 그녀는 재일본도쿄조선유학생학우회의 기관지 <학지광>에 현모양처론을 비판하며 여성이 주체적 인간으로 자각할 것을 주장하는 '이상적 부인'(1914)을 시작으로 시, 소설, 수필, 평론 등의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여자유학생친목회에서 발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잡지 <여자계>에는 첫 소설 '경희'(1918)를 발표하여 근대문학사에 당당하게 이름을 올리기도 하지요. 여름방학에 귀국한 여자 유학생이 중매 결혼, 삼종지도 등 전통 관습을 요구하는 가족들과 갈등을 겪으면서 점차 주변 여성들을 감화시키는 내용의 자전적 소설입니다.
잡지 <신여자> 2호에 실린 나혜석의 판화 '저거시 무어신고'(1920)를 보면 조롱의 대상인 동시에 선망의 대상이던 신여성에 대한 당시의 모순된 시점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교육받은 여성 선각자로서의 책임을 자각하면서 나혜석은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1918년 귀국한 이후에도 계속 글을 발표합니다. 그의 글은 기존의 관습에 도전하는 내용이어서 논란을 불러일으키곤 했습니다. 출산 후 잡지에 연재한 '모(母) 된 감상기'(1923)는 여성의 출산과 육아에 대해 최초로 공론화한 글입니다.
박박 뼈를 긁는 듯/ 쫙쫙 살을 찢는 듯/ 빠짝빠짝 힘줄을 옥죄는 듯/ 쪽쪽 핏줄을 뽑아내는 듯/ 살금살금 살점을 저미는 듯/ 오장이 뒤집혀 쏟아지는 듯/ 도끼로 머리를 바수는 듯/ 이렇게 아프다나 할까/ 아니다 이도 또한 아니라 (나혜석, '모(母) 된 감상기', <동명>, 1923)
출산의 고통을 직접적으로 묘사하고 양육 과정의 어려움과 심리 변화를 솔직하게 기술함으로써 모성 신화에 정면으로 도전한 글은 이전에 없었습니다. ‘자식이란 모체의 살점을 떼어가는 악마’라는 구절은 흔히 알려져 있듯 이기적 모성을 드러내는 표현이 아니라, “꼭 한 시간만이라도 마음을 턱 놓고 잠 좀 실컷 자 보았으면 당장 죽어도 원이 없을 것”(모(母) 된 감상기) 같은 어미의 간절한 바람을 담고 있습니다. 해야 할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열정적인 성격에 사상을 행동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생각이 더해져, 나혜석은 급진적인 여성해방론을 주장하는 글을 써나갑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서 더 살펴보겠습니다.
이제 종로의 교보문고 광화문점 종로 출입구 앞에 있는 염상섭(1897-1963) 좌상으로 가 볼까요? 염상섭은 주지하다시피 한국 근대문학 최고의 리얼리즘 작가입니다. 식민지 사회를 투철하게 인식하면서 당대 사회의 진실을 묘사한 작품으로 '삼대', '만세전' 등이 알려져 있습니다. 좌상은 1996년 10월 한국 소설 발전에 기여한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종묘광장 앞에 설치되었다가 2014년 4월에 이 자리로 옮겨졌습니다. 그는 두 그루 큰 벚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기도 하고 곁에 앉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합니다. 해마다 봄철이면 벚꽃이 흐드러지게 만개하고 무수히 사람들이 오가는 이 길목에서, 그는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 있던 나혜석과는 대조적으로 잊히지 않는 현재를 살고 있습니다.
나혜석과 염상섭은 일본 유학 시절부터 친분이 두터웠다고 합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나혜석의 연애와 결혼을 소재로 한 중편소설을 썼을 정도니까요. '해바라기'는 동아일보에 1923년 7월 18일부터 시작하여 40회 연재되었습니다. 신혼여행 길에 옛사랑의 묘에 들러 비석을 세우는 장면도 나옵니다. 나혜석과 최승구의 연애 시절을 잘 알고 있던 염상섭은 현실과 사랑의 관념 사이에서 갈등하는 신여성의 미묘한 심리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나혜석이 사망한 지 1년 뒤에 잡지 기사를 통해 사망 소식을 접하고 추모 글 '추도'(1954)를 씁니다.
2021년에 열린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는 일제 강점기에 문인과 화가들이 각별한 연대감으로 교류하면서 예술 세계를 구축해 간 과정을 보여줍니다. 특히 3·1운동 이후 창간한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의 민간 신문사, 자매지로 발간된 잡지 등에 실린 소설과 삽화, 잡지 표지화, 시와 그림이 결합된 ‘화문(畵文)’ 등을 통해 그들의 아름다운 시절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안석주, 노수현, 이상범, 정현웅, 이승만, 김규택 등이 한 시대를 풍미한 삽화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에 동참하듯 나혜석도 염상섭의 초기 대표작 '표본실의 청개구리'가 실려 있는 창작집 <견우화>(1924)의 표지화를 그려줍니다. 당시 남편 김우영을 따라 중국 단둥에서 생활하고 있던 나혜석은 형태를 중시하는 자신의 전통적 화풍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표현주의, 추상주의와 같은 모더니즘 화풍이 도입되던 시기였습니다. 그때 마침 세계 여행의 기회가 찾아옵니다. 예술적 갈망을 해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지만, 아울러 경험해 보지 못한 인생의 격변이 시작되는 시점이기도 했습니다.
“탐험하는 자가 없으면 그 길은 영원히 못 갈 것이오. 우리가 욕심을 내지 아니하면 우리 자손들을 무엇을 주어 살리잔 말이오? 우리가 비난을 받지 않으면 우리의 역사를 무엇으로 꾸미잔 말이오?” (나혜석, '잡감(雜感)', <학지광>, 1917)
최은규 칼럼니스트
나혜석은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는 재주가 있었다고 해요. 소학교 다닐 때부터 무엇을 보면 그리고 싶어 했고, 반에서 제일 도화를 잘한다는 선생님의 칭찬을 받기도 했던 것이 화가가 된 동기라는 인터뷰 기사가 있을 정도입니다. 미술 재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진명여고보를 수석으로 졸업할 정도로 영민한 나혜석을 눈여겨보고 유학을 주선한 이가 바로 둘째 오빠 나경석(1890-1959)입니다. 나경석은 나혜석의 전 인생에 걸쳐 큰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나혜석이 “그림을 가르치는 학교가 있는지 없는지 그것조차 모르고 있을 때”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와 경력과 구심, 동아일보, 1926. 5. 18.) 아버지를 설득하여 일본 여자미술학교 유학을 성사시키지요. 그는 이미 도쿄의 구라마에고등공업학교(현 도쿄공대)에서 화공학을 전공하고 있었고 귀국 후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물산장려운동을 이끌기도 합니다.
나혜석이 일본 유학 시절 서양화 전공만 한 게 아니라, 후일 조선을 이끌게 되는 청년 지식인들과 자연스럽게 교분을 맺고 진보적 사상을 내면화하며 글을 쓸 수 있었던 배경에는 오빠의 관리와 후원이 있었습니다. 후일 나혜석과 깊은 인연을 맺게 되는 최승구, 이광수, 김우영이 모두 나경석의 친구였고, 최승구의 게이오대학교 후배이자 소설가인 염상섭은 나혜석의 신혼 시기를 소재로 하는 소설 <해바라기>(1924)를 쓰기도 합니다.
나혜석의 일본 유학은 근대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나혜석은 고희동, 김관호, 김찬영에 이어 조선에서는 네 번째로 서양화를 공부한 사람이었고 여성으로서는 처음이었어요. 서양화가로서의 화업을 이어가지 못했던 1세대 남성 화가들과 비교할 때, 1920년대에 경성에서 첫 개인전을 열고 꾸준히 작품을 하면서 지속적으로 서화협회전, 조선미술전람회와 같은 공모전에 출품하는 등 전업으로 활동한 근대미술의 선구자였습니다. 아직 화단이나 동인 그룹 등이 형성되지 않은 서양화 도입 초기에 활동을 하면서 예술적 성장에 어려움을 겪고 양식적 독자성을 구축하지 못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종로구 신교동 신교공영주차장에서 서울맹학교를 지나 위쪽으로 올라가면 멀지 않은 곳에 오빠 나경석이 살던 오래된 가옥이 있습니다. 나혜석이 이혼하고 사회적으로 거의 매장 당했던 시기에 은둔했다는 곳입니다. 일제강점기 이래 불어닥치던 세월의 풍파를 겪어 낸 이 집의 시간들에 대해서는 나경석의 딸 나영균 전 이화여대 교수가 쓴 책 <일제시대, 우리 가족은>(2004)에 상세히 소개되어 있습니다.
역사의 흔적이 켜켜이 쌓인 장소들이 개발론 앞에서 무력하게 사라져 가곤 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지요. 그래서 시대의 기억을 담은 공간이 아직 남아 있음이 오히려 신기할 정도입니다. 이혼 후 세상의 이목에서 잠시 비켜나 있으라는 나경석의 만류를 거부하고 자기 소신을 펼치는 글과 행동으로 세상에 맞서던 나혜석. 그러한 생각의 근원은 무엇이었을까요?
나혜석이 유학 생활을 하던 1910년대 일본 사회는 스웨덴의 여성학자인 엘렌 케이(Ellen Key, 1849-1926)의 연애도덕론이 청년들의 주목을 받고, 세이토샤(靑鞜社) 동인들이 이끄는 여성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던 때였습니다. 엘렌 케이는 저서 <연애와 결혼>(1903)에서 연애는 독립적 인격을 갖춘 자유로운 남녀의 정신적·육체적 결합이며 연애 없는 결혼은 부도덕한 결혼이라고 설파했습니다. 부모가 정해 주는 배필과의 결혼이 당연시되던 시절, 구시대의 질서에서 벗어나 근대적 주체로서의 길을 모색하던 청년 지식인들에게 엘렌 케이의 연애론은 선풍적 인기를 얻었습니다. 최초의 현대소설인 이광수의 <무정>(1917)에서 일본 유학생 출신인 주인공 형식의 독서 목록에 엘렌 케이의 전기가 들어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한편, 여성인권운동가 히라쓰카 라이초(平塚雷鳥, 1886-1971)를 중심으로 하는 일본의 신여성들은 여성해방을 주창하는 <세이토(靑鞜)>(1911-1916)라는 잡지를 내고 있었습니다. 히라쓰카는 “원시 여성은 태양이었다. 진정한 사람이었다. 지금 여성은 달이다. 타인에 의존하여 살고 타인의 빛에 의해 빛나는 병자와 같이 창백한 얼굴의 달이다”라는 유명한 창간사를 쓰면서 가부장적 관습과 사상을 타파하고 여성이 자신의 자아를 회복해야 함을 주장했습니다.
나혜석은 화가이면서 자유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여성해방론을 담은 글을 다수 발표한 작가이기도 합니다. 유학 시절을 풍미했던 진보적 사상을 지적 토양으로 하여 독립적 존재로서의 개인과 여성으로서의 자기 각성을 체화한 결과입니다. 그녀는 재일본도쿄조선유학생학우회의 기관지 <학지광>에 현모양처론을 비판하며 여성이 주체적 인간으로 자각할 것을 주장하는 '이상적 부인'(1914)을 시작으로 시, 소설, 수필, 평론 등의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여자유학생친목회에서 발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잡지 <여자계>에는 첫 소설 '경희'(1918)를 발표하여 근대문학사에 당당하게 이름을 올리기도 하지요. 여름방학에 귀국한 여자 유학생이 중매 결혼, 삼종지도 등 전통 관습을 요구하는 가족들과 갈등을 겪으면서 점차 주변 여성들을 감화시키는 내용의 자전적 소설입니다.
잡지 <신여자> 2호에 실린 나혜석의 판화 '저거시 무어신고'(1920)를 보면 조롱의 대상인 동시에 선망의 대상이던 신여성에 대한 당시의 모순된 시점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교육받은 여성 선각자로서의 책임을 자각하면서 나혜석은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1918년 귀국한 이후에도 계속 글을 발표합니다. 그의 글은 기존의 관습에 도전하는 내용이어서 논란을 불러일으키곤 했습니다. 출산 후 잡지에 연재한 '모(母) 된 감상기'(1923)는 여성의 출산과 육아에 대해 최초로 공론화한 글입니다.
박박 뼈를 긁는 듯/ 쫙쫙 살을 찢는 듯/ 빠짝빠짝 힘줄을 옥죄는 듯/ 쪽쪽 핏줄을 뽑아내는 듯/ 살금살금 살점을 저미는 듯/ 오장이 뒤집혀 쏟아지는 듯/ 도끼로 머리를 바수는 듯/ 이렇게 아프다나 할까/ 아니다 이도 또한 아니라 (나혜석, '모(母) 된 감상기', <동명>, 1923)
출산의 고통을 직접적으로 묘사하고 양육 과정의 어려움과 심리 변화를 솔직하게 기술함으로써 모성 신화에 정면으로 도전한 글은 이전에 없었습니다. ‘자식이란 모체의 살점을 떼어가는 악마’라는 구절은 흔히 알려져 있듯 이기적 모성을 드러내는 표현이 아니라, “꼭 한 시간만이라도 마음을 턱 놓고 잠 좀 실컷 자 보았으면 당장 죽어도 원이 없을 것”(모(母) 된 감상기) 같은 어미의 간절한 바람을 담고 있습니다. 해야 할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열정적인 성격에 사상을 행동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생각이 더해져, 나혜석은 급진적인 여성해방론을 주장하는 글을 써나갑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서 더 살펴보겠습니다.
이제 종로의 교보문고 광화문점 종로 출입구 앞에 있는 염상섭(1897-1963) 좌상으로 가 볼까요? 염상섭은 주지하다시피 한국 근대문학 최고의 리얼리즘 작가입니다. 식민지 사회를 투철하게 인식하면서 당대 사회의 진실을 묘사한 작품으로 '삼대', '만세전' 등이 알려져 있습니다. 좌상은 1996년 10월 한국 소설 발전에 기여한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종묘광장 앞에 설치되었다가 2014년 4월에 이 자리로 옮겨졌습니다. 그는 두 그루 큰 벚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기도 하고 곁에 앉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합니다. 해마다 봄철이면 벚꽃이 흐드러지게 만개하고 무수히 사람들이 오가는 이 길목에서, 그는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 있던 나혜석과는 대조적으로 잊히지 않는 현재를 살고 있습니다.
나혜석과 염상섭은 일본 유학 시절부터 친분이 두터웠다고 합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나혜석의 연애와 결혼을 소재로 한 중편소설을 썼을 정도니까요. '해바라기'는 동아일보에 1923년 7월 18일부터 시작하여 40회 연재되었습니다. 신혼여행 길에 옛사랑의 묘에 들러 비석을 세우는 장면도 나옵니다. 나혜석과 최승구의 연애 시절을 잘 알고 있던 염상섭은 현실과 사랑의 관념 사이에서 갈등하는 신여성의 미묘한 심리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나혜석이 사망한 지 1년 뒤에 잡지 기사를 통해 사망 소식을 접하고 추모 글 '추도'(1954)를 씁니다.
2021년에 열린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는 일제 강점기에 문인과 화가들이 각별한 연대감으로 교류하면서 예술 세계를 구축해 간 과정을 보여줍니다. 특히 3·1운동 이후 창간한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의 민간 신문사, 자매지로 발간된 잡지 등에 실린 소설과 삽화, 잡지 표지화, 시와 그림이 결합된 ‘화문(畵文)’ 등을 통해 그들의 아름다운 시절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안석주, 노수현, 이상범, 정현웅, 이승만, 김규택 등이 한 시대를 풍미한 삽화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에 동참하듯 나혜석도 염상섭의 초기 대표작 '표본실의 청개구리'가 실려 있는 창작집 <견우화>(1924)의 표지화를 그려줍니다. 당시 남편 김우영을 따라 중국 단둥에서 생활하고 있던 나혜석은 형태를 중시하는 자신의 전통적 화풍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표현주의, 추상주의와 같은 모더니즘 화풍이 도입되던 시기였습니다. 그때 마침 세계 여행의 기회가 찾아옵니다. 예술적 갈망을 해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지만, 아울러 경험해 보지 못한 인생의 격변이 시작되는 시점이기도 했습니다.
“탐험하는 자가 없으면 그 길은 영원히 못 갈 것이오. 우리가 욕심을 내지 아니하면 우리 자손들을 무엇을 주어 살리잔 말이오? 우리가 비난을 받지 않으면 우리의 역사를 무엇으로 꾸미잔 말이오?” (나혜석, '잡감(雜感)', <학지광>, 1917)
최은규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