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그림, 누가 기억해줄까"…명동거리서 박수근은 되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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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미술관
명동의 박수근 흔적
미군 PX와 반도호텔
박수근의 예술 꽃 피게 한 명동
미쓰코시百이던 미군 PX 주변서
소설가 박완서와 활보하며 데이트
유일한 그림 판매처 반도화랑에
몇점이나 팔렸는지 확인하러 찾아
가족과 생계 위해 우직히 그림 그려
명동의 박수근 흔적
미군 PX와 반도호텔
박수근의 예술 꽃 피게 한 명동
미쓰코시百이던 미군 PX 주변서
소설가 박완서와 활보하며 데이트
유일한 그림 판매처 반도화랑에
몇점이나 팔렸는지 확인하러 찾아
가족과 생계 위해 우직히 그림 그려



남의 나라 이념 전쟁에 동원된 미군들, 그들은 짬을 내 가족과 애인에게 줄 선물을 사러 이곳에 들렀다. 전쟁통에 언제 죽을지 모르는 운명이지만, 사랑하는 가족과 애인의 모습을 스카프와 손수건에 남기려 했다. 아마도 그 스카프나 손수건이 자신이 보내는 마지막 선물이 아니기를 바라면서…. 여러 환쟁이가 묵묵히 앉아 그림을 그린다. 극장 간판이나 이발소 그림을 그리던 사람들이다.

나중에 박완서는 소설이 실화가 아니라고 잡아뗐지만, 실화면 어떻고 아니면 어떠랴. 후일 한국 최고의 소설가와 국민 화가로 등극한 두 사람이 젊은 시절,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 거리를 누비는 스토리.
“나는 홀연히 옥희도 씨가 바로 저 나목이었음을 안다. 그가 불우했던 시절, 온 민족이 암담했던 시절, 그 시절을 그는 바로 저 김장철의 나목처럼 살았음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또한 내가 그 나목 길을 잠깐 스쳐 간 여인이었을 뿐임을, 부질없이 피곤한 심신을 달랠 녹음을 기다리며 그 옆을 서성댈 철없는 여인이었음을 깨닫는다.”(‘나목’ 중)

반도호텔은 6·25전쟁 후 초토화됐지만 복구를 해 외국인 전용 호텔로 쓰였다. 1956년 호텔 커피숍 한쪽에 이승만 대통령 영부인 프란체스카의 협조로 반도호텔 상설 미술 전시장이 열리고, 이를 아시아재단이 인계해 1958년 반도화랑이 개설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상업 화랑이다. 10호 미만 동서양화를 30~40점 걸 수 있는 공간이지만 박수근에게는 유일한 그림 판매처이자 가족에게는 생계의 근원이었다.
박수근은 오후 4시쯤이면 창신동에서 전차를 타고 명동으로 나왔다. 화랑에서 자신의 그림이 몇 점이나 팔렸는지 확인하고, 국내에서 드물게 양변기가 설치된 이곳에서 볼일을 봤으며, 저녁에는 명동에서 만난 예술인과 한잔한 뒤 헤어지기도 했다. 황금찬 시인은 ‘문단사’에서 박수근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어느 날 그는 내게 다음과 같은 말을 영문도 없이 하는 것이다. ‘황 선생, 내가 죽고 나면 내 그림이 어떻게 될까? 단 한 점이라도 누가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을까? 아니면 어느 날의 낙엽같이 그렇게 쓸려가고 말까?’ 하는 것이었다.”
호텔에 묵은 사람들이 구입한 박수근 작품은 수십 년이 흘러 국내로 돌아왔다. 작품 뒷면에는 반도화랑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미국 대사관 문정관 부인인 마리아 헨더슨은 서울아트소사이어티를 조직하고 한 달에 한 번 화가 작업실을 방문하는 행사를 열곤 했다. 그녀는 독일에서 미술을 공부한 조소 예술가였다.

현대 건축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르코르뷔지에의 건축 이론에 따라 백화점 옥상에 카페를 차린 모습은 미쓰코시백화점에서 시작해 신세계백화점으로 바뀐 지금도 옛 모습 그대로다. 박수근은 PX로 변한 이 건물에서 가족과 생계를 위해 우직하게 그림을 그렸다. 화가 박수근은 죽으면서 무슨 말을 남겼을까. 간경화와 백내장으로 실명한 박수근은 “천국이 가까운 줄 알았는데 너무 멀어, 너무 멀어….” 하면서 1965년 5월 6일 타계했다. (아르떼 홈페이지 arte.co.kr에서 연재 계속.)
한이수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