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명 작가의 신작 장편…인간사회에 치밀하게 개입하는 AI 이야기
가장 원초적인 惡까지 학습한 AI…소설 '안티 사피엔스'
남편은 췌장암 말기다.

살날이 1년 반 정도 남았다.

뛰어난 IT 개발자이자 유능한 사업가였던 김기찬. 인공지능(AI) 빅테크 기업 '그노시안'의 수장이었던 케이시 김이 바로 그다.

남편은 수술마저 거부한 채 고차원 두뇌결합형 AI 프로젝트인 '앨런'의 완성에 매달린다.

앨런은 인간의 두뇌 활동과 AI 시스템을 연동해 인간 정신과 기계를 결합하는, 모든 개발자가 꿈꾸지만 아무도 해내지 못한 AI의 종착점과도 같은 프로젝트였다.

남편이 죽자 거액의 유산도 포기한 채 새 남자를 만나 결혼한 아내는 그런데 어느 날부터 집안에서 이상한 일들을 겪는다.

죽은 남편의 서재에 불이 켜져 있거나, 주문하지도 않은 피자가 배달되기도 한다.

죽은 케이시가 살아 돌아온 걸까.

'뿌리 깊은 나무' '바람의 화원' 등을 쓴 이정명 작가의 신작 장편소설 '안티 사피엔스'는 사용자의 두뇌와 완전히 동기화된 최첨단 AI '앨런'에 자신의 기억과 생각, 감정, 사고 등 모든 것을 전송한 남자의 이야기다.

앨런은 특정한 감정과 정서에 관여하는 뉴런과 시냅스의 전기적 화학작용을 데이터화해 기쁨·슬픔·분노·절망 등의 원초적 감정은 물론, 자긍심·수치·증오·적대감 등의 복합적 감정도 인식한다.

코르티솔과 옥시토닌의 분비량으로 슬픔을, 미세하게 오른 체온과 늘어난 혈류량으로 기쁨을, 아드레날린 농도로 분노를, 부교감신경의 활성화 정도로 낙담의 수준을 데이터로 환산해낸다.

문제는 앨런의 매우 고도화한 학습 능력이다.

앨런은 인간의 두뇌작동 방식을 흉내 내 인공신경망으로 학습하는 '딥 러닝' 방식을 통해 케이시의 내면에 잠재해 있던 원초적인 '악'(惡)을 학습하기에 이른다.

"앨런의 저장 장치는 내 본성의 밑바닥에 가라앉은 어둡고 그릇되고 사악한 본성들로 채워져 있었다.

분노와 짜증, 불신과 소외감, 세상에 대한 적의와 타인에 대한 증오, 아내에 대한 불만과 불안 같은 데이터가 의사 결정 단계마다 앨런에게 악의적인 판단과 결정을 유도했다.

"
가장 원초적인 惡까지 학습한 AI…소설 '안티 사피엔스'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감정인 선과 악을 학습해 내면화한 앨런은 인간 사회에 치밀하게 개입하기 시작하고 인간들은 대혼란에 직면한다.

창조자의 능력을 훌쩍 뛰어넘어 버린 앨런 앞에서 과연 인간들은 생존과 번영을 보장할 수 있을까.

긴장감과 속도감을 모두 쥔 능숙한 스토리텔링을 따라가다 보면 인간과 비인간, 의식과 감정, 선과 악, 첨단기술의 윤리 등 AI 시대에 꼭 필요한 질문들을 마주치게 된다.

이정명 작가는 소설 맨 뒤에 실린 '작가의 말'에서 AI가 인류가 이뤄놓은 모든 것들을 바꿔놓을 것임이 분명하다며 인간이 존재 이유를 기계가 아닌 스스로의 힘으로 찾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프롬프트 창에 질문을 써넣기보다 자신에게 묻고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한다.

불완전하고 어리석은 인간에 대해, 그럼에도 여전히 빛나는 인간에 대해."
은행나무. 304쪽.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