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사국 스위스 의회 "정치 편향적 판단…권한남용"
"인권 협약 해석 대신 재판소가 정책에 직접 개입"
'기후대응 부족은 인권침해' 유럽인권재판소 판결 논란
스위스 정부의 온실가스 저감 노력이 부족해 고령자의 인권이 침해당했다는 유럽인권재판소(ECHR)의 지난달 판결을 두고 논란이 커지고 있다.

소송을 지원했던 스위스 진보 정당은 판결을 옹호했지만 전직 연방법관과 의회 상임위원회는 정치적 편향을 보인 판결이라며 반발했다.

23일(현지시간) 스위스 연방의회에 따르면 연방상원 법제사법위원회는 지난 21일 이 판결이 권한남용이라는 선언문을 채택했다.

다니엘 요시치 법사위원장은 스위스 언론에 "연방상원이 우리의 선언문을 채택하기를 원하며 이번 여름 회기에서 결정될 것"이라며 "우리는 ECHR의 가치를 인정하지만 판결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뜻을 표명하고 싶다"고 말했다.

ECHR은 지난달 9일 스위스 환경단체 '기후 보호를 위한 노인 여성' 소속 회원들이 스위스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했다.

64세 이상의 스위스 여성 약 2천400명으로 구성된 이 단체는 스위스 정부가 온실가스 배출을 억제하지 않은 탓에 기본권을 침해했다며 2020년 자국 법원에 소송을 냈고 받아들여지지 않자 ECHR로 사건을 들고 갔다.

ECHR은 스위스 정부가 기후변화 입법과 관련 조치를 제때 취하지 않았고 탄소 저감 예산을 책정하는 데에도 실패하는 등 기후변화 해결 노력이 부족했다고 봤다.

그러면서 이는 유럽 인권조약상 생명권과 자율권에 대한 침해라고 판결했다.

소송을 도왔던 녹색당 등 스위스 진보 정당들은 승소 판결을 환영했다.

리사 마조네 녹색당 대표는 "정부의 기후변화 무대책에 대한 따끔한 일침이며 파리 기후변화 협약에 버금가는 중요성을 지닌 역사적 승리"라고 입장을 냈다.

그러나 민주적 절차에 따라 기후변화 정책을 수립하려는 스위스에 ECHR이 판결을 통해 정책적으로 개입하려 한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스위스는 파리 기후변화 협약을 준수하겠다는 목표로 2030년까지 탄소배출을 1990년 수준의 절반으로 줄이기로 하고 탄소배출 규제를 강화하는 법안을 추진했지만 2021년 국민투표에서 부결되면서 정책 추진 동력이 떨어진 상태다.

이런 사정을 신중히 고려하지 않고 기후변화 예산 증액 실적 등 몇 가지 지표만으로 정부에 책임을 돌리는 건 ECHR의 판결이 결과적으로 특정 정당의 정책방향에 힘을 싣는 것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스위스 신문 노이어취리허차이퉁(NZZ)은 사설을 통해 "ECHR의 판사들은 법정에서 기후정책을 추구하고 있다"고 지적했고, 타게스안차이퉁 역시 "법원이 정책을 형성하기 시작하면 민주주의가 압박받게 될 것"이라고 짚었다.

전직 연방대법원 판사도 비판 대열에 동참했다.

브리짓 피프너 전 연방대법원 판사는 지난 19일 독일 매체인 쥐트도이체차이퉁과 인터뷰에서 "ECHR이 인권 협약을 해석하는 대신 정책을 만들고 있다"며 "이런 정치적 색채의 판결은 법원의 신뢰도를 떨어뜨린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판결은 주민 사생활과 가정이 존중받을 권리를 스위스 기후정책이 얼마나 제한하는지를 설득력 있게 답하지 못한다"며 "단체가 낸 소송인데도 자연인에게만 있는 사생활 존중 권리를 인정하는 논리적 문제도 발견된다"고 덧붙였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