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투자협회 자료사진. 사진=신민경 기자
금융투자협회 자료사진. 사진=신민경 기자
금융투자사들이 협회가 추진하고 있는 펀드상품 출시에 불만을 제기하고 있다. 기존에 있던 펀드와 성격이 비슷한데다 실효성 또한 크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면서다. 다만 공동 출시까지 약 4개월밖에 남지 않아 울며 겨자 먹기로 상품을 만들고는 있다.

23일 업계에 따르면 자산운용사들이 '디딤펀드'의 출시를 준비하고 있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금융투자협회 주관의 초기 태스크포스(TF)에서 자산운용사 7곳(삼성·미래에셋·KB·한국투자, 신한·트러스톤·유진)이 모여 디딤펀드 브랜드화를 위한 논의를 시작했다. 최근에는 한화자산운용과 키움투자자산운용, NH아문디자산운용, 대신자산운용도 이 TF에 들어갔다.

이들 운용사는 1개씩의 펀드를 이르면 9월까지 내놓을 예정이다. 이에 따라 최소 열 개 정도의 신규 펀드가 추가될 예정이다. 다만 TF에 참여하지 않은 운용사들 중에서도 디딤펀드 출시를 검토 중인 곳이 있어 실제로는 더 많은 펀드들이 나올 예정이다.

디딤펀드는 지난해 취임한 서유석 회장이 야심차게 추진하는 상품이다. 서 회장은 자산운용사 출신답게 개인에게도 연기금처럼 중장기 수익을 추구하는 펀드가 필요하다고 봤다. 회장 출마 시절부터 '사적연금 수익률 개선'을 공약해 온 서 회장은 개인도 펀드에 연금자산을 넣으면 국민연금이 돈 굴리는 방식처럼 굴려주는 상품이 나와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하지만 자산운용사들은 이번 디딤펀드가 기존 자산배분 펀드들과 다름없다고 입을 모은다. 이미 디딤펀드처럼 주식·채권 등 자산 배분 비중을 일정하게 가져가는 상품이 많은 데다, 시장 상황에 따라 자동으로 위험 비중이 조절되는 '타깃데이트펀드'(TDF)까지 이미 시장에 널리 퍼져있는 터다. 때문에 업계에서는 새삼스럽에 이름을 내걸고 새 브랜드를 내놓을 필요가 있느냐며 볼멘소리를 하고 있다. 사실상 '수요 없는 공급'이란 얘기다.

디딤펀드와 비슷한 형태의 펀드는 외부위탁운용관리(OCIO) 펀드다. 연기금과 공제회 등 거액의 기관 돈을 운용사가 대신 굴려주는 'OCIO' 제도를 개인들도 투자에 이용할 수 있게끔 공모펀드에 접목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연 4~5%를 목표수익률로 제시할 만큼 안정성을 중시한 펀드다. 타깃리스크펀드(TRF)도 디딤펀드와 비슷하다. 투자자들 성향에 따라 주식과 채권의 비중을 미리 정해두고 관리하는 게 특징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업계에서는 디딤펀드 출시가 요식행위에 그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여느 정책성 상품이 그랬듯 깃발 들고 나섰던 사람이 물러나면 사업 동력이 약해진다. 작년 1월 협회장에 오른 서 회장의 임기는 내년 말까지다. 심지어 '디딤'이라는 이름도 서 회장이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운용사 한 담당자는 "정책성 펀드라는 것이 늘 시작은 좋은데, 총대를 멨던 사람이 사라지면 펀드들만 '낙동강 오리알'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이번의 경우에도 중복상품이 많은 데다 차별화된 이점이 없는데 협회 눈치를 보고 만드는 것이어서 경쟁력이 없어 보인다"고 말했다. 한 운용사 연금 담당 임원은 "흥행의 관건은 기존 펀드들에서 옮겨 갈 유인이 얼마나 있는가인데 세제 혜택까진 못 해주더라도 '플러스 알파'는 있어야 설득력이 있지 않느냐"고 지적했다.

다른 한 운용사 임원도 "개조도 없이 같은 걸 내놓겠다는 건, 스마트폰이 잘 팔리니까 옛 3세대(3G) 폰도 끌어와 같이 팔자는 말과 다를 바 없다"고 꼬집었다. 그는 "운용사 담당자들 사이에서도 '업데이트'가 아닌 '다운그레이드'(후진적) 상품이라며 불만이 많은 상황"이라며 "우리는 기존 OCIO 펀드를 디딤펀드로 이름만 바꿔 낼 계획"이라고 귀띔했다.

상품을 판매하는 증권사도 반발하고 있다. 증권사들은 협회 회원사인 만큼 은행들과 달리 상품 구성(라인업)에 디딤펀드를 적극 걸어줘야 하는 상황이다. 디폴트옵션과의 연계는 고용노동부 승인 사안이어서, 빨라야 1년 성과를 확인할 수 있는 내년 말쯤 이뤄질 예정이고 그 전까진 특히 증권사 역할이 중요하다. 판매채널에서 '디딤펀드가 연금펀드로서 소비자들에게 먹힌다'는 게 입증돼야 증권사들이 고용부에 디폴트옵션 상품 신청을 하기 때문이다.

한 증권사 퇴직연금 담당 임원은 "소비자들에게 '포트폴리오에서 기존의 TDF를 빼고 디딤펀드를 디폴트옵션으로 넣으라'고 권해야 하는데 애를 먹을 것 같다"며 "우리조차 디딤펀드가 더 나은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이에 대해 협회 측은 새 브랜드를 내놓는 게 장점도 크다고 설명했다. 디딤펀드 콘셉트와 같은 TRF, OCIO 펀드는 시장에서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 이참에 새 브랜드로 공격적인 마케팅을 벌여 자산배분펀드 시장을 확대하겠단 얘기다.

협회는 TDF 일변도인 디폴트옵션 펀드상품을 향후 'TDF'와 '밸런스드펀드'(BF)의 양 축으로 변화시키는 게 목표다. BF란 주식, 채권 등 여러 자산에 나눠 투자하는 자산배분펀드란 점에선 TDF와 같다. 하지만 은퇴까지 기간이 많이 남았을 땐 주식 비중을 높게 가져가는 TDF와 달리, BF는 주식 비중을 내내 일정하게 유지한다. 이처럼 안정성이 강점인 BF를 띄우기 위해 TRF, TIF, OCIO 펀드 등 직관적이지 못한 이름들 대신 '디딤펀드'란 공동 브랜드를 앞세우겠단 것이다.

문유성 금융투자협회 연금부장은 "공동 브랜드는 업계에도 스타 상품을 만들어서 좋고, 소비자로서도 '선택 딜레마'가 줄어드니 긍정적"이라며 "숙련된 투자자들에게는 구미가 당기지 않을 수 있겠지만 수익을 계속 관리하기 어렵거나 초보 투자자들에겐 꼭 필요한 상품이라고 본다"고 밝혔다. 또 "운용사들 참여는 필수가 아닌 자율"이라며 "새 펀드를 내지 않고 기존 OCIO 펀드를 디딤펀드로 전환하는 것도 가능해 일부 중소형 운용사들로부터 호응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서유석 금융투자협회장은 "원리금에 머물고 있는 85% 넘는 퇴직연금 자금을 그대로 뒀다간 우리 국민 노후에 미래가 없을 것"이라며 "원리금 보장 상품 가입자들이 더 편히 실적배당 상품으로 옮겨탈 수 있는 디딤돌 역할을 해야 하는데, 그 대안으로 디딤펀드를 구상한 것"이라고 말했다. 덧붙여 "디딤펀드의 규모화까진 많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일단 출시되면 낮은 변동성과 우수한 성과로 어마어마한 운용 규모를 갖추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서 회장의 임기가 끝난 뒤에도 디딤펀드가 육성될 수 있을지 묻는 말에는 "협회는 디딤펀드가 디폴트옵션의 BF 부문에서 대표상품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계속 지원해 나갈 것"이라고 답했다.

신민경/진영기 한경닷컴 기자 radi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