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통, 공포, 불안과 매일 싸운다. 이걸 경감하는 유일한 방법은 예술을 창작하는 것이다. 예술의 가닥을 따라가던 중 내가 살 길을 발견했다.”
2021년 이스라엘 텔아비브 미술관에서 열린 쿠사마 야요이 회고전의 ‘우주에서 본 사랑의 꽃다발’. AFP연합뉴스
2021년 이스라엘 텔아비브 미술관에서 열린 쿠사마 야요이 회고전의 ‘우주에서 본 사랑의 꽃다발’. AFP연합뉴스
무수한 물방울무늬 호박 조각으로 알려진 작가, 쿠사마 야요이의 말이다. 그는 자신의 정신질환 관련 증상과 그것이 작품에 미친 영향을 공적으로 알린 소수의 예술가 중 하나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는 사실이 낙인으로 작용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관객을 매료시킨다는 것이다. 쿠사마의 작품은 세계 유수의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전시되고, 그때마다 인파 관리가 필요할 만큼 사람들이 몰려든다. 관람시간을 45초로 한정하는가 하면(2013년 데이비드 즈워너 갤러리 전시), 1년 치 티켓이 예매 몇 분 만에 매진되고(2012년 테이트모던 전시), 하루 만에 9만 장의 표가 팔리는 일이 부지기수다.

쿠사마의 신경증적 증상은 생각보다 훨씬 오래되고 그 정도가 가볍지 않다. 쿠사마는 젊은 시절부터 자신이 겪은 심리적 고통, 공황 발작, 환청과 환시에 대해 공개적으로 말해왔다. 수차례의 자살 시도 경험을 알렸을 뿐 아니라 1977년 도쿄 세이와 정신병원에 입원한 이래 퇴원하지 않은 상태다.
쿠사마 야요이(오른쪽 두번째)가 어린 시절 부모님, 언니 오빠들과 찍은 가족 사진.
쿠사마 야요이(오른쪽 두번째)가 어린 시절 부모님, 언니 오빠들과 찍은 가족 사진.

그림을 찢어버린 엄마

쿠사마는 1929년 일본 소도시 마쓰모토에서 종묘원을 경영하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쿠사마의 자서전에 따르면 어머니는 어린 딸에게 정신적, 신체적 학대를 가했다.
쿠사마 야요이(오른쪽 두번째)가 어린 시절 부모님, 언니 오빠들과 찍은 가족 사진.
쿠사마 야요이(오른쪽 두번째)가 어린 시절 부모님, 언니 오빠들과 찍은 가족 사진.
일곱 살 무렵부터는 제비꽃, 호박, 개 등이 자신에게 말을 거는 환청이 들리는가 하면 꽃에 사람 같은 얼굴이 있거나 주변 사물에 환하게 불이 켜지는 등의 환시를 보기 시작했다. 이는 조현병의 증상으로 의심되는 지점이다. 과거 ‘정신분열병’으로 불린 조현병은 주로 10대 후반에서 20대의 나이에 시작해 만성적 경과를 보이는 정신적으로 혼란된 상태다. 현실과 현실이 아닌 것을 구별하는 능력의 약화를 유발하는 뇌 질환. 쿠사마는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나는 얼른 집으로 돌아가 내가 본 것을 그렸다. […] 본 것을 기록하는 것은 발생한 에피소드의 쇼크와 공포를 경감하는 데 도움이 됐다. 이것이 내 회화의 근본이다”고 밝힌다.

보이고 들리는 ‘기묘한 것’을 기록하고자 낙서에 몰두하는 어린 쿠사마를 위해 아버지는 물감, 붓 등 재료를 사줬다. 반면 어머니는 “여성은 얌전히 커서 가정주부가 돼야지 화가가 돼선 안 된다”고 꾸짖으며 그림을 찢어버리곤 했다.

1948년 전쟁이 끝나고 교토시립예술대학 회화과에 진학했지만 전통적 교습 방식과 니혼가(일본화)만을 고집하는 커리큘럼에 반감을 느꼈다. 이 시기 부모가 자신을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정략결혼을 시키려 했고, 불안감은 더 커졌다. 쿠사마는 자신의 20대를 회고하며 “신경쇠약증에 수없이 시달렸고, 점점 이인증(자기 지각에 이상이 생겨 스스로가 낯설게 느껴지는 상태)의 커튼에 포위당한 듯했다”고 말한다.
쿠사마 야요이의 ‘하늘에서 내려온 호박의 영혼’.  AFP연합뉴스
쿠사마 야요이의 ‘하늘에서 내려온 호박의 영혼’. AFP연합뉴스

밥도 잠도 잊고 몰두한 뉴욕 시기

조현병을 인지한 상태에서도 그림에 몰두한 그는 1952년 첫 전시회를 연다. 이 전시가 마쓰모토시 신슈대 의대 정신과 교수인 니시마루 시호의 관심을 끈다. 그는 쿠사마의 작업을 분석하며 한 학회에서 ‘조현병 경향성을 가진 천재 여성 아티스트’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한다. 동시에 니시마루 교수는 쿠사마에게 “신경증이 악화되지 않을 유일한 길은 가족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라고 조언했다. 실행할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1955년 미국 화가인 조지아 오키프의 화집을 보고 매료된 쿠사마가 자신의 수채화 그림을 동봉해 편지를 보냈는데 이것이 연이 되어 미국 비자를 받고 미국으로 이주할 수 있었다.

1957년 뉴욕으로 건너간 그의 삶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남성 중심의 화단, 전후 미국의 강한 반일감정과 맞서야 했다. 극복할 방법은 그림뿐이었다. 종종 음식을 먹지도, 잠을 자지도 않으며 50~60시간씩 그렸다고. 이때 ‘양극성 장애’의 ‘조증 단계’가 발현된 것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추정해볼 수 있다. 조증은 심한 흥분에 따른 고양감, 불안감, 충동성, 사고의 비약과 같은 증상을 특징으로 한다. 심한 경우 수면 욕구 감소, 목표 지향적 활동의 증가, 쾌락적인 활동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증상 등이 있다.

이 시기에 그린 것이 ‘무한 망(Infinity Net)’ 시리즈다. 검은 바탕 위에 흰 물감으로 작고 균질한 크기의 호(arc)를 촘촘히 연결해 멀리서 바라봤을 때 마치 흰 레이스 천이 검은 캔버스 위에 올려진 듯 보이는 회화다. 캔버스 전체를 망으로 뒤덮다 못해 책상과 바닥, 그리고 자기 몸 위에도 그렸다.
‘무한 망(Infinity Net)’을 그리고 있는 쿠사마 야요이.
‘무한 망(Infinity Net)’을 그리고 있는 쿠사마 야요이.

무한 반복으로 지워낸 불안

쿠사마 야요이, 공포를 떨치는 몸부림…'무한의 반복' 만이 그녀를 자유롭게 했다
쿠사마는 1959년 뉴욕 화단에 성공적으로 입성했지만 자신의 조현병 증세가 심화됐음을 자각한다. 매일 열정적으로 그림을 그리던 어느 날 아침에 깨서 눈을 떠보니 전날 그린 망이 창문에도 있더라는 것. 손을 뻗어 만져보려 했더니 그 무늬가 살아 움직이며 기어서 자신의 피부로 옮겨 오더라고 그는 술회한다. 이로 인해 공황장애 발작이 오고, 앰뷸런스를 불러 병원으로 이송되는 일이 잦았다. 며칠씩 멈추지 않고 그림을 그리며 안정을 찾는 쿠사마의 행위는 점점 더 강박적으로 변했다. 속칭 ‘땡땡이’ 점무늬를 반복적으로 그리는 ‘폴카도트 시리즈’ 또한 이 시기에 시작됐다.

쿠사마는 반복적으로 그려내는 행위를 ‘자기 말소(self-obliteration)’라 칭한다. 끝없는 반복이 머릿속의 시끄러운 잡음을 고요하게 만들고 삶의 불안을 지워내는 데 도움이 됐다는 것이다. 타고난 재능을 정신질환을 핑계로 방치하지 않고, 평생의 숙명으로 짊어진 채 비범한 인내심과 열정으로 벼려낸 예술적 승화 과정이 오늘날의 쿠사마를 만들었구나 싶다.

오범조 서울특별시보라매병원 가정의학과 부교수
오경은 상명대 계당교양교육원 미술사학 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