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유리 감독의 영화 '메아리' 촬영 당시 모습. /CJ문화재단
임유리 감독의 영화 '메아리' 촬영 당시 모습. /CJ문화재단
“레드카펫, 포토콜, 인터뷰, 시상식, 제 영화 ‘메아리 ’상영까지 잡힌 일정들이 많아요. 정신 똑바로 차리려 캘린더에 정리도 했어요.”

영화 ‘대부’를 연출한 거장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부터 요르고스 란티모스, 그레타 거윅 등 영화계를 주름잡는 감독들이 모인 프랑스 남부도시 칸에 스물여섯살 한국인 영화학도가 짐을 풀었다. 첫 연출작 ‘메아리’가 전 세계 영화학교 학생들이 만든 단편 영화끼리 경쟁하는 제77회 칸 국제영화제 ‘라 시네프’ 섹션에 선정되면서다. 이 젊은 감독의 이름은 임유리(26). 한국예술종합학교 영화과 학생인 동시에 세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칸 영화제가 초청한 영화감독이다.
영화 '메아리' 스틸. /인디스토리 제공
영화 '메아리' 스틸. /인디스토리 제공
임 감독은 2년 연속 경쟁부문 진출이 불발되며 ‘위기론’까지 나오는 한국영화가 올해 칸영화제에서 건진 몇 안 되는 성과다. 영화감독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무대인 칸에 일찌감치 발 들인 새내기 감독의 소감이 궁금해 보낸 인터뷰 메일에 그는 영화제가 개막한 14일(현지시간) “여행지에서 엽서를 쓰는 기분”이라며 답신을 보내왔다. 긴장감은커녕 마치 훌쩍 여행 가듯 칸을 찾은 것 같은 유쾌한 모습에선 어엿한 영화인의 분위기가 풍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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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감독의 ‘메아리’는 올해 라시네프에 출품된 2263편 중 18편의 우수 작품에 선정돼 오는 22일 칸에서 상영된다. 이를 두고 임 감독은 “내 영화는 단편영화의 문법을 잘 지킨 것도 아니다”라며 “완성도 높은 작품이 많을 텐데 왜 ‘메아리’일까’ 곰곰이 생각해봤다”고 했다. 기쁨보단 의아함이 앞섰단 뜻이다. 그는 “처음엔 작품 색채나 분위기가 독특해서가 아닐까 싶었는데, 친구가 영화를 보더니 ‘잔상이 남는다’고 하더라. 아무래도 이 말이 맞는 것 같다”고 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재학 중인 임유리 영화 감독. /CJ문화재단
한국예술종합학교 재학 중인 임유리 영화 감독. /CJ문화재단
‘메아리’는 술 취한 남성들에 쫓겨 금지된 숲으로 도망친 옥연이 수년 전 옆 마을 영감에게 시집간 앞집 언니 방울을 만나 여성으로 사는 삶의 진실을 마주하는 이야기를 그린 20분 남짓의 단편이다. 임 감독 말마따나 어두침침한 색채가 돋보이는 터라 ‘스릴러’나 ‘호러’로 소개되곤 하지만, 그는 영화 정체성을 ‘판타지’로 규정했다. 임 감독은 “‘옛날옛날에~’하며 제가 만든 세계로 들어가는 ‘판타지 전래동화’”라며 “영화 ‘판의 미로’와 비슷한 결이라 생각해달라”고 했다.

단편영화로는 흔치 않은 판타지 사극 장르란 점에서 묻힐 뻔했던 시나리오는 2022년 CJ문화재단 지원사업에 선정되며 영화로 완성될 수 있었다. 임 감독은 “시나리오 단계부터 품이 많이 드는 영화인 게 티가 나서 많은 분들이 ‘재밌다’면서도 ‘어떻게 구현하느냐’고 걱정했다”면서 “지원작 선정 후 멘토로 매칭된 임선애 감독님이 ‘지금 나와야 하는 이야기’라며 믿음을 보여주신 덕분에 재단도 모험을 해본 게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동화를 좋아하고 공상을 즐기는 임 감독은 영화가 품은 이야기를 직접 그려낸다. 판타지 전래동화 ‘메아리’ 역시 자신이 어느 날 꾼 꿈에서 시작됐다. “잠에서 깨 꿈을 일기로 쓰면서 영화로 만들어야겠단 확신을 했다”는 그는 “실제로 영화 맨 마지막 롱테이크 컷이 꿈에서 본 장면과 거의 같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구축한 이 판타지 세계관으로 장편도 구상 중이다. 임 감독은 “긴 호흡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며 “차기작으로 ‘메아리’의 장편 버전, 모두가 증발해버린 세계에서 미지의 공간 ‘에덴’으로 향하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종말)물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고 했다.
임유리 감독의 영화 '메아리' 촬영 당시 모습. /CJ문화재단
임유리 감독의 영화 '메아리' 촬영 당시 모습. /CJ문화재단
꽤 이른 나이에 칸영화제 레드카펫을 밟는 성취를 맛본 만큼 어린 시절부터 영화감독 준비해 온 ‘시네필(Cinephile·영화애호가)’인가 싶지만, 사실 임 감독은 스무살을 훌쩍 넘겨 영화에 입문한 늦깎이 영화학도다. 공대에 입학했다가 그만두고, 미대 입시를 준비하다 실패하고 나서야 영화의 길을 찾아냈다고 한다. 그는 “실패를 거듭하며 ‘난 정말 어떻게 살고 싶은 거지?’라는 고민을 하다 자유롭게 생각하고 고민하는 사람들과 지내고 싶단 생각을 하다 한예종을 알게 됐다”면서 “이곳 영화과 입시 문제를 접하면서 영화라는 매체에 매료됐다”고 했다.

자유롭게 구상한 이야기로,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람들과 함께 만든 ‘메아리’는 관객들 마음속에 남을 판타지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임 감독의 꿈을 지탱하는 원동력이자 예술세계의 시발점이다. 칸 레드카펫을 밟는 순간을 앞두고도 ‘맨땅에 헤딩’하던 고된 영화 제작과정이 아직 머릿속에 선한 이유다.

“춥고, 배고프고, 밤샘 촬영으로 지칠 대로 지친 시점에 산골짜기 오지에서 강강술래를 추는 장면을 찍는데 하나도 에너지가 느껴지지 않는 거예요. (감독인) 제가 당황하니까 조연출 언니가 좀 신나는 음악이나 틀자면서 소녀시대 노래를 틀었어요. 그랬더니 출연자들은 박자감을 잡고, 스태프들 웃으면서 무사히 촬영을 끝냈죠. 아직도 기억나요. 그 캄캄한 산골짜기 서낭당 앞에서 울려 퍼진 노래에 맞춰 한복 입은 사람들이 머리 흔들며 강강술래 추던 장면이요.”
칸영화제 단편 라시네프 섹션에 초청된 한국예술종합학교 임유리 감독의 '메아리' 포스터. /칸영화제집행위
칸영화제 단편 라시네프 섹션에 초청된 한국예술종합학교 임유리 감독의 '메아리' 포스터. /칸영화제집행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