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 예상밖 부진에…다시 주목받는 '백금' [원자재 포커스]
전기차 수요가 생각만큼 빨리 늘지 않으면서 내연차에 사용되는 백금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백금 공급량은 수요에 비해 부족한 상태인데, 이런 상태가 좀 더 지속된다면 백금가격이 다시 상승할 가능성이 거론되는 중이다. 백금사업부 매각 제안을 받은 앵글로아메리칸은 매각 가격을 두고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사진=게티이미지뱅크
파이낸셜타임스(FT)가 14일(현지시간)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세계 백금투자협회(WPIC)는 이번 주 런던에서 열리는 연례 백금주간 콘퍼런스를 앞두고 올해 백금 공급량이 수요에 비해 상당히 부족할 것이라는 보고서를 내놨다. WPIC에 따르면 지난해 백금 시장은 수요 대비 공급이 85만10000온스 부족했는데, 올해도 47만6000온스가 부족할 것으로 예상됐다. 연간 수요 대비 6% 가량이 모자랄 것이라는 추정이다.
2021년 최고가 대비 20% 이상 떨어진 플래티넘 가격.  /블룸버그 홈페이지
2021년 최고가 대비 20% 이상 떨어진 플래티넘 가격. /블룸버그 홈페이지
백금은 내연기관차에서 유해물질 배출을 줄이는 데 주로 사용된다. 전기차로 전환하면 백금 수요는 그만큼 줄어들 수 밖에 없다. 이런 전망이 강해지면서 최근 수년간 백금값은 하락을 거듭했다. 2021년 초에는 온스당 1300달러 수준이었던 가격은 현재 1000달러 수준으로 내려왔다.

가격이 급락하면서 생산업체들은 잇달아 관련 사업부 축소국면에 나섰다. 세계 백금 생산량의 약 40%를 차지하고 있는 대표사업자인 앵글로아메리칸은 관련 사업부를 20% 가량 축소했다. 앵글로의 경쟁사인 실바니스틸워터와 임팔라 플래티넘도 경비 절감을 위해 수천 명을 구조조정했다.

그러나 전기차로의 전환 속도가 예상보다 더딘 가운데 초과수요 국면이 이어지면서 상황은 달라지는 중이다. 하이브리드 차량 수요가 빠르게 늘고 있는 것도 백금 수요에는 긍정적이다. 하이브리드 차량에는 내연기관이 포함되기 떄문이다.

경쟁 원자재 업체인 BHP에서 인수 제안을 받은 앵글로아메리칸은 고심하고 있다. 올 하반기에 백금값이 다시 상승할 경우 현재 가격을 기준으로 사업을 매각하는 게 지나치게 헐값 매각을 했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어서다. 던컨 완블라드 앵글로아메리칸 최고경영자(CEO)는 올초 "사이클상 좋지 않은 때에 자산을 파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지금이 '바닥'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취지다.

FT에 따르면 BHP는 최근 앵글로아메리칸 측에 주당 27.53파운드에 인수하는 방안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이는 지난달 제안(주당 25파운드)보다 15% 가격을 더 높여준 것이다. 총 인수대금 규모는 340억파운드(약 58조4000억원)에 달한다. 그러나 앵글로 측은 이러한 제안이 회사의 가치를 "심각하게(significantly)" 낮잡은 것이라며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BHP측의 제안은 남아프리카의 백금 및 철광석 사업부를 분사하는 것을 전체로 회사 전체 지분을 사들이는 내용이다. BHP는 향후 기후변화 대응 과정에서 중요성이 커지는 구리 광산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BHP는 지난해 기준 세계 구리 생산 3위(연 122만t), 앵글로는 6위(연 83만t) 사업자다.

앵글로의 2대 주주인 남아공 정부 산하 공공투자청(PIC)은 FT에 "(광산업은) 남아공 경제의 매우 중요한 부분으로서 이해관계자가 다양한 산업"이라며 모든 종류의 제안이 "장기적 지속가능성을 고려해 검토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BHP 외에도 백금 사업을 원하는 업체들이 더 있을 것이라고 주장해 왔던 드장고 데이비슨 호스킹파트너스 포트폴리오 매니저는 "사이클이 반등할 것으로 보인다"며 "이런 종류의 (백금류) 금속의 가치는 앞으로 더 오를 수 있으며 매력적인 투자처가 될 것"이라고 FT에 말했다.
백금 관련 기업들 주가는 꾸준히 내리막을 타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 홈페이지.
백금 관련 기업들 주가는 꾸준히 내리막을 타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 홈페이지.
그러나 모든 전문가들이 이같은 '바닥론'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다. 일부 애널리스트들은 백금 공급부족이 반드시 가격 상승으로 이어지지는 않을 수 있다고 밝혔다. 무엇보다 팬데믹 기간 동안에 누적된 재고 탓에 일시적인 수급 불일치가 있더라도 가격 상승폭이 제한될 수 있다고 FT는 지적했다.

수급 불일치 상황이 계속 악화될 것이라고 가정하기도 쉽지 않다. 런던에 상장된 촉매기술기업 존슨 매테이는 현재의 백금 공급 부족 규모는 10년 래 최고 수준이라고 지난 주 밝혔다. 앞으로 공급부족이 계속되지 않는다면 가격이 꾸준히 상승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얘기다. 루펀 라이타타 존슨 매테이 시장분석 담당자는 "공급이 다소 부족한 상황이 있더라도 반드시 그것이 (가격상승으로) 전환되지는 않으며 특히 이런 상황에선 그렇게 되기가 더 힘들 것"이라고 FT에 밝혔다. 해당 기업의 주가가 적정 수준이라는 의미다.

이상은 기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