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소에 갇힌 '로미오와 줄리엣'… 원작이 희미할 정도의 파격
영화, 뮤지컬, 발레 등 수많은 방식으로 재탄생한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매튜 본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그중 단연 가장 파격적인 작품 중 하나다. 매튜 본은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 등의 작품을 통해 고전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작품으로 알려졌다. “셰익스피어의 원작을 성역화하지 않고 새롭게 접근하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지난 8일부터 서울 마곡동 LG아트센터 공연하는 작품도 그랬다. 셰익스피어 희곡을 현대무용극으로 재해석한 이 공연은 원작 속 이야기 구조를 과감하게 벗어난다.

작품은 ‘베로나 인스티튜트’를 배경으로 한다. 기관이라는 뜻을 지닌 인스티튜트(institute)라고 불리는 이곳이 정신병원인지, 학교인지, 수용소인지 모호하다. 원작의 핵심인 두 귀족 가문 간의 대결 구도도 과감히 덜어냈다. 그 자리에는 대신 관리자와 시설에 갇힌 이들 사이의 갈등이 두드러진다.
수용소에 갇힌 '로미오와 줄리엣'… 원작이 희미할 정도의 파격
로미오는 부유하고 아들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로부터 버려진다. 시설에 로미오를 맡기고 떠나는 로미오의 부모는 음식물 쓰레기를 해치우고 자리를 뜨는 사람처럼 찝찝한 표정으로 황급히 떠난다.

줄리엣은 거대한 몸뚱아리에 시꺼먼 옷을 입은 관리인에게 추행당한다. 줄리엣이 거부하며 도망가려고 하지만 관리자라는 권위와 힘으로 압도하고 강제로 줄리엣을 껴안는다. 이 모습을 본 다른 의사와 관리자들조차 못 본채하고 무시한다.

죄수복 같은 하얀색 유니폼을 입은 이들은 관리자들의 호루라기 소리에 박자를 맞춰 획일적인 움직임을 보여준다. 관절을 모두 빳빳이 핀 움직임이 마치 목각 인형을 조정하는 모습이다. 의사들이 주는 약을 먹고 무기력하고 순종적인 몸짓으로 쓰러지기도 한다.

이들은 ‘어른’들이 사라지는 순간 자유로워진다. 유니폼을 벗고 서로를 유혹하며 관능적인 춤을 추기도 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상처로 뻣뻣해진 몸이 서로 만나면서 부드러워지고 힘이 넘친다. ‘가장 긴 키스’라고 불리는 장면에서는 서로를 껴안고, 계단을 오르며, 바닥에 뒹굴고, 난간에 매달리며 쉬지 않고 격정적으로 입을 맞춘다.
수용소에 갇힌 '로미오와 줄리엣'… 원작이 희미할 정도의 파격
이들은 통제와 억압의 상처를 결국 극복하지 못한다. 교도관은 두 동성애자 애인을 희롱하고 괴롭힌다. 이들은 입은 상처로 고통스럽고 폭력적인 몸짓으로 고통을 표현한다. 줄리엣은 학대로 인한 트라우마로 환각을 보고 로미오를 죽인다. 자신이 저지른 일을 깨달은 그는 스스로를 칼로 찌른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피투성이가 된 시체가 돼 나란히 눕는다. 마지막에 함께 누워있는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수미상관을 이뤄 완성도 높은 연출력이 작품의 완성도를 끌어올렸다.

폭력, 정신질환, 동성애, 트라우마 등 민감한 주제 과감하게 그려낸다. 대사가 없는 만큼 그 대상이 누가 될 것인지는 관객에게 달려있다. 동성애자, 청년,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피해자, 여성 등 어떤 형태로든 억압받고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의 모습이 담겨있다.

등장인물들의 고통과 사랑 등 원초적인 감정을 표현한 도발적인 안무도 신선하다. 몸짓만으로도 억압받는 자들의 고통과 자유를 향한 갈망이 전해진다.

도발적이고 과감한 무용극. ‘로미오와 줄리엣’ 원작 희곡이나 무용에 관해 사전지식 없이도 원초적인 몸짓이 이야기를 직관적으로 전달한다. 무용극을 본 경험이 없는 관객에게도 추천할 수 있는 작품.

구교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