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화성 세계유산 옆 테마거리인데…한글간판 보기 어려워
수원시, 간판 교체시 보조금 지원…유인책에도 참여율 저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재와 인접한 테마 거리인데 정작 한글 간판은 찾아볼 수가 없어서 조금 어색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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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어 간판 즐비한 '행리단길'…보조금 지원에도 교체는 '글쎄'
지난 달 주말을 맞아 경기 수원시 팔달구 행궁동에 조성된 카페거리 '행리단길'에 다녀왔다는 전모(31) 씨는 외국어 간판이 생각보다 많아 당황했다며 5일 이같이 말했다.

행리단길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수원화성 성곽 주변의 행궁동, 남수동, 북수동, 신풍동 일대로, 화서공원에서 화성 화홍문에 이르는 600m의 거리를 이르는 명칭이다.

식당, 카페, 액세서리·옷 가게, 공방 등 500곳이 훌쩍 넘는 가게가 늘어선 이곳 일대에는 요즘 외국어만 적혀 있는 간판들이 우후죽순 내걸리는 추세이다.

외국인과 20∼30대 젊은 층의 방문객들을 겨냥해 이국적이고 개성 있는 분위기로 매장을 꾸며놓는 가게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지난 2일 취재진이 장안사거리부터 화서문까지 행리단길을 가로지르는 약 500m 구간의 거리를 확인해본 결과 이 거리에서만 절반에 가까운 40여개 간판이 외국어로만 표기돼있었다.

나머지 절반은 외국어와 한글이 병기돼 있었으며 한글만 적혀 있는 간판은 거의 없었다.

다른 골목 어귀에 자리 잡은 한 중식당은 간판에 영어와 중국어만 적혀 있었고, 일본풍으로 꾸며진 라멘 음식점 또한 간판에 히라가나만 적혀 있어 언뜻 봐서는 상호를 알기가 어려웠다.

미리 가게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지 않은 방문객들은 입간판에 나와 있는 음식 사진이나 내부에서 식사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메뉴를 어림짐작하는 모습이었다.

곳곳에서는 스페인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등 다른 언어로 적힌 간판들도 눈에 들어왔다.

젊은 층의 방문객들 가운데서는 이처럼 이색적인 풍경을 행리단길만의 특색으로 꼽으며 반기는 반응도 많이 나온다.

올해 초 행리단길을 방문한 서울시민 유모(30) 씨는 "문화재와 구도심 주변에 이국적인 거리가 있어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며 "외국어 간판이 많다고는 해도 원래 방문할 가게 정보를 미리 찾아보는 편이라 별다른 어려움은 느끼지 못했다"고 했다.

반면, 세계적인 문화유산인 수원화성과 인접한 테마 거리에서 정작 한글은 찾아보기 어렵다 보니 우리나라만의 정체성과 유서 깊은 정취를 느낄 수는 없어 아쉽다는 목소리도 있다.

이곳을 찾은 한 중년 관광객은 "한국 고유의 문화를 체험하기 위해 수원화성에 온 외국인들이 행리단길에 외국어 간판만 가득한 모습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할지 씁쓸하다"며 "요즘 외국어 간판이 많이 늘어나고 있다고는 하지만, 적어도 문화재 근처에 조성된 테마 거리는 서울 인사동처럼 한국만의 매력을 보여줄 수 있는 방향으로 정비돼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외국어 간판 즐비한 '행리단길'…보조금 지원에도 교체는 '글쎄'
현행법 또한 간판의 문자는 한글로 표기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옥외광고물법 시행령 제12조2항에 따르면 광고물 문자는 원칙적으로 한글맞춤법, 국어의 로마자표기법 및 외래어표기법 등에 맞춰 한글로 표시해야 한다.

외국 문자로 표시할 경우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한글과 병기해야 한다.

다만 옥외광고물법은 건물 4층 이상에 설치되거나 면적이 5㎡ 이상인 간판만을 허가·신고 대상으로 정하고 있어 행리단길에 늘어선 소규모 간판들의 경우 이를 지키지 않아도 처벌할 근거는 없다.

또 상호 자체를 외국어로 등록할 경우 등 현행법상 외국 문자 표기를 허용하는 '특별한 사유'에 해당해 한글과 병기하지 않았음에도 처벌을 피해 가는 사례가 적지 않다.

이에 수원시는 행리단길 일대에서 외국어 간판을 한글 간판으로 교체하는 사업자에게 보조금을 지원하는 유인책을 꺼내 들었으나 참여율은 저조하다.

시는 지난 2월 19일부터 한 달간 행궁동·고등동에서 외국어로만 이뤄진 간판을 한글만 적힌 간판으로 교체하면 사업자당 최대 200만원(교체 비용의 80%)을 보조금으로 지급하는 '아름다운 한글 간판 만들기' 사업 신청자를 모집했다.

그러나 신청자는 한 명도 없었고, 이에 시는 참여 대상을 수원시에 업소를 둔 사업자 전체로 확대해 지난 달 1일부터 한 달간 해당 사업을 다시 추진했다.

외국어와 한글을 병기하는 방식으로도 간판을 교체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참여 조건을 완화해 20곳 내외를 모집하고자 했지만, 이번에도 신청한 사업자는 9명뿐이었다.

수원시 관계자는 "사업에 대해 문의하는 연락이 꽤 이어지기는 했지만, 실제 교체 의사를 밝힌 경우는 많지 않았다"며 "사업자 입장에서는 손님의 취향에 맞춰 매장을 꾸미는 것이 중요하다 보니 간판에 한글을 넣는 것을 다소 기피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이어 "시는 앞으로도 행리단길 상인들과 지속해서 소통하며 한글 간판을 늘리기 위한 대안을 모색할 방침"이라고 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