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제약·바이오 기업에 태풍급 ‘인적 쇄신’ 바람이 불고 있다. 시장 한파에 고금리 장기화까지 맞물린 업계가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조치다. 더 이상 투자 유치에만 의존할 수 없는 상황인 만큼 내부 의사결정 구조에 큰 변화를 줘, 발 빠른 위기 대응이 가능하게 한 것이다. 미국 식품의약국(FDA) 출신 허가 전문가를 영입하거나 최고경영자(CEO)를 교체하고 사업 방향까지 트는 등 생존을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K바이오 '쇄신 돌입'…18개社 대표 변경

‘넥스트 스텝’ 딛는 K바이오

21일 제약·바이오업계에 따르면 암 초기 진단 전문기업 아이엠비디엑스는 이달 김태유·문성태 공동대표 체제에서 김태유 단독대표 체제로 변경했다. 지난 3일 상장 이후 본격적으로 실적을 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문 대표는 영업을 전담하기로 했다는 설명이다. 코로나19 엔데믹 이후 실적 개선이 시급한 진단기업 씨젠은 창업자 천종윤 단독대표 체제에서 공동대표 체제로 바뀌었다. 2000년 설립 이후 첫 지배구조 변화다. 천 대표는 미래 먹거리 사업에 ‘올인’하고 이대훈 신임 대표는 기존 진단사업의 활로를 모색할 예정이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지난 3월부터 이날까지 한 달 반 동안 ‘대표이사 변경’ 공시를 올린 국내 바이오 기업만 18곳에 달한다. 업계에서는 악화한 투자 심리와 자금 경색에 처한 바이오업계가 인적 쇄신으로 분위기 반전을 시도하고 있다는 분석을 내놨다. 신약 후보물질(파이프라인) 개발에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하던 항암제 개발 기업 네오이뮨텍은 FDA에서 허가 업무를 맡았던 오윤석 씨를 신임 대표로 선임했다. 신약 개발 이후 미국 시장 출시와 안정적인 매출 증가까지 염두에 둔 결정이었다는 분석이 많다.

신약 개발의 핵심인 연구개발(R&D) 역량을 끌어올리기 위해 연구소장을 교체한 곳도 적지 않다. 와이바이오로직스는 지난달 면역학 전문가인 윤주한 박사를 신임 연구소장으로 영입했고 같은 달 지씨셀은 원성용 신임 세포치료연구소장을 선임하며 R&D 체질 개선에 나섰다.

“성과로 투자 유치” 고군분투

제약·바이오 기업들이 전략적 변화에 나선 것은 역대급 투자 혹한기와 맞물려 있다. 수년간 자체 매출 없이 R&D를 이어가야 하는 바이오 기업들에 외부 자금 수혈은 필수다. 신약 하나를 개발하는 데 평균 10년 이상 걸리고 1조원가량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해 벤처캐피털(VC) 신규 투자액은 2021년 대비 반토막 났다. 여기에 기술특례로 상장한 바이오 기업이 계속 감소하며 투자 회수가 어려워지자 VC 투자는 더욱 위축됐다. 한 13년차 바이오 기업 대표는 “이제는 전략적 투자자(SI)를 확보해야만 VC가 투자를 검토하는 수준”이라고 했다.

외부 투자 환경 개선을 마냥 기다릴 수 없는 바이오업계로선 R&D·상업화에 더욱 공을 들이거나 아예 사업 방향을 전환하기도 했다. 면역치료제 개발 기업인 비엘은 앞으로 신약 개발보다는 건강기능식품, 디지털 헬스케어 사업 확장에 무게중심을 둘 예정이다. 현금창출원(캐시카우) 확보에 나선 것이다. 분자진단 기업 젠큐릭스는 투자사 엔젠바이오 지분 전량을 매각하면서 포트폴리오를 재편하고 미국 유럽 등 해외 진출에 집중하기로 했다. 바이오업계 관계자는 “바이오 투자심리가 저점을 찍고 회복되는 단계”라며 “전략적인 변화를 거치며 시장을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남정민 기자 peux@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