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베네치아 본섬 끝 자르디니 정원. 세계 최대·최고의 현대미술 축제인 베네치아 비엔날레 미술전이 60번째의 문을 열었다.

공식 개막을 나흘 앞두고 VIP 사전공개가 시작된 이날 아침부터 산 마르코 광장 앞부터 본 행사가 열리는 아르세날레, 자르디니 정원까지 '미술 올림픽'을 보기 위해 전 세계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이날 아드리아해에서 갑자기 몰아친 돌풍과 폭우가 쏟아졌지만, 330여 명(팀)가 참여한 베네치아 전역의 전시관들은 막바지 작품 설치와 관람객을 맞이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베네치아 비엔날레 본전시관 전경 /베네치아=안시욱 기자
베네치아 비엔날레 본전시관 전경 /베네치아=안시욱 기자
그 해의 주제에 맞는 전 세계 작가들의 작품을 선보이는 자르디니 공식 주제관(본전시장) 외관은 아마존의 원주민 미술집단 MAKHU가 그린 알록달록한 문양들로 뒤덮였다. 6명의 '마쿠모비멘토' 그룹은 페루와 브라진 사이 아마존 지역에 거주하는 후니 쿠인족 예술가 집단. 부족의 의식에서 영감을 받은 신성한 동물과 자연의 상징물들을 외벽 700㎡(약 200평)에 달하는 벽면을 가득 채웠다.

1895년 시작해 2년마다 열리는 베네치아 비엔날레 미술전의 올해 주제는 '외국인은 어디에나 있다 (Foreigners Everywhere)'. 이민자, 여성 등 사회적 약자에 주목해온 작가 집단 '클레어 퐁텐'이 2004년부터 '외국인은 어디에나 있다'라는 의미의 네온사인을 여러 언어로 번역해 배치한 시리즈에서 따왔다. 2000년대 초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인종차별과 외국인 혐오에 맞서 싸웠던 한 단체의 이름이기도 하다.

아마존 원주민 예술집단이 본전시장의 파사드를 장식한 것도 이와 맞닿아 있다. 미술전 역사상 첫 남미 출신 예술감독인 아드리아노 페드로사는 “외국인, 이민자, 망명자, 디아스포라, 추방자, 난민 작가들에 초점을 맞출 것”이라며 “퀴어 작가, 미술계의 변방에 있는 아웃사이더 작가, 선주민 예술가 등의 작업도 주요 관심사”라고 했다.

○아시아·동성애·여성…역사 속 '비주류' 재조명

올해 약 30개의 공식 행사 중 3분의 1은 아시아와 관련이 있다. 대만 예술가 위안광 밍, 홍콩 트레버 응, 마카오 웡웽청, 중국 쩡판츠 정기 전시 외에도 방콕 아트 비엔날레 재단과 원 방콕(One Bangkok)이 공동 주최하는 행사, 박서보 하인두 고영훈 정혜련 등 한국 대표 작가의 작품을 전시하는 '한국 현대미술의 정수'도 본전시관 바로 옆에서 개최한다.
베네치아 비엔날레 본전시장에 걸린 김윤신 작가의 '합이합일 분이분일' 연작을 17일(현지시간) 관람객들이 감상하고 있다. /베네치아=김보라 기자
베네치아 비엔날레 본전시장에 걸린 김윤신 작가의 '합이합일 분이분일' 연작을 17일(현지시간) 관람객들이 감상하고 있다. /베네치아=김보라 기자
332명(팀)이 초대된 본전시에 한국 작가로는 여성 조각가 김윤신(89)과 이강승(46)이 참여했다. 작고한 화가 이쾌대(1913∼1965)와 장우성(1912∼2005) 작품도 본전시에서 소개됐다. 회화 중심의 본전시에서 김윤신의 돌, 나무 조각들은 첫날 전시장을 찾은 사람들의 발길을 오래 머무르게 했다. 본전시에 초청된 김윤신은 한국 1세대 여성 조각가로, 1984년 아르헨티나로 이주해 40여년간 아르헨티나에서 거주하며 남미를 주요 기반으로 활동했다.

한국과 미국 로스앤젤레스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이강승은 서구(1세계)·백인·남성·이성애 중심의 주류 서사에서 배제되거나 잊힌 소수자의 존재를 발굴해 이를 상징물들로 만든 설치 작품들을 선보였는데, 작가가 직접 본 전시장에서 관람객들의 쏟아지는 질문에 응대하며 관심을 끌었다.

○국가관 메운 다국적 작가들

국가관 전시에는 처음 참가하는 베넹과 에티오피아, 동티모르, 탄자니아 등 4개국을 포함해 88개국이 참여한다. 한국은 구정아 작가의 개인전 '오도라마 시티'를 선보였다. 공중부양하는 입체 조각을 전시장에 띄워 공간마다 각각 다른 향을 채웠다. 구정아는 지난해 6∼9월 입양아, 실향민 등을 대상으로 한국의 도시·고향에 얽힌 향 이야기 600여편을 수집한 뒤 25명의 기억을 선정하고 향수업체 논픽션과 협업해 개발한 17개 향을 전시장에 도포했다.

영국관은 30년 넘게 난민과 이주민들에 주목해온 예술가 존 아콤프라의 작품들로 '밤새도록 빗소리를 듣다'를, 미국관은 미시시피 체로키 화가이자 조각가인 제프리 깁슨의 강렬한 조각과 영상, 부조 작품들로 전시장을 가득 메웠다.

베네치아 곳곳에서는 베네치아비엔날레 재단의 공식 승인을 받은 병행 전시도 30건 열린다. 이 중에는 한국 작가를 소개하는 전시 4건도 포함됐다.한국 추상의 선구자인 유영국(1916∼2002)의 첫 유럽 개인전과 올해 창설 30주년을 맞는 광주비엔날레의 아카이브 특별전 '마당', 프랑스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여성 추상미술작가 이성자(1918∼2009)의 개인전, '숯의 작가' 이배의 개인전이 병행 전시로 열린다.



한국관 전시와는 별도로 한국관 건립 3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전도 열린다. 12세기 건축물인 몰타기사단 수도원에서 열리는 한국관 30주년 특별전 '모든 섬은 산이다'에서는 1995년 첫 한국관 전시 참여 작가부터 2022년 참여 작가까지 36명(팀)의 당시 전시작과 전시작을 재제작한 작품, 전시작을 바탕으로 한 신작 등을 소개한다. 이밖에 독자적인 '매듭 페인팅'을 창안해 활동한 작가 신성희(1948∼2009)와 실험미술 선구자 이승택(92)의 전시도 열린다.

○무장 군인만…끝내 문 못연 이스라엘관

올해 제 60회 베네치아 비엔날레는 정치적으로 전 세계가 혼란한 상황에서 벌어져 예기치 못한 논란도 많았다. 우크라이나 전쟁 중인 러시아는 2022년에 이어 2회 연속 비엔날레에 불참했다. 러시아 국가관은 정치적으로 러시아와 동반자적 신뢰 관계에 있는 볼리비아가 임대해 작품을 건다. 16일 볼리비아 국가관 입구에는 "예술과 문화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인간으로 남을 수 있는 길을 알려준다. 우리는 어딘가의 이방인이고, 그러므로 모두가 같다"는 쪽지가 걸려있었다.
17일(현지시간) 굳게 닫힌 베네치아 비엔날레 이스라엘관 주위로 무장한 군인들이 서있다. /베네치아=김보라 기자
17일(현지시간) 굳게 닫힌 베네치아 비엔날레 이스라엘관 주위로 무장한 군인들이 서있다. /베네치아=김보라 기자
논란 끝에 참가한 이스라엘 국가관은 결국 문을 열지 못했다. 이스라엘 대표 작가 루스 파티르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 휴전과 인질 석방 협정 전까지 전시를 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사전공개 첫날 무장한 군인들 3~4명이 지키고 있는 전시장에는 "공습을 멈추고 안정화될 때까지 전시를 중단한다"는 문구가 걸렸다.

이외에도 극우 성향 언론인 출신인 티에트란젤로 부타포오코가 베네치아비엔날레 재단 의장으로 지난 3월 공식 선임된 것도 이탈리아 내부에선 반발이 크다. 작년 8월 총선에서 극우 정당 이탈리아 형제들이 승리한 뒤 정치색이 짙은 인물이 행사 총지휘권을 갖게 된 탓이다. 미술계에선 "반(反)난민 정책을 표방하는 보수 정당이 임명한 인사가 주도하는 비엔날레에서 '외국인은 어디에나 있다'는 슬로건을 부르짖는 건 난센스"라며 논란이 불거졌다.

올해 베네치아 비엔날레 미술전은 4월 20일부터 11월 24일까지 열린다. 공식 개막일인 20일에는 황금사자상 국가관상·최고작가상, 본전시에 초대된 35세 이하 젊은 작가를 대상으로 하는 은사자상, 국가관·본전시 특별언급상 수상자가 발표된다.

베네치아=김보라/안시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