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 작가가 자신의 작품 세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작가 제공
김성호 작가가 자신의 작품 세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작가 제공
장지 화폭 전체에 검정 물감을 먼저 칠했다. 그 위에 흰색 물감으로 식탁보를, 붉은색 물감으로 컵을 그렸다. 식탁보의 주름 부분에는 흰색 물감을 덜 올려서 아래에 깔린 검은색이 얼핏설핏 위로 비쳐보이게 만들었다. 컵 표면 위를 도구로 긁어내 컵에 드리운 그림자를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자 아래에 깔린 검은색이 화폭 전체에 걸쳐 은은하게 위로 올라오며 색감의 깊이를 더했다. 김성호 작가(45)의 '아크릴 수묵화'에 대한 설명이다.

아크릴 수묵화는 김 작가가 직접 고안한 그림 기법이다. 그는 이 기법으로 그릇, 과일, 가구 등 정물화를 주로 그린다. 사물을 그릴 때 그는 사전에 화폭 아래에 깐 검은색이 그 사물의 외곽을 따라 위로 비쳐 보이도록 한다. 사물을 먼저 그리고 난 뒤 외곽선을 그리는 통상적인 방식과 다르다. 김 작가는 "아크릴 수묵화에서 외곽선은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내면서도 화폭 전체와 자연스럽게 어울린다"고 했다.

아크릴 수묵화에는 '시간을 되깊어가는 그림'이라는 의미도 담았다는 게 김 작가의 설명이다. 일반적으로는 그림을 그릴 때 사물의 색을 칠하고 난 뒤 그 사물의 외곽선을 그리지만, 아크릴 수묵화는 이와 반대로 외곽선을 깔고 그 위에 색을 올리기 때문이다. 김 작가가 작품에 이런 의미를 담는 건 그가 전업 작가 생활을 하게 된 과정이 순탄치 않았던 것과 연관 있다.

김 작가는 중앙대 한국화학과를 졸업한 뒤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미술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대학원 졸업 뒤 바로 전업 작가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림은 잘 팔리지 않았고, 그는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작업실 임대료를 1년 가까이 내지 못한 적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작업실에서 서러움에 북받쳐 왈칵 눈물을 쏟았다. 그는 그 길로 작가의 길을 포기하고 다른 생업에 종사했다. 하지만 그의 재능을 눈여겨 본 중앙대 김선두 교수, 이길우 교수가 그를 단체전 등에 데리고 나가며 붙잡았다. 결국 그는 5년여의 방황을 끝내고 작가의 길로 돌아왔다. 미술에 대한 깊은 애정이 그를 다시 화폭 앞으로 이끌었다.

김 작가는 "내가 지금의 '나'로 존재할 수 있는 건 그동안 거쳐온 이런 고난의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시간을 되짚어가는 그림'을 통해 지나온 세월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림을 그리는 김성호 작가. 작가 제공
그림을 그리는 김성호 작가. 작가 제공
김 작가의 작업실은 번잡한 서울 도심의 지하철 역 근처에 있다. 그는 대학 강의 등을 마치고 가로등이 켜질 때쯤 작업실에 와 보통 새벽까지 그림을 그린다. 밤이 깊어 눈이 떠지지 않을 정도로 피곤하면 그제서야 집으로 돌아간다. 김 작가는 "5년 동안 작업을 쉬었던 것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하고 힘들어도 이겨낼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런 노력 덕택에 최근 미술계에서 그의 인지도가 높아지고 있다. 김 작가의 작품 '새벽나무'는 2018년 '서리풀 ART for ART 대상전'에서 대상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당시 심사위원장이었던 윤진섭 미술평론가는 이 수상작에 대해 "재료를 다루는 기술과 형상화에 따른 탁월한 조형감각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오는 25~28일에는 서울 서초구 한가람미술관(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브리즈아트페어에 참가하고, 오는 6월에는 수원컨벤션센터에서 열리는 화랑미술제에 나간다.

김 작가는 "최근에는 팬층도 늘고 있어 더 힘을 내 작업에 매진할 생각"이라며 "마냥 유행을 타기보다는 100년 뒤에 봐도 여전히 좋을 작품을 그리고 싶다"고 말했다.

양병훈 기자 h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