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은 땅에 쓰는 한편의 詩"…지난 50년간 진행한 조경 프로젝트 전시
대전엑스포부터 경춘선 숲길까지…1세대 여성 조경가 정영선展
여의도 샛강 생태공원과 경춘선 숲길, 서울아산병원 앞 녹지공간, 아시아선수촌 아파트 조경 등 우리 곁의 녹색 풍경은 모두 한 사람의 손을 거쳤다.

국내 1세대 조경가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국토개발기술사인 정영선(83)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지난 50년간 그의 작업을 되돌아보는 전시가 5일부터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열린다.

전시 개막에 앞서 4일 언론과 만난 그는 "조경은 그저 건축 뒤에 있는 분야로만 알려져 왔다"며 "선배인 제가 조경을 주제로 전시해야 후학에 길이 마련되고, 우리 분야도 더 알려지겠다고 생각해 기꺼이 (전시에) 응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조경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희미하던 1960년대부터 이 분야에 뛰어들어 최초 기록을 써내려 왔다.

1961년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울대 농과대학에 입학했고, 1973년 서울대 환경대학원이 생기자 1회 신입생으로 등록했다.

뒤이어 1980년 국내에서 여성으로는 최초로 국토개발기술사 자격까지 취득했다.

대전엑스포부터 경춘선 숲길까지…1세대 여성 조경가 정영선展
여성 기업인이 드물던 1987년 조경설계업체 서안을 설립했고, 지금까지 약 40년 동안 조경가로 활발하게 활동해왔다.

그는 "어릴 적부터 식물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고, 아버지와 함께 정원도 만들곤 했었다"며 "환경대학원에 가보니 건축이나 토목, 도시계획 하던 사람들은 조경을 잘 모르고, 농학과에서 온 동료들도 경험이 적다 보니 제가 큰소리를 많이 칠 수 있었다"고 웃으며 회고했다.

지금 우리가 떠올리는 현대 한국의 풍경은 대부분 정 조경가의 작품이다.

1980년대부터 아시아선수촌 아파트와 아시아 공원, 서울 예술의전당, 올림픽선수촌 아파트, 대전 엑스포 박람회장, 인천국제공항 여객터미널, 한국종합무역센터(현 코엑스)의 조경을 설계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여의도샛강생태공원, 경춘선 숲길, 서울식물원, 선유도공원은 물론 양재천과 석파정 복원, 탑골공원 재조성(2001년)과 광화문광장 설계(2007년)도 맡았다.

그는 "우리나라에 조경이라는 분야가 들어오게 된 계기가 특이하다"며 "엑스포와 같이 외국에 한국을 알리는 행사를 할 때 국가가 나서면서 조경이라는 분야가 커지게 됐다"고 설명했다.

대전엑스포부터 경춘선 숲길까지…1세대 여성 조경가 정영선展
1990년대 중반까지는 주로 아시안게임, 올림픽, 엑스포 등 국제행사를 계기로 한국의 발전한 도시 경관을 외부에 보여주기 위한 공공사업에 참여했다면, 9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호암미술관 희원을 시작으로 전통 정원의 아름다움과 한국 자생종 식물을 활용한 다양한 프로젝트를 선보이고 있다.

그는 한국 전통식 조경이 가진 매력을 설명하며 "조경이라는 개념이 서구에서 온 것은 아니다.

백제 때부터 '검이불루 화이불치'(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나 사치스럽지 않다)가 우리 전통 정원의 근본이 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궁궐이나 사찰에서 찾아볼 수 있는 화계(꽃계단), 주변의 풍경을 잘 즐길 수 있는 낮은 담과 정자 등이 한국식 조경의 특징이라고 했다.

전시 소개 글에서 "조경은 땅에 쓰는 한 편의 시가 될 수 있고, 깊은 울림을 줄 수 있다"고 쓴 그는 평소에도 시에서 조경 설계 영감을 받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그는 "'장날 머리에 시금치를 이고 가는 여인' 이런 시구를 보고 움직이는 정원을 떠올리는 식으로 (조경 설계를 할 때) 시에서 대부분 영감을 얻는다"며 "박목월 선생님하고도 알고 지냈는데, 지금의 저를 만들어준 분"이라고 소개했다.

대전엑스포부터 경춘선 숲길까지…1세대 여성 조경가 정영선展
이번 전시에서는 정 조경가의 작업 300여개 가운데 대표성이 있는 60여개를 선별해 소개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이번 전시를 계기로 국립현대미술관에 직접 만든 신작 정원 2개다.

미술관 중정 '전시마당 정원'에는 미나리아재비, 진달래 등 한국 자생식물을 심어 관람객이 정원을 거닐고, 조경의 아름다움을 오감으로 체험할 수 있도록 했다.

미술관 뒷마당인 '종친부 마당'은 전통정원의 특징인 화계(꽃계단)를 재해석해 배치했다.

인왕산의 풍경을 즐길 수 있도록 비움의 미학을 보여주는 정원이기도 하다.

두 정원은 3년간 유지할 예정이다.

실내 전시장에서는 트레이싱 종이 위에 유성펜으로 일일이 그린 대전 엑스포 박람회장 스케치부터 선유도 공원 조경 모형, 어디에 어떤 식물을 심어야 하는지 상세히 기재된 식재 계획도 등을 볼 수 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중앙에는 마치 전통 정원 속 정방형 연못처럼 투명한 바닥 아래 조경 설계 프로젝트 자료가 배치돼 관람객이 자유롭게 앉아서 감상하도록 했다.

전시장 벽면에는 조경이 완성된 모습을 찍은 사진을 이 콜라주처럼 배치했고,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조경의 모습을 담은 영상도 선보인다.

김성희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정영선 선생님은 기후 위기에 따른 지속 가능한 미래 조성이 화두인 이 시대에 더 없이 시의성 있는 작가"라며 "그의 조경 철학을 깊이 있게 만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 조경가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 '땅에 쓰는 시'도 이달 17일 개봉한다.

전시와 함께 영화 제작을 기획한 것은 아니지만,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정 조경가를 조명하게 됐다.

다음 달 17일 국립현대미술관 영상관에서는 이 다큐멘터리 상영과 함께 영화를 만든 정다운 감독과의 대화를 진행한다.

전시는 이달 5일부터 9월 22일까지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