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번대 시집 '시의 말' 엮은 '시는 나를 끌고 당신에게로 간다' 출간
1978년 황동규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이후 46년만
'한국시집의 상징' 문지 시인선 600호…"우리의 정체성은 사랑"
한국 시인선의 양대 산맥으로 꼽히는 문학과지성 시인선이 통권 600호를 맞았다.

1978년 첫 시인선을 펴낸 이후 46년 만이다.

문학과지성사는 3일 시인선 600호 책인 '시는 나를 끌고 당신에게로 간다'를 출간했다고 밝혔다.

문학과지성(문지) 시인선은 최근 500호를 맞은 '창비 시인선'과 함께 한국 현대문학의 양대 시인선으로 불리는 국내의 대표 시집 시리즈다.

직사각형의 표지 안에 또다른 직사각 프레임을 넣고 그 안 아래쪽에 시인의 초상 캐리커처를 넣은 문지 시인선의 표지 디자인은 거의 반세기 동안 한국 시집의 상징과도 같은 위상을 차지해왔다.

600호 책 '시는 나를 끌고 당신에게로 간다'는 501번 시집인 이원의 '사랑은 탄생하라'에서부터 599번 이장욱의 '음악집'에 이르기까지 시집의 뒷표지에 각 시인이 쓴 글 99편을 엮은 선집이다.

뒷표지 글은 문지 시인선의 독특한 정체성을 이루는 부분으로 국내외의 다른 어떤 시인선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형태의 글이다.

보통 시집이나 소설 등 문학책의 뒷표지글이 외부인사의 추천이나 책의 주요 부분 발췌 또는 작가의 약력에 관한 정보를 수록하는 데 비해 문지는 시인이 독자들에게 따로 전하는 말을 시인선의 첫 권째 권인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황동규)부터 지금까지 수록해왔다.

문지 측은 뒷표지를 뜻하는 '표4'라는 용어를 써 내부적으로 '표사글'이라는 표현을 써왔지만, 시인선 501번 시집을 쓴 이원 시인은 계간 '문학과사회' 2024년 봄호에서 이 글을 "시의 말"이라고 명명해 그렇게 부르기로 했다고 한다.

최근 미국의 권위 있는 출판상인 미국 전미도서비평가협회(NBCC)상 시 부문을 수상한 김혜순 시인은 문지 시인선 567번 시집인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의 시의 말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면,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나 부사, 접속사의 상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명사나 대명사에 달라붙지 않게 된 그들의 무한한 자유, 그들의 합종연횡, 내게서 떠난 이들도 형용사나 부사, 접속사의 모습으로 지금의 나를 감싸고 있다고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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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집의 상징' 문지 시인선 600호…"우리의 정체성은 사랑"
그런가 하면 1978년 시인선 1번의 주인공인 황동규 시인은 시집 '오늘 하루만이라도'(시인선 548번)의 뒤표지 글에서 노년의 복잡한 심경을 이렇게 적었다.

"살면서 힘들었던 일들, 특히 이즈음 몸이 속을 바꾸며 도드라지게 드러나는 일들을 시로 변형시켜 가지고 가고 싶다.

가지고 가다니, 어디로? 그런 생각은 지난날의 욕심이 아닌가? 그래? 그렇다면 못 가지고 가는 시를 쓰자."
500번대 문지 시인선의 가장 큰 특징으로 이광호 문학과지성사 대표(문학평론가)는 "젊은 여성시인들의 엄청난 약진"을 꼽았다.

1988년생 이린아 시인을 비롯해 김리윤, 백은선, 박세미, 강혜빈, 변혜지 등 젊은 여성 시인들이 새로운 감성의 시집들로 문지 시인선 500번대에 포진했다.

이 대표는 "1970년대에는 (남녀 시인 비율이) 8대 1이었는데, 2010년대 1.7대 1을 거쳐 2020년대 이후로는 여성 시인이 35명, 남성 24명으로 역전이 일어났다"면서 500번대 시인들을 확인해보면 남녀 비율이 거의 비슷하다"고 전했다.

이런 '시의 말'들을 엮은 문지 시인선 600호의 제목 '시는 나를 끌고 당신에게로 간다'는 고(故) 허수경 시인이 2005년 펴낸 시집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의 뒤표지 글 중 "말은 나를 데리고 어디로 가고 말은 나를 끌고 당신에게로 가곤 했다"는 문장에서 착안해 지었다.

46년간 이어져 내려온 문지 시인선만의 개성과 색깔은 무엇일까.

이광호 대표는 시인선 1번인 황동규의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를 예로 들어 설명했다.

"그 시집은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에 대한 질문, 확신하지 못하는 시적 자아에 대한 질문으로 메워져 있습니다.

사랑은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고, 타자에게 자기를 개방하는 사건이죠. 그런 의미에서 문지 시인선의 정체성은 그런 사랑과 연결돼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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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집의 상징' 문지 시인선 600호…"우리의 정체성은 사랑"
이 대표는 2019년 문지 시인선으로 출간된 김혜순 시인의 '날개 환상통'이 최근 전미도서비평가협회(NBCC)상 시 부문을 받은 일 등을 들며 "문지 시인선이 동시대의 세계독자를 갖게 됐다"고 자평했다.

문지 시인선 중 해외로 번역된 시인은 32명, 번역시집은 86권가량이다.

이 대표는 "한국어라는 변방의 언어에 번역이 어려운 시의 특성상 (시집의 해외 출간에) 기본적 제약에도 80권 넘는 문지 시인선이 번역됐다는 건 놀라운 사건"이라면서 "김혜순 시인의 사례에서 보듯 문지 시인선은 이제 동시대 세계독자들과 함께 읽는 책이 됐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다"고 했다.

문학과지성사는 시인선 600호 간을 기념해 오는 19~20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의 카페 어피스오브에서 팝업 스토어를 열고 문인과 독자들이 함께 이어가는 600분 릴레이 낭독회를 열 계획이다.

이광호 대표는 "항상 새로운 독자들과 만나려는 시도를 적극적으로 하고 있다"면서 "5~6월에는 저희 사옥(서울 마포구) 지하에서 북 살롱도 열 계획"이라고 말했다.

'한국시집의 상징' 문지 시인선 600호…"우리의 정체성은 사랑"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