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뭐가 잘못된 것일까. 어느 정도 오래 산 사람이라면 이런 의문을 품는다. 1990년대에 공산권 국가들이 무너졌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체제 경쟁에서 승리했다. 세계는 이 체제에서 번영과 평화를 누릴 것처럼 보였다.20~30년이 지난 지금 그런 희망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기성 체제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고, 한물간 줄 알았던 권위주의적 통치가 세계 곳곳에서 힘을 얻고 있다. 100여 년 전 세상을 파국으로 몬 혼란을 다시 마주하게 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세계의 석학과 전략가들이 이 문제를 놓고 고민하는 가운데 마틴 울프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 수석경제평론가가 <민주주의적 자본주의의 위기>란 책을 내고 논쟁에 뛰어들었다. 울프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경제 칼럼니스트다. 그의 글을 읽기 위해 FT를 구독한다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옥스퍼드대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받은 그는 세계은행 등을 거쳐 1987년 FT에 합류했다. 1996년부터 수석경제평론가로 글을 써왔다.울프는 1946년생으로 올해 77세다. 그는 온 힘을 다해 이 위기를 벗어날 방안을 궁리했고 그 방법을 책에 썼다. 한 문제를 깊게 파고드는 학자가 아닌 까닭에 독창성은 떨어진다. 대신 여러 자료를 열린 마음으로 읽고 사려 깊게 생각하는 자신의 장점을 발휘해 다양한 해법을 하나하나 검토해 나간다.그는 서구 사회가 채택한 체제를 ‘민주주의적 자본주의’라고 부른다. 20세기 중후반부터 평화와 번영을 이뤄낸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결합이다. 대런 애쓰모글루가 <좁은 회랑>에서 다룬 것처럼 둘의 결합은 ‘힘겨운 결혼 생활’이다. 정치(민주주의)와 시장(자본주의)의 미묘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균형이 무너진 원인에 대한 울프의 분석은 정통적이다. 삐딱하게 보면 다 아는 얘기일 수 있다는 뜻이다. 그는 근본 원인을 ‘중산층의 공동화’ 현상에서 찾는다. 즉 불평등의 증가다. 약 2500년 전 아리스토텔레스가 입헌 민주주의의 핵심 구성원이 중산층이라고 한 것처럼, 소득 분배 중간 수준에 있는 사람들의 사회·경제적 지위 하락은 정치 시스템을 불안정하게 만들었다고 설명한다. 울프는 지대 추구 자본주의와 포퓰리즘의 부상도 심각한 위협 요인으로 꼽는다.책의 3부에서 다루는 해법이 더 눈길을 끈다. 그는 혁명이 아니라 개혁을 선호한다. 자본주의가 문제가 많기는 하지만 고쳐야 할 대상이지 뒤엎고 다른 것으로 갈아 끼워야 할 대상은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요구되던 것처럼 자본주의 경제의 좋은 점을 보존하고 나쁜 점은 개선하는, 근본적이면서 용기 있는 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른바 ‘뉴’ 뉴딜이다.정부는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대신 영리하게 움직여야 한다. 예컨대 민간 투자를 촉진하기 위해 고정자본투자에 대해 100% 비용 처리를 허용하거나 기업 소득 대비 고정자본투자에 대해 100% 세액 공제를 허용하는 방안이 있다고 책은 소개한다. 일자리 정책과 관련해선 ‘보편적 일자리 보장’을 고려해볼 만하다고 말한다. 일하고 싶은 사람 누구에게나 공공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대신 근로의 대가는 최저임금으로 지급한다. 실업수당은 장애 등으로 일할 수 없는 사람에게만 준다. 정부가 화폐를 발행해 재원을 조달하는 현대적 통화이론(MMT)과 보편적 기본소득에는 반대 의견을 나타냈다.저자가 또 하나 강조하는 것은 ‘엘리트의 역할’이다. “엘리트 없는 복잡한 사회는 상상할 수 없다. 하지만 약탈적이고 근시안적이며 부도덕한 엘리트들이 지배하는 사회 역시 현실적으로 언제나 가능하다. 민주공화국에 그런 엘리트들이 등장하면 공화국은 붕괴할 것이다.” 울프는 “능력주의를 대체할 대안은 없다”면서도 “능력주의 엘리트들은 자신의 능력과 보상받을 자격을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지적 자질에 대한 무조건적인 존경, 그렇지 않은 사람에 대한 경멸 또한 위험한 것”이라고도 했다.한 번에 쉽게 읽을 만한 책은 아니다. 여러 내용이 응축돼 있으며 시간을 두고 곰곰이 생각해볼 만하다. 좋은 정책 대안을 담았지만 현재의 흐름을 되돌릴 수 있을지에 대해선 의문이 든다. 오랜 평화가 혼란을 낳는다는 말이 있듯 인간은 옛 교훈을 망각하기 마련이고 평화기에는 다들 기득권을 놓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
로널드는 갑작스러운 뇌졸중을 겪은 뒤 물건의 사용법을 잊어버렸다. 포크, 숟가락, 칫솔, 손톱깎이, 드라이버가 무엇인지 알았지만 어떻게 사용하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식사 시에 칫솔을 주자 칫솔을 숟가락처럼 사용했다. 개념실행증이었다. 환자가 도구 등의 사물을 활용해 임무를 완수하는 방법에 대한 개념적 이해를 하지 못하는 증상이다.실행증은 여러 종류로 나타난다. 눈을 뜨는 데 필요한 근육은 정상이나 눈을 잘 못 뜨는 눈꺼풀실행증, 옷을 못 입는 착의실행증, 동작을 못 만들어내는 관념운동실행증 등이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 신경과학 교수인 저자는 이 책에서 뇌가 오작동하는 다양하고 신기한 사례를 보여준다. 이를 통해 우리가 당연히 여기는 현실이 얼마나 깨지기 쉬운지 보여준다.어떤 환자는 멀쩡히 살아 있는데도 자기가 죽었다며 장례를 치러달라고 하거나, 자기 몸이 부패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코타르증후군이라 불리는 이 증상은 뇌의 논리성을 담당하는 부분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경우 발생한다. 또 다른 망상증인 카그라스증후군 환자는 가족을 보고 진짜 가족은 사라지고 가짜가 그 자리에 있다고 믿는다. 자신의 진짜 딸은 납치됐고 사기꾼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믿는다. 일부 환자는 온 세계가 사기꾼으로 뒤덮였다고 생각한다.뇌의 오작동이 새로운 능력을 발현시키는 일도 있다. 데릭은 수영장에서 심한 뇌진탕을 당한 뒤 새로운 재능이 생겨났다. 평생 피아노를 배워본 적이 없었지만, 갑자기 피아노를 치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다. 그가 피아노를 치기 시작하자 마치 피아니스트가 연주하듯이 손가락이 건반 위를 춤췄다.이 밖에 13년 동안 자신을 고양이라고 믿고 살아온 데이비드, 17개의 자아와 함께 사는 캐런, 에펠탑을 너무 사랑해 에펠탑과 결혼하고 이름까지 바꾼 에리카, 오른손이 제멋대로 행동하는 레오 등 이상한 행동을 보이는 환자의 사례를 저자는 소개한다.저자는 인간은 모두 불완전하며, 오히려 행복하고 온전한 정신을 갖는 게 어렵다는 것을 인정하라고 주문한다. 이런 현실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사회 전체의 정신 건강을 개선하는 데 더 도움이 될 것이라는 얘기다.최종석 기자 ellisica@hankyung.com
“청바지는 왜 하필 블루인가요?”패션 디자이너 출신으로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옷을 입다 패션을 만들다> 저자 정연이는 수업 시간에 이런 질문을 받았다. 청바지가 광부의 작업복으로 사용된 데님 원단에서 출발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것을 왜 파란색 염료로 물들였는지는 굳이 궁금해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이 책은 청바지를 비롯해 줄무늬 티셔츠, 검은색 미니드레스, 밀리터리룩 등 일상적으로 자리잡은 패션의 역사에 대해 저자가 공부한 결과물이다. 청바지의 ‘블루’가 인기를 끈 건 1774년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출간되고부터다. 소설이 흥행하자 베르테르가 입은 것으로 묘사된 파란색 프록코트도 젊은이들 사이에서 대유행했다. 여성들은 베르테르가 사랑한 샤를로테처럼 파랑과 하양이 섞인 드레스를 입었다. 여기에 프랑스 혁명을 계기로 파란색은 자유라는 상징을 획득했다. 청색은 곧 시민들이 사랑하는 색깔이 됐다.파란색은 긍정적인 상징을 담고 있을 뿐 아니라 실용적으로도 청바지에 적합한 색이다. 데님 원단은 너무 두꺼워 완벽하게 염색하기가 어렵고, 따라서 입을수록 색이 바래는 현상이 발생했다. 물 빠진 파란색은 자연스럽고 검소한 이미지를 준다. 청바지는 그렇게 노동자를 대변하는 패션이 됐고, 이어 제임스 딘 등 미국 할리우드 스타들을 통해 젊음의 상징으로 거듭났다.신연수 기자 s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