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부활절 즈음이면 생각나는 음악이 하나 있다. 봄 기운이 완연해지는 이 시절이면 그 선율이 더욱 아름답게 영글어가는 오페라이기도 하다. 이탈리아의 작곡가 피에트로 마스카니가 찬란한 풍광의 시칠리아 섬을 배경으로 남긴 걸작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Cavalleria Rusticana>가 바로 그것이다.
이탈리아의 시칠리아는 지중해 특유의 내리쬐는 뙤약볕만큼이나 뜨겁고 정열적인 사람들이 사는 땅이다. 해마다 봄이면 시칠리아인들이 파스콰(Pasqua)라고 부르는 부활절 시즌이 오는데, 이곳 특유의 검붉은 과육을 지닌 오렌지 ‘아란챠 로사’가 알알이 익어가고, 아몬드 나무에서는 화려한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시기다. 바싹 마른 대지 위로 지중해 특유의 짭조름한 공기가 희미한 미풍이 되어 연인들의 속삭임처럼 달콤하게 불어오는 것도 바로 이 시절이다. 이처럼 아름다운 부활절을 배경으로, 그 속에서 소용돌이처럼 일어나는 인간 군상들의 처절한 비극을 다룬 오페라가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이다.
군 복무를 마치고 고향 마을로 돌아온 투리두는 약혼녀 산투차를 저버리고 예전에 만났던 미모의 여인 롤라와 다시금 밀회를 즐긴다. 그러나 롤라는 이미 알피오라는 남자와 결혼한 유부녀. 격분한 산투차가 알피오에게 투리두와 롤라의 애정행각을 고발하고, 흥분한 알피오는 피의 복수를 다짐하면서 칼을 꺼내든다. 이처럼 오페라의 긴장감이 극에 달한 바로 그 직후에 거짓말처럼 아름다운 음악이 흘러나온다. 저 유명한 ‘인터메초(Intermezzo)’ 즉, 간주곡이다.
오페라 속에서는 부활절 오전에 해당하는 전반부와 본격적인 비극이 펼쳐질 후반부 사이를 나누는 기준점이 되는 음악이다. 인간들이 빚어낸 애증과 갈등이 세상사의 모든 것을 집어 삼킬 듯 격렬한 불길로 타오를 바로 그즈음, 음악은 마치 지중해의 미풍처럼 무심히 우리를 쓰다듬으며 눈물샘을 자극한다. ‘가슴이 시릴 만큼 아름답다’는 표현은 바로 이런 음악에 써야하지 않을까. 지중해의 찬란한 풍광이 지닌 형언할 수 없는 매력과 깊은 서정을 이보다 더 아름답게 그려낸 음악이 달리 또 있을까 싶다.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간주곡은 대중적으로도 매우 유명하다.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성난 황소 The Raging Bull> 첫 장면에서 로버트 드 니로가 셰도우 복싱을 할 때 흐르는 바로 그 음악이며, <대부3>에서는 가슴 아픈 피날레 장면에 등장한다. 대부 마이클 콜레오네가 시칠리아 팔레르모에서 오페라를 보다가 지역 마피아들이 쓴 흉탄에 딸을 잃는다. 영화의 피날레는 대부의 절규와 이어지는 콜레오네 가문의 몰락을 서늘하게 보여주는데, 그 뒤로 간주곡이 너무도 구슬프게 흐른다. 여기서 대부의 딸 메리로 열연했던 이는 코폴라 감독의 딸인 소피아 코폴라다. 지금은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과 칸느 영화제 작품상까지 거머쥔 거장 영화감독이 되어 있고, 몇 년 전에는 오페라 연출가로도 데뷔했다. 젊은 시절 <대부3>에서 들었던 오페라 음악들이 영향을 줬는지도 모른다. 이 오페라는 20대의 청년 작곡가 마스카니가 단 몇 달 만에 일필휘지로 써 내려간 오페라다. ‘간주곡’이 전해주는 티 없이 맑은 서정과 찬란하면서도 서글픈 아름다움은 지금도 지구촌 그 누군가의 마음을 뒤흔들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부활절마다 이 음악을 들어야 하는 이유다. /황지원 오페라평론가
2024년 2월 22일, 국제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한 것은 ‘미국 민간 달 탐사선 착륙 성공’이었습니다. 인튜이티브 머신스(Intuitive Machines)의 오디세우스가 달의 남극에 착륙한 것이죠. 민간 기업으로는 최초입니다. 이 미션은 NASA의 달 유인기지 건설 프로젝트 ‘아르테미스 미션’ 중 하나입니다. 2017년 트럼프 행정부 당시 시작된 프로젝트는 유인 우주선으로는 마지막으로 달에 착륙한 1972년 아폴로 17호 이래 50여년만에 사람을 다시 달로 보낸다는 계획입니다. 이번에는 몇 시간 머무는 것이 아니라, 기지를 건설한다는 것이죠. 50여년 전과 달리 다양한 민간기업과 나라가 참여합니다. 오디세우스는 달 탑재체 수송서비스의 일환입니다. NASA의 관측장비 6개를 싣고 가며, 다양한 사진을 보내왔습니다. 50여년만에 달에 갔다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롭지만 이번 오디세우스에는 특별한 아이템이 실려 있었습니다. 바로 미국이 사랑하는 현대미술 작가, 제프 쿤스의 작품입니다. ‘월상’(Moon Phases)으로 명명된 그의 작품은 달의 다양한 모습을 담은 125개의 조각입니다. 오디세우스는 이 작품을 달에 설치했는데, 지구 밖에 설치된 최초의 지구인 공식 예술작품이 되었습니다. ▶▶과거 인터뷰 [2023년 12월] = 세계에서 가장 비싼 예술가 제프 쿤스 달에 하나, 지구에 하나, 가상세계에 하나 ‘예술작품을 달에 설치한다’는 간단한 명제에서 시작한 월상 프로젝트는 총 3개의 섹션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달에 설치된 작품(직경 1인치), 그와 상응하는 지구에 남는 작품(15.5인치), 마지막으로 NFT입니다. 달-지구-가상세계를 잇는 세 개의 작품이 하나의 세트로, 총 125개 버전이 있습니다. 작품 구매자는 지구에서도 작품을 소유하고 있지만 대략 34만 4400키로미터 떨어진 달에 영구 설치된 소장품이 있는 셈입니다. NFT로 제작된 가상세계 작품도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왜 하필 NFT일까요?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프로젝트가 시작된 시기로 시계를 되돌려볼 필요가 있습니다. ‘월상’ 프로젝트는 4년 전 과학자이자 디자이너인 샹텔 바이에(Chantelle Baier) 4스페이스(4space) 창립자와의 협업에서 처음 탄생했습니다. 2021년 페이스로 전속갤러리를 옮긴 쿤스는 NFT등 미래 작품 소유 플랫폼을 꾸준히 연구하는 페이스 버르소(Pace Verso)와 협업하게 됩니다. 아리엘 휴즈(Ariel Hudes) 페이스 버르소 대표는 2023년 2월 GQ에 “투기자산으로 취급되는 일부 디지털 아트와 달리 우리는 각 아티스트에 맞춤화된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며 “블록체인에 무언가를 넣는 것이 영속성을 담보한다면, 달 표면 그 자체가 블록체인 아닐까”라고 설명합니다. 125개 버전은 지구에서 본 달의 모습 62개, 우주에서 본 달의 모습 62개 그리고 한 번의 월식입니다. 각 세트마다 이름이 붙었는데 플라톤, 석가모니, 공자, 네페르티티, 앤디 워홀, 레오나르도 다빈치, 버지니아 울프, 데이비드 보위, 헬렌 켈러 등 인류 역사에 중요한 업적을 남긴 인물들입니다. 지역과 시대, 장르, 성별을 고루 고려한 것으로 보입니다. 제프 쿤스를 전속하는 페이스갤러리는 “미래세대에게 영감을 주기 위해 인류의 가장 위대한 업적 중 일부를 기린다”고 설명합니다. 지구에 남는 조각에는 깨알만한 크기의 다이아몬드, 사파이어, 에메랄드, 루비 같은 보석이 하나씩 박혔습니다. 보석의 박힌 위치는 당연히 작품이 설치된 곳입니다. 일명 ‘달 문화지구’(Lunar heritage site) 인데 인간의 우주선이 착륙한 공간들을 말합니다. 조각은 제프쿤스 특유의 거울 같은 스테인레스 스틸로 제작됐습니다. 달의 표면을 세밀하게 묘사해, 한참을 바라보게 만드는 디테일도 눈길을 끕니다. 제프 쿤스는 자신의 작품을 소개하며 “한 명의 아티스트로 살아온 개인의 역사가 보인다. 이퀼리브리엄 시리즈(농구공을 유리 케이스에 넣은 시리즈)와 나이키 포스터의 열망도 떠오른다”고 말합니다. 쿤스 입장에서는 개인의 역사가 지구를 넘어 우주로 확장되는 것이죠. 한 세트의 가격은 200만달러. 판매수익은 전액 ‘국경 없는 의사회’에 기부됩니다. 논쟁의 여지가 있는 지구 밖 '최초' 설치 제프 쿤스의 ‘월상’을 ‘지구 밖에 설치된 최초의 예술작품’이라고 보는 것은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 이미 지난 1969년에 예술작품 하나가 비공식적으로 달에 갔기 때문입니다. 바로 닐 암스트롱을 태운 아폴로 11호의 성공 이후 같은 해 11월에 출발한 아폴로 12호의 다리에 부착된 작은 타일(세라믹 웨이퍼)입니다. 이른바 ‘달 미술관’(Moon Museum)으로 불리는 이 작품은 당시 활발하게 활동하던 로버트 라우셴버그, 앤디 워홀, 포레스트 마이어스, 데이비드 노브로스, 클라에스 올덴버그, 존 체임벌린 등 6명의 작가가 참여한 가로 1.9센치 세로 1.3센치로 엄지손톱보다 조금 큰 사이즈 타일입니다. 6명의 작가는 외계 생명체가 인류의 흔적을 발견하길 바라며 간단한 선, 네모, 남성 성기, 미키마우스, 기하학적 도형, 컴퓨터로 그려낸 간단한 그래픽 등을 그렸고, 이를 에칭한 세라믹 웨이퍼를 제작한 후, NASA의 공식 허락 없이 무단으로 우주선에 실었다고 합니다. 달 미술관 프로젝트는 아폴로 12호 발사 당시엔 알려지지 않았다가 포레스트 마이어스가 아폴로 12호가 달을 출발한지 이틀 뒤인 11월 22일 뉴욕타임즈와 인터뷰하면서 밝혀집니다. NASA에서는 ‘달 미술관’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NASA의 대변인은 “해당 작업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다. 만약 우리가 그런 요청을 받았다면 매우 관심을 가졌을 것 같다. 그들의 주장대로 은밀한 방법으로 성공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 작품이 미국 현대 미술의 최고를 대표했으면 좋겠다"고 뉴욕타임즈에 코멘트한 것이 전부입니다. 달에만 예술작품이 간 것은 아닙니다. 1977년, 목성형 행성을 탐사하기 위해 발사된 보이저(Voyager) 1호와 2호엔 지구와 인류를 소개하는 이미지와 소리가 담긴 구리 축음기 디스크 ‘골든 디스크’가 실렸습니다. 수식, 올림픽, 도시, 아이와 엄마, 자연 등을 담은 115개의 이미지와 파도, 바람, 천둥, 새, 고래 및 기타 동물이 내는 자연의 소리가 담겼고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음악과 55개 언어로 된 지구인의 인사말도 포함됐습니다. 골든 디스크 표지엔 레코드 재생 방법이 이미지로 쓰여있습니다. 프로젝트를 이끌었던 칼 세이건의 말대로 “진보된 우주 여행 문명이 있는 경우에만 기록이 재생될”수 있겠죠. 제프 쿤스는 누구? 처음이냐 아니냐를 떠나 제프 쿤스의 월상 프로젝트는 도전적이고 전복적이며 자유로우면서도 동시에 시장친화적인 작가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냅니다. ‘천재적’이라는 평가가 절로 나오는 이유죠. 달이 “가장 오래된 TV”라고 치켜세운 백남준 이래, 달을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한 작가인지 모르겠습니다. ‘소유욕’이라는 인간의 기본 욕구가 이제는 달까지 확장했으니까요. 1955년 미국 펜실베니아주에서 태어난 제프 쿤스는 메릴랜드예술대학과 시카고예술대학에서 회화를 공부했습니다. 바로 예술가로 커리어를 시작했을 것 같지만, 1980년 스물 다섯의 쿤스는 뉴욕에서 뮤추얼펀드·증권 거래인으로 활동합니다. 공식자리에선 늘 딱 맞춘 수트를 입고 나타나는 작가의 태도는 이때 만들어진 것인지도 모릅니다. 기자들이 던지는 곤란한 질문에도 달변으로 답하는 역량이나 전시를 찾은 관객들 한 명 한 명을 VVIP컬렉터처럼 대하고, 아트페어에 몰려든 자신의 팬들 앞에선 ‘겸손한’ 슈퍼스타로 변하는 그는 그 자체로 하나의 ‘브랜드’입니다. 쿤스 하면 떠오르는 작품은 ‘풍선개’입니다. 거울처럼 반짝거리는 스테인레스 스틸로 제작된 풍선개는 겉보기엔 가벼워 둥둥 떠다닐 것 같지만 묵직한 존재감을 과시하는 조각입니다. 이처럼 풍선 동물, 장난감 등 일상적 사물을 사이즈를 거대하게 키우거나 재료를 바꿈으로써 주위를 환기시킵니다. 초기작에선 미국 대중문화를 활용한 작업을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모두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암묵적으로 지키는 ‘제약’을 간단히 넘겨버리는 쿤스 특유의 ‘비틀기’는 호/불호가 갈리는데, 소비주의와 대중문화를 잘 넘나든다고 비평하는 그룹이 있는가 하면 그저 얕은 수준의 상업적 작품이라고 평가절하하는 시각도 있습니다. 어찌됐든 20세기 후반-21세기 초에 걸쳐 가장 논쟁적이고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작가라는 점에선 변함이 없습니다. 작품가에서도 이 같은 영향력은 그대로 드러나는데, 작가의 경매 최고가 기록은 9110만 달러(약 1200억원)입니다. 2019년 5월 뉴욕 크리스티에서 낙찰된 스테인레스 스틸 조각 ‘토끼’가 그 주인공입니다. 아직까지 생존 작가 기록 중에선 최고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주에 이루어낸 업적은 인류의 무한한 잠재력을 상징한다. 우주 탐사를 통해 세상의 제약을 초월할 수 있다는 시각을 갖게 됐다”고 설명한 ‘월상’은 10여년 뒤 어느 정도의 가치를 가질 수 있을까요? 속단할 수 없다는 것이 미술시장의 묘미입니다.
23살. 아내의 불륜 상대 나이를 알게 된 남자는 기가 찼습니다. 아내의 내연남은 잘나가는 뮤지컬의 주연 배우. 장발이 잘 어울리는 무척 잘생긴 녀석이었습니다. 아내는 내연남을 위해 남편이 평생 번 돈을 흥청망청 써댔습니다. 이때까지 아내의 수많은 불륜을 용서했던 남자였지만 이번만큼은 참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유는 분노가 아니었습니다. ‘아내를 그 젊은 녀석에게 빼앗길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79살의 배우자가 56살 어린 애인을 만나고 있다는 건 분통 터지는 황당한 일입니다. 하지만 1973년 초현실주의 거장 살바도르 달리(1904~1989)에게 이는 엄연한 현실이었습니다. 그리고, 너무나도 가슴 아프고 두려운 일이었습니다.대체 이 부부는 어떤 관계였던 걸까요.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을까요. 오늘은 그 이야기를 달리의 삶, 작품 세계와 함께 풀어보겠습니다. 금쪽이, 그림 천재 되다스페인 동북부 카탈루냐 지방에는 ‘알 엠포르다’라는 지역이 있습니다. 프랑스 국경과 지중해를 접한 이곳은 시속 129km에 달하는 거센 바람이 수시로 불어오는 동네입니다. 이런 바람은 오랜 세월에 걸쳐 산과 바위를 신비롭고 환상적인 모양으로 깎아냈습니다. 하지만 바람은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꺾어 버렸습니다. ‘저 바람은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동네 사람들은 이런 얘기를 주고받곤 했습니다. 정신질환을 앓던 달리의 할아버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때도, 사람들은 그런 얘기를 수군거렸습니다.1904년 태어난 달리는 할아버지의 기질을 물려받았습니다. 극도로 예민하고 섬세한 기질을 타고난 탓에 달리는 어린 시절 환상과 현실을 잘 구분하지 못했습니다. 바람이 깎아낸 땅은 달리에게 코뿔소, 독수리, 죽은 이의 몸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항상 주변의 산과 바다를 바라보며 몽상에 빠져 있었습니다. 게다가 달리에게는 콤플렉스도 있었습니다. 얼굴은 잘생겼지만, 몸이 아주 왜소하고 허약했거든요. 그래서 또래 친구들은 걸핏하면 달리를 “덜떨어진 놈”이라고 부르며 무시했습니다.반면 어머니는 달리를 왕자처럼 키웠습니다. 달리가 태어나기 1년 전, 두 살배기 첫째가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난 슬픔 때문이었습니다. 매일 아침 달리가 일어날 때마다 어머니는 “오늘은 뭘 해줄까?”라고 물으며 비위를 맞췄습니다. 타고난 광기와 콤플렉스에 ‘금쪽같은 내 새끼’에 나올 법한 이런 양육이 겹치면서 달리는 늘 관심을 갈구하는 고집불통 말썽꾸러기 폭군으로 자랐습니다. 어린 시절 그의 일화들은 그야말로 ‘금쪽이’ 그 자체입니다. 관심을 끌기 위해 계단에서 뛰어내리거나, 죽은 박쥐를 물어뜯는 등 기괴하고 폭력적인 행동을 자주 했거든요.하지만 예술적 재능은 때로 이런 광기에서 태어나기도 합니다.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표현하는 게 바로 예술이니까요. 다행히도 달리에게는 천재적인 재능과 노력하려는 의지가 있었습니다. 달리는 금세 독학으로 출중한 그림 실력을 갖추게 됐습니다. “저 녀석은 미술을 해야 사람 구실을 하겠어.” 아버지는 달리가 마드리드에 있는 왕립 미술 아카데미 시험을 치게 해 줬습니다. 특유의 소심함과 완벽주의 탓에 달리가 완성한 그림은 너무 작아서, 시험에서 요구하는 최소 크기에도 못 미쳤습니다. 하지만 아카데미는 달리를 입학시켰습니다. 너무 잘 그렸기 때문이었습니다.18살의 나이로 아카데미에 입학한 달리는 몸과 마음을 바쳐 그림을 그렸습니다. 학교 수업 수준은 진작에 뛰어넘은 지 오래. 그는 프라도 박물관에 가서 거장들의 작품을 베껴 그렸고, 인상주의를 공부했고, 그다음 입체주의를 공부했습니다. 달리가 그림을 너무 많이 그린 탓에 그의 기숙사 방에는 앉을 자리도 찾기 어려울 지경이었습니다. 달리의 극도로 정밀한 묘사 능력과 구성, 미술사를 아우르는 통찰력은 이때 생겨났습니다. 훗날 그의 그림이 비현실적인 소재를 다루면서도 손에 잡힐 듯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 역시 이때 쌓은 실력 덕분이었습니다.1925년 21살이 된 달리는 바르셀로나에서 개인전을 열어 미술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합니다. 같은 스페인 출신 거장인 파블로 피카소와 호안 미로를 만난 것도 이 시기입니다. 피카소는 “끊임없이 돌아가는 모터 같은 창의력을 갖고 있다”고 달리를 칭찬했고, 미로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원하는 작품이 나올 때까지 고집을 부리는 것”이라고 조언해 줬습니다. 곧 달리는 학교를 그만두고 프랑스 파리에서 화가로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금세 그의 참신한 작품에 푹 빠졌고, 그림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습니다.하지만 그는 훗날 회고했습니다. “그 때 나는 거의 미쳐가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갖고 있었던 광기가 심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와 미치광이의 유일한 차이점은, 나는 아직 미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초현실주의, 그리고 갈라달리가 25살이 되던 1929년,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첫 번째는 본격적으로 초현실주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 이 시기 달리는 자신을 사로잡는 광기를 예술 작품으로 만드는 방법을 생각해냈습니다. 어린 시절 그가 고향의 자연을 바라보며 여러 가지 모양과 환상을 떠올렸던 것처럼, 주변에 있는 물건들을 오랫동안 바라보다 갑자기 떠오르는 것들을 캔버스에 그려 넣기 시작한 겁니다.그저 생각 없이 끼적인 낙서는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무의식 속에는 뭔가 위대한 것이 있다.’ 달리는 이렇게 믿었습니다. 쉽게 풀어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위대한 존재의 일부분. 그러니 그 위대함의 일부는 인간의 본질에도 깃들어 있습니다. 그 위대한 존재를 신이라 부를 수도 있고, 우주나 진리, 아름다움이라 부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이는 일상에 가려져 평소에는 잘 느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달리는 그 일상을 걷어내고, 무의식 깊은 곳으로 들어가 그 꿈속의 풍경을 그려내고자 했습니다. 달리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 사람들을 우리는 초현실주의자라고 부릅니다. 그중에서도 달리의 대단한 점은 이를 탁월한 실력으로 손에 잡힐 듯 그려냈다는 겁니다.두 번째는 평생의 사랑, 갈라와 만난 것이었습니다. 달리보다 열 살 많은 갈라는 유부녀인데다 자식까지 있었습니다. 하지만 갈라 역시 달리처럼 어딘가 비뚤어진 광기의 소유자. 더 중요한 공통점은, 둘 다 윤리 의식이 바닥이었다는 겁니다. 둘은 첫눈에 서로를 알아봤고 금세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갈라는 곧 남편과 이혼한 뒤 달리와 결혼했습니다. 사람들은 둘을 손가락질했습니다. “끼리끼리 만났다”고들 수군거렸지요. 특히 달리의 아버지는 이 결혼을 극구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달리와 갈라의 관계는 이처럼 시작부터 정상이 아니었습니다. “달리는 갈라와 있을 때면 마치 엄마와 있는 아이처럼 굴었다.” 달리의 여동생은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달리는 갈라에게 애원하곤 했습니다. “제발 내게 상처를 주지 말아줘요. 나도 당신을 아프게 하지 않을게요.” 하지만 갈라는 걸핏하면 바람을 피워댔습니다. 그래도 달리는 갈라를 떠나지 못했습니다.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만, 갈라가 달리를 사랑하지 않았던 건 아닙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갈라와 함께 산다는 것 자체가 달리에게 정신적으로 큰 도움이 됐습니다. 또 갈라는 뛰어난 교양과 예술적 센스로 달리의 작품에 큰 도움을 줬습니다. 그녀는 달리의 낙서를 메모로 잘 다듬어서 정리하고, 이를 이론으로 발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달리는 “내 작품 세계의 절반은 갈라가 만들었다”고 말하며 작품 서명에 갈라의 이름을 함께 써넣곤 했습니다.덕분에 달리는 예술적 전성기를 맞았습니다. 달리 최고의 명작으로 평가받는 ‘기억의 지속’(1931)이 나온 게 이 때입니다. 그의 명성은 유럽을 넘어 미국까지 퍼져나갔습니다. 달리는 자신만만하게 말했습니다. “나는 초현실주의자가 아니다. 나 자신이 초현실주의다.”쇼맨, 몰락의 시작달리는 천재였고, 좀 미쳐 있었고, 늘 사람들의 관심을 절실히 필요로 했습니다. 여기에 하나 더. 그는 타고난 쇼맨십의 소유자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대중의 관심을 끌 수 있는지, 그게 어떻게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지를 본능적으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갈라와 화려한 결혼 생활을 하려면 돈이 필요했습니다. 이미 성공한 화가였지만, 달리는 과격한 말과 이상한 행동을 통해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어서 더 적극적인 돈벌이에 나섰습니다. 그는 이렇게 자신을 합리화했습니다. “내 존재와 행동은 그 자체가 사회적인 규칙에 도전하는 예술이다.”당연히 그를 싫어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달리가 예술에 먹칠한다.” “관심에 미쳐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그를 주목하고 좋아했습니다. 영국 미술관에서 열린 강연에 심해 잠수복을 입고 참석한 게 대표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기계장치가 잘못돼 하마터면 달리는 도심 한복판에서 질식사할 뻔했습니다. 하지만 캑캑대며 숨을 몰아쉬는 그를 보고 사람들은 ‘저것도 연기구나. 멋지다’고 생각했습니다. 1936년 영국에서 열린 그의 전시회에서는 관람객이 몰리는 바람에 인근 거리의 교통이 전부 마비되는 일도 벌어졌습니다.제2차 세계대전을 피해 도착한 미국에서는 그의 쇼맨십이 더 잘 먹혔습니다. 여기에 달리는 히치콕과 영화를 제작하고 디즈니와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습니다. 언론과 대중은 달리를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달리는 초현실주의의 지도자다.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해내는 천재, 상상의 세계를 예견한 선지자다.” 당시 달리는 얼마나 인기가 많았는지, 길을 걸을 때마다 사인해달라는 사람이 몰려드는 탓에 제대로 집 밖에 나가지도 못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는 훗날 앤디 워홀 등 여러 현대미술가의 ‘이미지 메이킹’에 큰 영향을 줬습니다.하지만 예술보다 돈벌이와 마케팅에 집중하면서, 그의 작품세계도 서서히 발전을 멈췄습니다. 오늘날 미술 평론가 중 적지 않은 이가 194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달리의 작품을 ‘지루한 자기 반복’이라고 비판합니다. 발전 없이 그리던 그림만 비슷하게 계속 그려서 팔았다는 겁니다.확실히 돈이 잘 벌리긴 했습니다. 40대 이후 달리는 엄청난 부자가 됐습니다. 하지만 그의 욕심은 멈출 줄 몰랐습니다. 주변에서도 탐욕을 부추겼습니다. 가뜩이나 도덕성이 희박했던 달리는, 예술가로서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지르고 맙니다. 빈 종이에 서명만 한 뒤 업자에게 돈을 받고 넘겨서, 업자가 마음대로 자기 작품을 위조해 원본처럼 팔아치울 수 있게 한 겁니다. 이런 사실은 1974년 프랑스 세관에서 달리의 서명이 담긴 1만장의 빈 종이가 적발되면서 드러났습니다. 훗날 한 업자는 “총 8만7500장의 종이를 넘겨받았다”고 자백했습니다. 실제로는 더 많았을 겁니다.갈라도 끊임없이 사고를 쳤습니다. 달리가 벌어오는 돈이 늘어날수록 갈라의 생활은 더 난잡했습니다. 그녀는 끊임없이 젊은 남자들과 바람을 피웠고, 나이가 환갑을 넘으면서 바람기는 오히려 더 심해졌습니다. “갈라는 나이 드는 걸 두려워했고, 여전히 자신이 매력적이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바람을 피웠다”는 게 주변의 증언입니다.달리 역시 다른 젊은 여성들과 자주 만났습니다. 하지만 이는 갈라의 관심을 끌기 위해 바람피우는 척 한 것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갈라는 이를 신경조차 쓰지 않았고, 사실상 별거 생활을 하며 달리를 잘 만나주지도 않았습니다. 상처받은 달리는 시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달리의 슬픔이 얼마나 깊었는지, 그는 갈라가 자신을 떠날 것 같다는 공포에 그림도 못 그릴 지경이 됐습니다.기사 첫 부분에 나온 제프 펜홀트와의 바람도 이때입니다. 펜홀트는 당시 브로드웨이 최고 인기 뮤지컬인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의 주인공이었습니다. 갈라는 펜홀트를 위해 거액의 저택을 사주고, 달리의 그림도 선물했습니다. 달리는 격분해 갈라를 때렸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맞고 있을 갈라가 아니었습니다. 갈라 역시 달리를 때렸습니다. 결국 둘 다 뼈가 한 군데씩 부러졌다고 합니다.나를 홀로 묻어 줘아주 기괴하고 비도덕적인 모양새긴 했지만, 달리와 갈라가 분명 한 때 서로를 깊이 사랑했다는 것만큼은 사실입니다. 두 사람은 한 팀이 돼 위대한 예술세계를 탄생시켰고, 보통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큰 돈을 벌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광기는 서로를 파괴했습니다. 달리는 발전을 멈추고 쇠퇴했고, 깊은 마음의 상처를 받았습니다. 갈라는 자신이 마음대로 남자를 만나며 살지 못하는 게 달리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침내 그녀는 달리를 증오하게 됐습니다.1980년 70대의 달리가 죽을 뻔한 것도 갈라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달리는 심한 독감에 걸렸습니다. 86살의 갈라는 약통에서 이것저것 약을 꺼내 달리에게 먹였습니다. 그 약을 먹고 달리는 거의 죽을 뻔했습니다. 달리가 이때 돌이킬 수 없는 뇌 손상을 입었다고 진단한 의사들도 있었습니다. “갈라가 달리를 독살하려 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2년 뒤 노환으로 먼저 세상을 떠난 건 갈라였습니다.달리의 마지막은 그리 아름답지 못했습니다. 갈라가 떠나자 그는 심각한 정신적 불안과 외로움에 시달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밤마다 머리맡에 있는 종을 흔들어서 시도 때도 없이 가사 근로자들을 부르곤 했습니다. 그런 다음 고함을 치고, 성질을 부리고, 침을 뱉고, 얼굴을 할퀴었습니다. 이를 견디다 못한 가사 근로자들은 종을 떼어버리고 그 자리에 호출 버튼을 달았습니다. “종소리보다는 차라리 전자음이 낫지.” 그러던 어느 날 밤, 달리는 호출 버튼을 끊임없이 연타했고, 이로 인해 합선이 일어나 불이 났습니다. 가사 근로자들이 얼른 달려왔지만 달리가 몸 80%에 화상을 입은 뒤였습니다.그 후로도 달리는 5년이나 더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림을 제대로 그리지 못한 건 물론 일상생활조차 스스로 잘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도 그의 ‘신작’들은 끊임없이 시장에 나왔습니다. 이 중 상당수는 위작으로 추정됩니다. 마지막으로 그가 남긴 말은 이랬습니다. “갈라 옆에 나를 묻어달라고 했던 말을 취소하겠어. 나를 내 박물관에 홀로 묻어 주게.” 그게 본인이 더 빛날 수 있는 길이었으니까요.달리의 두 얼굴달리가 초현실주의를 대표하는 화가이자 위대한 업적을 남긴 거장이라는 사실을 의심하는 평론가는 거의 없습니다. 그가 만든 이미지들은 전 세계로 널리 퍼져나갔고, 이는 현대인의 무의식 속에 깊이 각인됐습니다. 팝아트를 비롯한 여러 미술 사조는 물론 컴퓨터 그래픽의 많은 요소, 예컨대 그라데이션(하나의 색채에서 다른 색채로 변하는 단계)이나 픽셀 등의 아이디어가 달리의 영향을 받은 게 단적인 예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작품값이 높은 것으로 유명한 현대미술가 제프 쿤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날의 세계는 달리의 눈으로 본 세상이다.”반면 인간으로서의 달리는 이기적이고 부도덕한 사람이었습니다. 갈라와의 사랑부터가 사실 그랬습니다. 말년에 그를 간호했던 한 인물은 달리를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선생님은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갈라에 대한 사랑도, 갈라가 아닌 ‘갈라를 사랑하는 나 자신’에 대한 사랑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가 돈을 벌기 위해 수많은 위작을 찍어낸 탓에, 달리는 ‘세상에서 가장 위작이 많은 작가’ 중 하나로 꼽힙니다. 2004년 핀란드 헬싱키박물관에서 열린 그의 탄생 100주년 기념전시에서는 출품작 대부분이 위작으로 확인되면서 전시가 중단되는 일까지 있었습니다.달리가 그린 몽환적인 풍경이 매력적이면서도 왠지 불편한 건, 위대한 예술적 재능과 인간 본성의 나약하고 추한 면을 이처럼 동시에 담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 또한 삶과 세상의 일부이기도 하고요.그게 보기 좋든 아니든, 옳든 그르든, 좋은 현대미술 작품들은 이렇게 복잡한 우주를 담고 있어서 보는 사람을 생각에 빠지게 합니다. 거기서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버릴지는 각자의 몫입니다.좋은 주말 보내세요.****이번 기사는 도서 The Shameful Life of Salvador Dali(Ian Gibson), ‘나는 세계의 배꼽이다 : 살바도르 달리의 이상한 자서전’(살바도르 달리 지음), ‘살바도르 달리, 스페인 카탈루냐의 위대한 쇼맨, 초현실주의 화가’ 재키 드 버카 지음, 심지영 옮김, 논문 ‘The Enigma of Desire : Salvador Dali and the conquest of the irrational’(Zoltan Kovary, PSYART, 2009/6/29), ‘The Vernacular as Vanguard-Alfred Barr, Salvador Dalí, and the U.S. Reception of Surrealism in the 1930s’(Sandra Zalman, Journal of Surrealism and the Americas 1, 2007) 등을 참조했습니다.<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과 고고학, 역사 등 과거 사람들이 남긴 흥미로운 것들에 대해 다루는 코너입니다. 토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쉽고 재미있게 쓰겠습니다. 네이버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5만여명 독자가 선택한 연재 기사를 비롯해 재미있는 전시 소식과 미술시장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현대인은 늘 불안감에 시달린다. 가만 생각해보면 별다른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크게 걱정할 일이 없는데도,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여 살고 있다. 불안의 원인은 ‘불확실성’이다. 기후 온난화로 인한 재난,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은 경제 위기, 확산하고 있는 비관론 그리고 양극화로 인해 들끓는 분노와 갈등 등 세계는 지금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다.이런 시기에 살아가야만 하는 현대인들은 필연적으로 두려움과 불안 그리고 절망의 감정 속으로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다. 게다가 부정적 감정을 유발하는 자극적인 뉴스와 암울한 미래 예측이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오염시키고 있다. 불확실성의 시대에 어떻게 우리는 정신적 강인함을 되찾고 평정심을 유지하며 살 수 있을까?과거 어느 때보다 마음 건강이 더욱 중요해진 시대에 독일에서는 3월 초 출간된 책 <고개 들어!(Kopf hoch!)>의 인기가 뜨겁다. 저명한 뇌신경과학자이면서 정신과 전문의로, 스트레스와 정신적인 피로감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마음 건강을 회복하는 법을 알려주고 있는 폴커 부슈 박사는 책을 통해 현대인들이 겪고 있는 일상의 여러 심리적 위협을 이겨내는 방법을 소개한다.뇌신경과학의 관점에서 ‘정신 면역체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설명하면서, 쉽고 재미있게 감정과 마음을 관리할 수 있는 전략을 알려준다. 정신 면역체계는 머릿속 세상을 바로잡아주고, 부정적인 생각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준다. 두려움을 줄여주고, 행동할 수 있는 용기를 주며, 웃음과 행복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주는 놀라운 자기방어 시스템이다.부슈 박사는 유니버시티칼리지 런던에서 시행한 한 실험을 소개한다. 실험에서 참가자들은 불쾌한 전기 충격을 받아야만 했다. 전기 충격을 미리 예고받은 참가자들은 비교적 침착하게 반응했다. 강한 전기 충격을 가하더라도, 전기 충격이 있으리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는 경우 스트레스는 심하게 증가하지 않았다.하지만 전기 충격이 언제 닥칠지 모를 때는 아주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상대적으로 약한 전기 충격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것은 전류의 세기가 아니라 어떤 일이 언제 어떻게 일어날지 모르는 불확실성이었다. 사람들은 ‘확실하게 일어날’ 나쁜 사건보다 ‘일어날지도 모르는’ 나쁜 사건에 더욱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연착되는 기차를 기다리는 플랫폼에서 승객들은 지연된 열차가 30분 후에 올지 1시간 후에 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더욱 화가 난다. 유방암이 의심되는 여성 그룹에서는 종양 조직검사 결과가 아직 불분명할 때 불안감이 가장 크게 나타났다. 차라리 악성 종양으로 판정되더라도 결과를 확인하는 순간에는 스트레스가 오히려 감소했다.스트레스를 유발하는 뉴스에 방어막을 치고 평정심을 잃지 않는 방법부터 긍정적인 삶의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유머와 재치를 고양하는 방법까지, 책은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의 정신적 배터리가 고갈돼 갈 때, 그것을 다시 충전해주는 방법으로 안내한다. 부정적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확장하면서 결국 인생 전체를 망치게 만드는 오버싱킹 늪에서 벗어나 미래에 대한 용기와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심리적 처방전도 함께 소개한다.홍순철 BC에이전시 대표·북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