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복희 "1967년 미니스커트 직접 만든 것…한국에 없어 열풍 몰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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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가 안방보다 더 편해…그냥 부딪히는 게 매력"
무대 인생 72년에 첫 서울 콘서트…100번째 뮤지컬作도 앞둬
"늘 주어진 오늘에 최선을 다했던 삶…여러분 덕분이죠" "제게 무대는 안방보다 더 편한 곳입니다.
관객을 직접 만나 그냥 부딪치는 것, 그게 매력이죠."
한국 뮤지컬 역사의 살아있는 증인, '여러분' '나는 당신을' 등 숱한 히트곡을 배출한 가수이자 싱어송라이터, 1960년대 미니스커트 열풍을 불러온 패션 리더….
가수 겸 뮤지컬 배우 윤복희 앞에 따라붙는 수식어들이다.
1952년 12월 부친 윤부길이 올린 뮤지컬 '크리스마스 선물'에 처음 출연한 이후 지난 72년간 무대를 지켜온 윤복희가 오는 23일 나루아트센터에서 생애 첫 서울 단독 콘서트를 연다.
콘서트 제목은 '삶'이다.
지난 12일 서울 종로구 연합뉴스 사옥에서 만난 윤복희는 "뮤지컬은 무대에 설 때 다른 사람이 돼 역할을 해내고, 혼자가 아니라 열 몇 명 혹은 서른 몇 명이 하지 않느냐"며 "그런데 콘서트는 내가 '윤복희'로 나가야 해서 굉장히 쑥스럽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저를 아껴주시고 사랑해 주시는 분들이 있어서 지금까지 70여년 동안 캐스팅돼 쉬지 않고 공연을 할 수 있었다"며 "감사한다는 뜻으로 이번 공연을 올리게 됐다"고 했다.
윤복희는 "저도 이제 나이가 있으니 (서울에서는) 이번 콘서트가 마지막일 수도 있다"며 "여러분에게 전하는 작은 '생큐 카드' 같이 만든 공연"이라고 소개했다.
윤복희에게 무대는 운명이자 고향 같은 곳이다.
그의 부친 윤부길은 경성음악전문학교(서울대 음대의 전신) 출신으로 '견우와 직녀'·'콩쥐팥쥐' 등의 오페라를 올리고 국내 뮤지컬을 창시한 인물이다.
모친 고향선 역시 무용가이자 전통 창(唱)을 했다.
윤복희는 "아버지는 일어나시면 성악 발성을 연습하셨고, 어머니는 국악 발성을 하셨으니 양쪽 발성을 어릴 때부터 따라서 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무대에 오르고 싶어서 안 된다는 아버지께 한 1년을 졸랐죠. 그러다가 우리 오빠가 가지고 있던 깡통으로 된 필통에 손을 넣고 눌렀는데 손가락을 다쳐서 피까지 났어요.
우여곡절 끝에 '딱 한 번'이라는 조건으로 선 무대가 '크리스마스 선물'이었죠."
윤복희는 이 데뷔 무대에서 스스로가 크리스마스 선물이 돼 '짠'하고 나타나 관객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이 노래는 당시 유행하던 뮤지컬 '아가씨와 건달들' 넘버였다. 무엇이 그토록 그를 강렬하게 무대로 이끌었던 것일까.
그는 "(한국전쟁으로) 부산에 피란 갔을 때 30∼40명의 예술인이 있던 극단을 한 번 따라간 적이 있다"며 "내가 즐겨 부르던 노래가 나오길래 옆에서 따라 했는데, 갑자기 몸이 '뜨끈뜨끈' 해졌다.
무대의 스포트라이트가 나에게 온 것"이라고 되돌아봤다.
그러면서 "이를 본 미국 관객들이 박수를 쳐 줬다"며 "그게 그렇게 좋더라. '나도 하고 싶다'는 생각이 그때 들었다"고 떠올렸다.
이후 소녀 윤복희의 삶에는 고무줄놀이나 인형 놀이가 아닌 무대가 펼쳐졌다.
부친과 함께 출연한 '안개 낀 서귀포'를 시작으로 여러 편의 영화에도 출연했다.
그러나 그가 걸어온 길은 레드 카펫 혹은 꽃길과는 거리가 멀었다.
모친과 부친이 잇따라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떴기 때문이다.
윤복희는 "오빠(윤항기)는 학교에 다녀야 하니 아버지 친구 집에서 자랐고, 저는 돈을 벌러 공연하러 다녀야 해서 여관을 옮겨 다녔다"며 "어머니 아버지가 계시지 않아 내가 가족을 돌봐야 했으니 힘들다고 느끼진 못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다"고 덤덤하게 말했다.
아홉 살 때 합격한 미8군 쇼단 오디션은 그의 삶에 새로운 전환점이 됐다.
반복되던 미8군 출연 심사마다 최고 등급을 놓치지 않았다.
재즈의 전설 루이 암스트롱을 따라 한 것이 바다 건너 본인의 귀에까지 들어가면서 1963년 워커힐 개관 공연에서 암스트롱과 함께 무대에 오르는 기회도 얻었다.
윤복희는 "집에 있는 레코드를 들으면서 영어 가사를 외웠다.
어린애였기에 오히려 금방 영어를 익혔던 것 같다"며 "대 선배인 그분(암스트롱)과 무대에 선다는 게 정말 영광이었다.
떨리지는 않았다.
'성자의 행진'(When The Saints Go Marching In)을 불렀는데, 그분이 몇 소절 하면 나도 따라서 주거니 받거니 하며 불렀다"고 했다. 윤복희는 같은 해 비행기에 몸을 싣고 한국을 떠나 필리핀·싱가포르 등지에서 공연을 펼쳤다.
이후 싱가포르에서 만난 영국 프로모터의 제안으로 귀국 대신 4인조 '코리안 키튼스'(The Korean Kittens)를 결성해 영국행을 택한 그는 BBC에 출연해 비틀스의 '캔트 바이 미 러브'(Can't Buy Me Love)를 불러 큰 반향을 일으켰다.
"영국 신문에 '비틀스 원곡보다 좋았다'고 나오는 바람에 유명해졌어요.
이후 독일(서독) 대통령 행사도 와 달라고 해서 갔고, 미국에서도 빨리 와 달라고 해서 가게 됐죠."
윤복희는 미국 공연 도중 CBS TV 유명 방송인 밥 호프를 만난 것을 계기로 1965년 CBS 크리스마스 스페셜 방송에도 출연했다.
원조 K팝 한류 걸그룹이었던 셈이다.
그는 "미국 공연 중에 밥 호프가 무대 위로 올라와서 'CBS 크리스마스 특집에 나와줄 수 없느냐'고 물어보길래 나는 얼떨결에 '매니저에게 물어봐야 한다'고 했다.
그랬더니 관객들이 '세이 예스!'(Say Yes!)라고 소리를 질렀다"며 "그 인연으로 태국 방콕에서 머물면서 필리핀, 베트남 등을 다니며 위문 공연을 펼쳤고 이것이 촬영돼 CBS로 방송됐다"고 전했다. 윤복희는 1967년 귀국해 국내에서 공연을 펼쳤다.
같은 해 '웃는 얼굴 다정해도' 등이 히트한 첫 독집 음반이 발매됐다.
'미니스커트 열풍'을 불러온 재킷 이미지가 실린 바로 그 음반이다.
그는 음반과 미니스커트 이야기를 꺼내니 "사실 나는 다 모르는 사건이었다"며 "당시 잠깐 귀국했다가 도로 해외에 나갔기 때문에 바빠서 (국내에서 화제가 된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리사이틀을 열려고 하니 악보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서 연습용으로 6∼8곡을 녹음했어요.
그런데 제가 미국으로 돌아간 다음 이봉조 작곡가가 전화로 '연습용 녹음테이프가 너무 좋아서 이걸 음반으로 내도 되겠느냐'고 물어오시더라고요.
알겠다고 해서 그분이 내신 음반이에요.
그런데 그게 히트했다던데, 전 한국에 없었죠."
윤복희는 미니스커트 사진에 대해서도 "당시 신문 기자가 서소문 다리에서 찍은 것을 재킷 사진으로 하셨더라"며 "당시 미니스커트는 미국에서 입던 스타일로 내가 직접 만든 옷이다.
공연에서도 미니스커트를 많이 입곤 했다"고 떠올렸다.
윤복희는 지난 1976년 공연 차 전주에서 대구로 가던 중 차가 전복되는 큰 교통사고를 계기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믿음 생활에 누구보다 열심이다.
제3회 서울국제가요제에서 그에게 대상을 안겨준 대표곡 '여러분'(1979년)도 사실 그의 신앙 고백과도 같은 노래다.
노래 속 화자 '나'는 신이고, 듣는 '여러분'은 인간이라고 설명했다.
원작자의 설명을 접하고 이 곡의 클라이맥스라고도 할 수 있는 '만약 내가 외로울 때면 누가 나를 위로해주지 여러분' 하는 유명한 무반주 내레이션을 들으면 느낌이 또 달라진다.
윤복희는 1983년 국내에 완전히 정착한 이후 쉬지 않고 뮤지컬에 출연해 올가을 사도 바울을 소재로 한 작품 출연을 앞두고 있다.
무려 통산 100번째 출연작이다.
그는 "내게 시간이 좀 있었다면 의상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다"며 "의상 숍을 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안 돼서 못 했다"고 못다 한 꿈을 밝혔다.
"제 삶을 돌아보면 웅장하지는 않았어요.
그렇지만 심플하면서도 열심히 걸어온 삶이었습니다.
어제는 이미 지나갔고, 내일은 오지 않을 수도 있죠. 하지만 주어진 오늘은 최선을 다했답니다.
" /연합뉴스
무대 인생 72년에 첫 서울 콘서트…100번째 뮤지컬作도 앞둬
"늘 주어진 오늘에 최선을 다했던 삶…여러분 덕분이죠" "제게 무대는 안방보다 더 편한 곳입니다.
관객을 직접 만나 그냥 부딪치는 것, 그게 매력이죠."
한국 뮤지컬 역사의 살아있는 증인, '여러분' '나는 당신을' 등 숱한 히트곡을 배출한 가수이자 싱어송라이터, 1960년대 미니스커트 열풍을 불러온 패션 리더….
가수 겸 뮤지컬 배우 윤복희 앞에 따라붙는 수식어들이다.
1952년 12월 부친 윤부길이 올린 뮤지컬 '크리스마스 선물'에 처음 출연한 이후 지난 72년간 무대를 지켜온 윤복희가 오는 23일 나루아트센터에서 생애 첫 서울 단독 콘서트를 연다.
콘서트 제목은 '삶'이다.
지난 12일 서울 종로구 연합뉴스 사옥에서 만난 윤복희는 "뮤지컬은 무대에 설 때 다른 사람이 돼 역할을 해내고, 혼자가 아니라 열 몇 명 혹은 서른 몇 명이 하지 않느냐"며 "그런데 콘서트는 내가 '윤복희'로 나가야 해서 굉장히 쑥스럽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저를 아껴주시고 사랑해 주시는 분들이 있어서 지금까지 70여년 동안 캐스팅돼 쉬지 않고 공연을 할 수 있었다"며 "감사한다는 뜻으로 이번 공연을 올리게 됐다"고 했다.
윤복희는 "저도 이제 나이가 있으니 (서울에서는) 이번 콘서트가 마지막일 수도 있다"며 "여러분에게 전하는 작은 '생큐 카드' 같이 만든 공연"이라고 소개했다.
윤복희에게 무대는 운명이자 고향 같은 곳이다.
그의 부친 윤부길은 경성음악전문학교(서울대 음대의 전신) 출신으로 '견우와 직녀'·'콩쥐팥쥐' 등의 오페라를 올리고 국내 뮤지컬을 창시한 인물이다.
모친 고향선 역시 무용가이자 전통 창(唱)을 했다.
윤복희는 "아버지는 일어나시면 성악 발성을 연습하셨고, 어머니는 국악 발성을 하셨으니 양쪽 발성을 어릴 때부터 따라서 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무대에 오르고 싶어서 안 된다는 아버지께 한 1년을 졸랐죠. 그러다가 우리 오빠가 가지고 있던 깡통으로 된 필통에 손을 넣고 눌렀는데 손가락을 다쳐서 피까지 났어요.
우여곡절 끝에 '딱 한 번'이라는 조건으로 선 무대가 '크리스마스 선물'이었죠."
윤복희는 이 데뷔 무대에서 스스로가 크리스마스 선물이 돼 '짠'하고 나타나 관객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이 노래는 당시 유행하던 뮤지컬 '아가씨와 건달들' 넘버였다. 무엇이 그토록 그를 강렬하게 무대로 이끌었던 것일까.
그는 "(한국전쟁으로) 부산에 피란 갔을 때 30∼40명의 예술인이 있던 극단을 한 번 따라간 적이 있다"며 "내가 즐겨 부르던 노래가 나오길래 옆에서 따라 했는데, 갑자기 몸이 '뜨끈뜨끈' 해졌다.
무대의 스포트라이트가 나에게 온 것"이라고 되돌아봤다.
그러면서 "이를 본 미국 관객들이 박수를 쳐 줬다"며 "그게 그렇게 좋더라. '나도 하고 싶다'는 생각이 그때 들었다"고 떠올렸다.
이후 소녀 윤복희의 삶에는 고무줄놀이나 인형 놀이가 아닌 무대가 펼쳐졌다.
부친과 함께 출연한 '안개 낀 서귀포'를 시작으로 여러 편의 영화에도 출연했다.
그러나 그가 걸어온 길은 레드 카펫 혹은 꽃길과는 거리가 멀었다.
모친과 부친이 잇따라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떴기 때문이다.
윤복희는 "오빠(윤항기)는 학교에 다녀야 하니 아버지 친구 집에서 자랐고, 저는 돈을 벌러 공연하러 다녀야 해서 여관을 옮겨 다녔다"며 "어머니 아버지가 계시지 않아 내가 가족을 돌봐야 했으니 힘들다고 느끼진 못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다"고 덤덤하게 말했다.
아홉 살 때 합격한 미8군 쇼단 오디션은 그의 삶에 새로운 전환점이 됐다.
반복되던 미8군 출연 심사마다 최고 등급을 놓치지 않았다.
재즈의 전설 루이 암스트롱을 따라 한 것이 바다 건너 본인의 귀에까지 들어가면서 1963년 워커힐 개관 공연에서 암스트롱과 함께 무대에 오르는 기회도 얻었다.
윤복희는 "집에 있는 레코드를 들으면서 영어 가사를 외웠다.
어린애였기에 오히려 금방 영어를 익혔던 것 같다"며 "대 선배인 그분(암스트롱)과 무대에 선다는 게 정말 영광이었다.
떨리지는 않았다.
'성자의 행진'(When The Saints Go Marching In)을 불렀는데, 그분이 몇 소절 하면 나도 따라서 주거니 받거니 하며 불렀다"고 했다. 윤복희는 같은 해 비행기에 몸을 싣고 한국을 떠나 필리핀·싱가포르 등지에서 공연을 펼쳤다.
이후 싱가포르에서 만난 영국 프로모터의 제안으로 귀국 대신 4인조 '코리안 키튼스'(The Korean Kittens)를 결성해 영국행을 택한 그는 BBC에 출연해 비틀스의 '캔트 바이 미 러브'(Can't Buy Me Love)를 불러 큰 반향을 일으켰다.
"영국 신문에 '비틀스 원곡보다 좋았다'고 나오는 바람에 유명해졌어요.
이후 독일(서독) 대통령 행사도 와 달라고 해서 갔고, 미국에서도 빨리 와 달라고 해서 가게 됐죠."
윤복희는 미국 공연 도중 CBS TV 유명 방송인 밥 호프를 만난 것을 계기로 1965년 CBS 크리스마스 스페셜 방송에도 출연했다.
원조 K팝 한류 걸그룹이었던 셈이다.
그는 "미국 공연 중에 밥 호프가 무대 위로 올라와서 'CBS 크리스마스 특집에 나와줄 수 없느냐'고 물어보길래 나는 얼떨결에 '매니저에게 물어봐야 한다'고 했다.
그랬더니 관객들이 '세이 예스!'(Say Yes!)라고 소리를 질렀다"며 "그 인연으로 태국 방콕에서 머물면서 필리핀, 베트남 등을 다니며 위문 공연을 펼쳤고 이것이 촬영돼 CBS로 방송됐다"고 전했다. 윤복희는 1967년 귀국해 국내에서 공연을 펼쳤다.
같은 해 '웃는 얼굴 다정해도' 등이 히트한 첫 독집 음반이 발매됐다.
'미니스커트 열풍'을 불러온 재킷 이미지가 실린 바로 그 음반이다.
그는 음반과 미니스커트 이야기를 꺼내니 "사실 나는 다 모르는 사건이었다"며 "당시 잠깐 귀국했다가 도로 해외에 나갔기 때문에 바빠서 (국내에서 화제가 된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리사이틀을 열려고 하니 악보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서 연습용으로 6∼8곡을 녹음했어요.
그런데 제가 미국으로 돌아간 다음 이봉조 작곡가가 전화로 '연습용 녹음테이프가 너무 좋아서 이걸 음반으로 내도 되겠느냐'고 물어오시더라고요.
알겠다고 해서 그분이 내신 음반이에요.
그런데 그게 히트했다던데, 전 한국에 없었죠."
윤복희는 미니스커트 사진에 대해서도 "당시 신문 기자가 서소문 다리에서 찍은 것을 재킷 사진으로 하셨더라"며 "당시 미니스커트는 미국에서 입던 스타일로 내가 직접 만든 옷이다.
공연에서도 미니스커트를 많이 입곤 했다"고 떠올렸다.
윤복희는 지난 1976년 공연 차 전주에서 대구로 가던 중 차가 전복되는 큰 교통사고를 계기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믿음 생활에 누구보다 열심이다.
제3회 서울국제가요제에서 그에게 대상을 안겨준 대표곡 '여러분'(1979년)도 사실 그의 신앙 고백과도 같은 노래다.
노래 속 화자 '나'는 신이고, 듣는 '여러분'은 인간이라고 설명했다.
원작자의 설명을 접하고 이 곡의 클라이맥스라고도 할 수 있는 '만약 내가 외로울 때면 누가 나를 위로해주지 여러분' 하는 유명한 무반주 내레이션을 들으면 느낌이 또 달라진다.
윤복희는 1983년 국내에 완전히 정착한 이후 쉬지 않고 뮤지컬에 출연해 올가을 사도 바울을 소재로 한 작품 출연을 앞두고 있다.
무려 통산 100번째 출연작이다.
그는 "내게 시간이 좀 있었다면 의상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다"며 "의상 숍을 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안 돼서 못 했다"고 못다 한 꿈을 밝혔다.
"제 삶을 돌아보면 웅장하지는 않았어요.
그렇지만 심플하면서도 열심히 걸어온 삶이었습니다.
어제는 이미 지나갔고, 내일은 오지 않을 수도 있죠. 하지만 주어진 오늘은 최선을 다했답니다.
"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