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주의 새 정의 공개…극단주의 단체·개인 지정 잇따를 듯
정부·공공기관 참여 길 막히고 자금 지원도 못 받아
英, 증오범죄 급증에 '극단주의' 제재착수…무슬림 겨냥 논란도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전쟁을 계기로 유대계와 무슬림을 겨냥한 증오범죄가 급증하자 영국 정부가 '극단주의'(extremism)의 정의를 대폭 확대하고 관련 개인과 단체에 대한 제재에 착수했다.

14일(현지시간) 로이터, AFP 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영국 균형발전·주택부는 이날 극단주의의 새로운 정의를 발표했다.

극단주의는 '타인의 기본권과 자유를 침해하거나 자유주의적 의회민주주의를 전복하려고 폭력과 증오, 불관용에 근거한 이념을 촉진하거나 발전시키는 것'이라는 게 영국 정부의 새 정의다.

아울러 스스로 그런 행위를 하지 않더라도 타인이 그렇게 행동하도록 조장하는 환경을 의도적으로 조장한다면 역시 극단주의에 해당한다고 규정했다.

2011년 테러방지 지침에 근거해 제정된 기존 정의는 '민주주의와 법치, 개인의 자유, 서로 다른 믿음에 대한 상호 존중과 관용을 포함한 근본적인 영국의 가치에 목소리 또는 행동으로 반대하는 것'이었다.

마이클 고브 균형발전·주택부 장관은 "오늘 발표된 조치는 민주주의를 전복하고 타인의 기본권을 부정하려는 이들에게 정부가 자칫 연단을 제공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영국은 테러에 연루된 단체들의 활동을 금하고 있으며, 이런 단체를 지원하거나 가입할 경우 형사 처벌 대상이 된다.

하마스 역시 국제 테러단체로 지정돼 제재받고 있다.

반면 극단주의 단체나 개인으로 지정해 제재한 사례는 2011년 이래 공식적으로 단 한 건도 없었는데, 이번에 극단주의의 정의를 대폭 확장하면서 실제 적용례가 생기게 됐다.

로이터 통신은 향후 몇주에 걸쳐 문제 소지가 있는 행동을 한 단체와 개인을 대상으로 극단주의자 지정 여부에 관한 정부 평가가 진행될 예정이라고 전했다.

英, 증오범죄 급증에 '극단주의' 제재착수…무슬림 겨냥 논란도
극단주의 단체나 개인으로 지정돼도 형사처벌을 받거나 집회 허가를 받지 못하는 일은 없지만, 정부나 공공기관 자문기구 등에 참여하거나 정부의 자금 지원을 받을 길은 완전히 막히게 된다.

영국에서는 작년 10월 7일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기습공격해 약 1천200명을 살해하고 250여명을 납치해 전쟁이 발발한 이래 유대계와 무슬림 주민을 겨냥한 증오범죄가 급증해 심각한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유대인 단체 '커뮤니티 시큐리티 트러스트'(CST)가 발간한 최근 보고서를 보면 2023년 영국에선 전년도(1천662건)보다 147% 많은 총 4천103건의 유대인 혐오 사건이 발생했다.

영국 반(反)무슬림혐오 시민단체 텔마마(Tell MAMA)도 가자전쟁이 발발한 작년 10월 이후 4개월간 최소 2천건의 무슬림 혐오 사건이 발생했고, 이는 전년도 같은 기간보다 335% 많은 것이라고 밝혔다.

리시 수낵 영국 총리는 이달 초 이슬람주의자와 극우 극단주의자들이 영국의 다민족 민주주의를 의도적으로 약화시키고 있다고 경고하면서 더욱 강력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다만, 일각에선 극단주의의 정의를 확장해 제재하기로 한 이번 조처가 사실상 무슬림 단체들을 겨냥한 것 아니냐는 논란이 일고 있다.

고브 장관은 지난 10일 언론 인터뷰에서 최근 런던 중심가에서 벌어진 대규모 친(親)팔레스타인 시위가 '극단주의 단체들'에 의해 조직됐다고 언급한 바 있다.

영국 현지매체 바이라인타임스는 자체 입수한 정부 자료를 살펴본 결과 극우 성향 조직들과 함께 유력한 무슬림 단체도 여럿 이름이 등재된 사실이 확인됐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세계 성공회의 상징적 수장인 저스틴 웰비 캔터베리 대주교는 요크 대주교와 함께 12일 발표한 공동 성명에서 정부의 이번 조치를 비판하면서 "이미 증오와 괴롭힘 수위가 높아지는 걸 겪고 있는 무슬림 공동체를 지나치게 표적으로 삼을 위험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