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형구 ‘처칠(Churchill)’(2016, 알루미늄에 유화)  레이빌리지 제공
강형구 ‘처칠(Churchill)’(2016, 알루미늄에 유화) 레이빌리지 제공
높이 5.35m, 폭 4m의 대형 인물화가 관객을 노려보고 있다. 자글자글한 주름과 마구 뻗친 수염, 앙다문 입술에서 인물의 고집스러운 성격이 대번에 느껴진다. 낮은 명도의 붉은 배경에서 유일하게 반짝이는 인물의 안광이 묘한 이질감을 낳는다. 초상화가 강형구(68)의 ‘자화상’(2019)이다.

낯설게 느껴지는 건 자화상의 눈빛만이 아니다. 전시가 열리는 장소도 독특하다. 서울 논현동 한복판에 있는 건설회관에 들어서면 강형구의 대형 자화상을 비롯해 처칠, 간디, 마릴린 먼로 등 시대의 아이콘이 된 인물들의 초상화 20여 점을 만나볼 수 있다. 건설공제조합이 지난해 말까지 사무실로 사용한 곳을 리모델링한 공간으로,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해 선보인 첫 전시다.

전시된 작품들의 공통점은 하나. 잔털 한 올까지 사실적으로 묘사한 얼굴에 유난히 비현실적으로 반짝이는 눈동자를 그려 넣었다는 점이다. 강형구의 인물화는 이렇듯 리얼리즘과 허구가 뒤섞여 있다. 김종길 미술평론가는 강 작가의 작품세계를 두고 “현실주의를 기반으로 하되 창조적 상상력이 결합한 ‘허구적 현실주의’”라고 평가했다.

강형구는 세계 양대 미술품 경매회사 중 하나인 크리스티가 사랑한 남자다. 2007년 크리스티 홍콩에 출품한 고흐 초상화는 456만7500홍콩달러(약 7억7000만원)에 낙찰됐다. 추정가 50만~60만홍콩달러를 훌쩍 넘어섰다. 앤디 워홀, 살바도르 달리, 베토벤 등 이후 출품한 인물화도 전량 낙찰됐다. 그의 작품은 미국 지미카터센터, 영국 프랭크 코언 컬렉션, 서울 올림픽주경기장 등 국내외 유명 미술관들이 소장하고 있을 정도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카메라 셔터 몇 번이면 인물을 정밀하게 옮길 수 있는 시대인데도 극사실주의 초상화를 고집하는 이유는 뭘까. 1980년대 중앙대 서양화과를 졸업한 작가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돌연 미술계를 떠났다. 화랑을 운영하다 망하기도 했다. 20여 년 만에 예술의전당 개인전으로 복귀한 그는 수십 점의 자화상을 선보였다. 자신의 위치에 대해 고민하던 작가한테 대형 자화상은 자신을 돌아보는 수단이 됐던 셈이다.

이른바 ‘팔포 작가’(작품 판매를 포기한 작가)로 불리던 시절도 있었다. 그의 작품이 처음 팔린 것은 52세 때다. 200호 이상의 대형 캔버스에 스프레이와 면봉, 지우개로 수천 번 찍어 그린 작품들이 ‘가성비’가 나올 리 만무했다. 작가는 “잘나가는 작가가 아니라 작업실에서 잘 안 나가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지금도 한 해 30여 점의 작품을 묵묵히 그려내고 있다.

이번 전시에는 노동과도 같은 그의 작업 현장을 보여주는 공간도 마련됐다. 전시장 1층 아틀리에에선 작가가 작업하는 모습을 ‘직관’할 수 있다. 전시를 기획한 정나연 레이빌리지 대표는 “단 한 명의 조수도 대동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홀로 작업하는 작가의 신념을 확인할 수 있다”고 했다.

전시 제목 ‘시대의 초상’은 건설회관이라는 낯선 공간에서 미술품 전시가 열리게 된 배경을 암시한다. 강 작가는 “건설회관 등 복합문화공간의 역할이 계속 확대돼 일반 감상자도 쉽고 친밀하게 예술을 접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리길 바란다”고 했다. 전시는 4월 8일까지.

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