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지 감수성 원칙, 피해자 말은 무조건 옳다?
직장 내 성희롱, 괴롭힘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기업이 흔히 부딪히는 어려움이 있다. 가해자가 신고 행위 사실 자체를 부인하거나, 중요한 부분에서 입장을 달리하면서 행위 맥락과 의미를 피해자 주장과 달리 설명하는 경우다.

이 경우에도 기업은 사실 확정이라는 과제를 피할 수 없다. 그래서 기업은 당사자들 진술의 일관성, 진술 태도 등의 관련 정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진상을 규명하는 단계를 밟게 되는데, 이 때 소위 '성인지 감수성 원칙'이 그 위력을 발휘한다.

성인지 감수성 원칙은 2018년 대법원 판결로 처음 선언되었다. 그 후 직장 내 성희롱 등의 판결에서 자주 논의되지만, 정작 분명한 사전적 정의는 없다. 단 판결들의 취지를 보면, 성비위행위 피해자가 처한 특별한 사정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그 진술이 가진 증명력을 쉽게 배척하지 않아야 한다는 취지라 이해하면 크게 틀리지 않다.

이 원칙은 성비위 행위 사실 판단에 관한 일반원칙이다. 따라서 법원 뿐 아니라 기업도 직장 내 성희롱 사건의 사실 확정 과정상 유의해야 한다. 그 결과 기업 인사 실무에서는 직장 내 성희롱 사건에서 앞서 설명한 어려움이 닥칠 때, 기업이 성인지 감수성 원칙을 들어 쉽게 신고인 손을 들어주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되고, 이러한 경향은 직장 내 괴롭힘에 확대 적용되는 양상도 나타난다.

그러나 성인지 감수성 원칙은 직장 내 성희롱 사건에서 공정한 사실 인정이라는 목표를 달성하는 수단일 뿐이다. 예외 없는 철칙처럼 기계적으로 피해자 진술에 따라야 한다는 원칙이라고 이해해서는 안된다.

최근 이런 성인지 감수성 원칙의 본래의 뜻을 뒤돌아볼 좋은 계기가 되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2023도13081. 이하 대상판결)

대상판결에서 대법원은 성인지 감수성 원칙에 유의하면서도, 추행이 있었다고 주장한 피해자 진술에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있다고 판단했다. ‘성인지 관점’ (성인지 감수성 원칙이라고 읽어도 된다)은 "성범죄 피해자 진술의 증명력을 제한 없이 인정하여야 한다거나 그에 따라 해당 공소사실을 무조건 유죄로 판단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라며 "성범죄 피해자 진술에 대하여 성인지적 관점을 유지하여 보더라도, 진술 내용 자체의 합리성·타당성 뿐만 아니라 객관적 정황, 다른 경험칙 등에 비추어 증명력을 인정할 수 없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안에서는 “공중 밀집 장소에서의 추행죄”의 가해자로 지목된 A(aggressor)가 피해자인 V(victim)를 지하철 옆자리에 앉아서 어깨를 부비며 추행했는지가 쟁점이었다.

A에게는 여러 불리한 정황이 있었다. 지하철에서 A는 V의 바로 옆자리가 비게 되자 그 자리로 옮겨 처음 어깨를 부비고, 불편함을 느낀 V가 한 칸 옆으로 옮기자 다시 그 옆으로 당겨 자리를 옮겨 어깨 부비기를 반복하엿다. 문제의 행동이 있었을 때 이를 이상하게 여긴 목격자(다른 승객)가 핸드폰으로 당시 상황을 두 차례 촬영한 사실도 있었다.

A는 본인 행위를 전혀 기억하지 못했고, 어려서부터 앓던 자폐성 장애로 인한 '빈자리 채워 앉기에 대한 강박행동' 및 '상동행동'(자폐성 장애로 인하여 몸을 주기적으로 흔드는 등 특정한 행동을 반복적으로 되풀이하는 것)을 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1심과 2심 법원은 모두 A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유죄를 인정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2심 판결을 파기했다. A에게 유죄 성립에 필요한 고의가 있다는 점이 합리적 의심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보면, 대법원은 일단 피해자인 V 진술은 "성인지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그 신빙성을 인정함에 별다른 장애가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점은 인정했다. 그러나, (1) 이 진술에는 "V 자신이 직접 경험한 사실 만이 아니라 그러한 사실을 기초로 하여 A가 고의로 추행을 하였다고 판단한 주관적 의견이나 평가까지 상당히 포함되어 있고" (2)V와 목격자 모두 "공소사실 기재 당시에는 위와 같은 사정을 전혀 알지 못한 채 A가 당연히 비장애인임을 전제로 하여 비장애인의 관점에서 그 행위를 평가했다"고 보았다. 이를 고려할 때, V 진술만으로는 A가 추행의 고의가 있었는지 '합리적인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확신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대상 판결은 직장 내 성희롱 사건에 임하여 공정한 사실 인정과 처리를 위하여 고심하는 기업에 여러 시사점을 남긴다.

우선, 성인지 감수성 원칙 하에서도 기업이 성희롱 피해자 진술을 언제나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 행위에 이른 모든 맥락을 살펴 신중하게 사실 판단을 해야 한다는 얘기다.

대상판결을 보면 이런 시사점은 다른 해석이 있을 여지가 없을 만큼 분명하다. 그리고 굳이 대상판결을 떠나서도 이는 일반론으로도 당연하다. 하지만 지금까지 법원에서 성인지 감수성 원칙에 유의하면서 동시에 피해자 진술을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는 보기 힘들었다. 필자가 그런 취지의 대법원 판결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대상 판결을 보며, 기업과 기업을 자문하는 전문가들이 간과하고 있던 당연한 원칙을 새삼 일깨우고 사실 확정의 정도(正道)를 보여주는 대법원 판결의 엄정함을 느낀다.

기업은 앞으로 너무 쉽게, 분란을 피한다는 명목으로 편의적으로 맥락을 고려함이 없이 평면적으로 피해자 진술을 인정하는 경향을 벗어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예컨대, 직장 내 성희롱 사건에서 피해자 진술에 객관적으로 정당화되지 않는 주관적 의견이나 가치 평가는 없는지, 가해자로 지목된 직원에게 그러한 행위에 나서게 된 특별한 사정은 없었는지 유의하고, 가해자로 지목된 직원에게 충분한 방어 기회를 부여해야 할 것이다. 대상 판결에서처럼 가해자로 지목된 직원에게 정신적 문제가 있다면, 직장 내 성희롱 성립 여부나 책임 정도를 정할 때 충분히 고려해야 할 것이다.

단, 피해자 진술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그것이 피해자가 책임을 져야한다는 결론으로 바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즉,기업은 결과적으로 입증되지 않는 신고를 한 피해자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극히 신중을 기해야 한다.

사안에서 V는 A가 맞은편에서 A의 바로 옆 자리로 이동하였다가, A가 한 칸 옆으로 이동하자 다시 피해자의 바로 옆 자리로 이동하였다고 법정에서 진술했다. 그러나 목격자에 따르면, A는 V의 두 칸 옆 자리에 앉았다가 V와 A 사이에 앉은 학생이 내리자 V의 바로 옆 자리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성비위행위를 당한 피해자 기억이 완벽하지 못한 경우는 흔하다. 그리고 대상판결 결론처럼, 가해자로 의심되는 자의 특별한 사정을 모른 채 그 의도나 맥락에 대해서 잘못된 주관적 의견이나 판단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잘못된 신고라도 그것만으로는 피해자에게 불이익을 주면 안된다. 일부 잘못된 신고도 신빙성이 있을 수 있다. 대상판결 역시 일부 사실과 다르게 진술한 V의 진술이 신빙성이 있다고 인정한 것을 보면 알 수 잇다. 무엇보다 피해자가 완전히 날조하여 성희롱 신고를 하는 것은 피해자에게 그에 따르는 위험이 있음을 생각할 때 자주 생기기 어려운 일이다. 회식자리에서 있었던 성희롱 신고에 대해, 일부 진술이 CCTV 영상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신고자를 징계했다가 징계가 무효로 된 사례도 있다(2020가합56617).

대체로 피해자 진술은 그저 사실 확정에 필요한 심증 기준을 충족하지 못할 뿐이다. 형사 판결에서는 유죄를 위해서는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어야 한다는 입증 기준, 민사 판결에서는 징계사유 입증을 위해 고도의 개연성 있는 입증 기준이 활용된다. 기업이 직장 내 성희롱 사건에서 피해자 진술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대체로 고도의 개연성 입증 기준이 충족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 경우 피해자에 쉽게 불이익을 주는 것은 부당하다.

마지막으로, 대상판결은 성인지 감수성 원칙의 피상적 이해를 경계해야 한다는 메시지도 남긴다.

대상판결이 내려진 후 일각에서는 이 판결이 성인지 감수성 원칙의 후퇴라거나, 남성 위주로 구성된 대법원이 기울어진 판결을 한 것이 아닌지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다. 그러나 이런 입장에는 찬성하기 어렵다.

사법 판단은 무죄추정 원칙을 비롯한 확립된 증거 법리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성인지 감수성 원칙은 앞서 보듯이 무조건 피해자 진술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판결문을 읽으면 대상 판결의 논리에 여러 차례 고개가 끄덕여진다. 증거 법리에 맞을 뿐 아니라, A가 가진 중증 장애가 고려되는 점은 특수한 상황에 처한 약자 입장을 고려한다는 점에서 성인지 감수성 정신에 오히려 부합한다. 법리 전개나 2심 판결 문제를 지적하는 논리가 자연스럽고 무리가 없다.

성인지 감수성 원칙을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가해자로 신고된 직원의 방어권 존중에 소홀하면, 기업은 자칫 피해자를 약자로 보면서 가해자로 지목된 직원을 처음부터 가해자로 모는 마녀사냥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법을 떠나 보아도 중용을 잃은 반지성적 행태이며, 공정하고 정의롭지도 않다. 그 결과 오히려 직장 내 성희롱 제도에 대한 신뢰성을 상실하게 할 수도 있다.

기업은 가해자도 엄연히 직원으로 기업의 배려·보호 의무 대상이 된다는 점, 그리고 가해자로 지목된 직원의 징계와 관련된 불리한 사실은 기업이 입증 책임이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대상판결에서 아래의 부분을, '검사'를 '기업'으로, '합리적인 의심이 있는 경우'를 '고도의 개연성이 인정되지 않는 경우', '무죄를 선고하여야'를 '징계 사유가 없거나 감경 사유가 있다고 판단하여야'로 한번 읽어보자. 기업은 직장 내 성희롱 사건에 임하여 치우침 없이 공정해야 한다.

“A가 …추행의 고의를 부인하는 이상, … 증명책임은 여전히 검사에 있는 것이지, A가 '추행의 고의 부존재 사실'에 대한 증명책임을 부담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A가 제출한 객관적인 증거로 인하여 합리적인 의심이 있는 경우라면 무죄를 선고하여야 할 것이다.”

조상욱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노동조사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