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태펀드 운용사인 한국벤처투자는 최근 경영기획본부 산하 ESG경영팀의 이름을 전략기획팀으로 바꿨다. 벤처 투자에서 ESG(환경·사회·지배구조)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지난해 초 ESG경영팀을 신설한 지 1년도 채 안 돼 ESG 이름표를 떼어낸 것이다. 한국벤처투자가 진행해온 ESG 평가모델 확립 등의 사업이 더뎌질 가능성이 커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ESG 도입 의사 줄어든 VC

"벤처 환경 엄혹"…ESG 따지는 VC 줄었다
벤처투자업계에서 ESG를 강조하는 목소리가 작아지고 있다. 14일 한국벤처투자가 발간한 ‘VC 트렌드리포트’에 따르면 투자기업 발굴이나 심사, 사후관리에 ESG 요소를 도입할 계획이 있다고 밝힌 벤처캐피털(VC) 종사자는 전체 응답자 654명 중 40.5%로 전년(49.0%)보다 줄었다. 투자 결정과 투자 기업 관리에 ESG 요소를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커지던 2~3년 전과 분위기가 딴판이다.

설문에 응답한 한 VC 심사역은 “먹고살기 바쁜 스타트업이 ESG까지 고려할 수 있겠냐”며 “한정된 자원을 잘 활용해 사업을 진행해도 될까 말까 한 상황에 ESG를 적용하는 건 무리가 있다”고 했다. 또 다른 중견 심사역은 “VC도 스타트업도 생존과 사회적 가치 중 아직은 생존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지금까지 VC들은 ESG 이슈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출자자(LP)의 요구에 부응하는 동시에 ESG 펀드 편입을 노리겠다는 포석이었다. 하지만 벤처시장 위축으로 스타트업의 수익성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ESG 도입은 ‘배부른 소리’라는 견해에 힘이 실리는 분위기다. 스타트업얼라이언스가 VC를 대상으로 시행한 다른 조사에서 투자사들은 ESG 도입을 고려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수익률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22.7%)이라고 답했다.

○해외 ESG 펀드도 위축

한국벤처투자가 ESG경영팀에서 ESG 용어를 빼고 전략기획팀으로 개편한 것도 이런 분위기가 반영됐다는 분석이다. ESG경영팀은 모태펀드 운용을 책임지는 한국벤처투자가 ESG를 도입해 투자사들의 모범이 되겠다는 취지로 꾸린 조직이다. 하지만 이번 조직 개편으로 투자업계에 ESG 도입을 적극적으로 전파하겠다는 기조도 달라질 가능성이 커졌다. 한국벤처투자는 ESG경영팀을 개편한 대신 스타트업의 기업설명(IR) 등을 돕는 성장지원팀을 부활했다.

미국 등 해외에서도 ESG 열풍이 사그라지는 분위기다. 파이낸셜타임스(FT)와 미국 금융서비스업체 모닝스타에 따르면 지난해 1~9월 미국 내 ESG 관련 펀드에서 빠져나간 돈만 140억달러(약 18조4100억원)였다. 지난해 새로 출시된 ESG 펀드는 상반기 55개에서 하반기엔 6개에 그쳤다.

안유미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원은 “VC의 ESG 투자는 기업에 과도하게 ESG 경영을 강요하는 방향이 아니라 신생기업을 성장시키는 토대로 작용해야 한다”며 “신생기업의 특성을 고려한 ESG 가이드라인 제정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고은이 기자 kok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