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공계열 필수 교양 수업 교재인 <미적분학 v.1>이 올 한해 서울대 도서관에서 '가장 많이 빌려본 책' 타이틀을 얻었다. 인문 교양서나 소설이 아닌 전공서가 서울대 도서관에서 가장 많이 대출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뿐 아니다. '대출 횟수 톱10'에 <음악의 원리> <일반통계학> <임파워먼트 실천 매뉴얼> 등 전공 서적이 4권이나 이름을 올리는 등 교양·문학 서적의 퇴조가 뚜렷했다. 출판계는 유튜브, 넷플릭스 등으로 인해 전반적인 독서 인구가 줄어든 여파로 풀이한다. 교양·문학 서적을 읽는 사람이 급감하면서 수업을 위해 꼭 챙겨야 하는 전공서 대출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아졌다는 얘기다. 올 한해 이렇다 할 베스트셀러가 없었던 점, 대학생들의 살림살이가 빡빡해지면서 통상 구입하는 전공 서적을 빌려보려는 수요가 늘어난 것도 한몫했다는 분석이다.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관정도서관 전경 /한경DB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관정도서관 전경 /한경DB
27일 서울대 중앙도서관에 따르면 <미적분학 v.1>은 올해 총 94회 대출되며 530만여권의 장서 중 이용 빈도 1위에 올랐다. 대출 가능한 책이 5권뿐인 걸 감안하면 사실상 1년 내내 '대출 중'이었던 셈이다.

전공서들이 대출 횟수 최상위권에 포진한 현상은 이례적이다. 지금까지 서울대 도서관에서 매년 가장 많이 대출된 책은 당대 시대상을 반영한 교양서나 소설의 몫이었다. '공정한 사회'가 화두였던 지난 3년 동안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과 <정의란 무엇인가>가 1위에 올랐고, 페미니즘이 이슈였던 2019년엔 조남주의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가장 많이 읽혔다.

하지만 올해 대출 빈도 톱10 중 인문·교양서는 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와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 유발 하라리의 <호모데우스> 등 3권에 그쳤고, 소설은 한강의 <채식주의자>와 김호연 <불편한 편의점> 2권이 전부였다. 인문·교양서 4권, 소설 6권이었던 작년과는 다른 모습이다.
2023년 12월 27일 기준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최다 대출 도서
2023년 12월 27일 기준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최다 대출 도서
대학가의 독서 트렌드가 바뀐 이유는 여러 갈래다.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 취업난도 그중 하나다. 학점 관리를 위해 전공 서적에 매달리는 학생이 늘면서, 소설이 '값비싼' 취미생활이 됐다는 것이다. 지난해 입학한 박선우 씨(20)는 "다들 1학년부터 전공 수업을 챙기다 보니 소설 읽을 여유가 없다"며 "그나마 시간이 나면 OTT나 웹툰 등 빠르고 간단히 즐길 수 있는 콘텐츠를 본다"고 했다.

코로나19가 대학생들의 도서관 이용 행태를 근본적으로 바꿔놨다는 지적도 나온다. 올해 서울대 도서관의 대출 횟수는 28만7106회로 팬데믹 이전인 2019년의 72% 수준이다. 교양서적과 소설을 찾는 이용자가 급감한 반면 올해 경영대 전공서 <임파워먼트 실천 매뉴얼> 대출량은 2019년 대비 1.5배 뛰었다. 같은 기간 <음악의 원리>와 <일반통계학> 이용 빈도도 소폭 늘었다.
서울대 도서관 내부의 모습. 2021년 3월 10일 촬영. /김병언 기자
서울대 도서관 내부의 모습. 2021년 3월 10일 촬영. /김병언 기자
도서관에서 소설과 교양서를 빌리는 문화에는 익숙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읽어야 하는 전공서를 구하려 도서관을 찾는 '비대면 수업 세대' 비중이 늘었다는 의미다. 여기에 팬데믹 기간 중 학생들의 얇아진 주머니 사정이 더해지며 값비싼 전공 책을 대출하는 수요가 늘었다.

일각에선 <미적분학 v.1>의 인기 원인으로 학생들의 이과 선호 현상을 꼽는다. 2학년 때 전공을 선택하는 자유전공학부생이나 이공계열 복수전공 희망자들이 앞다퉈 책을 빌린다는 것이다. 대학원 진학을 앞둔 정용규 씨(25)는 "<미적분학 v.1>은 이공계열에 진입하려면 반드시 수강해야 하는 '수학 1·2' 수업 주교재"라며 "컴퓨터공학과나 전기·전자공학과 등을 복수전공으로 선택하려는 학생들이 뒤늦게 빌려보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미적분학 v.1>(김홍종 지음,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미적분학 v.1>(김홍종 지음,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출판업계에선 대학생들의 이러한 도서관 이용 행태가 최근 사회적으로 두드러진 실용주의적 독서 습관과 맞닿은 것으로 보고 있다. 천천히 쌓이는 교양 지식보다 눈앞의 시험 성적을 위한 책을 선호하는 경향이 뚜렷해졌다는 얘기다. 한미화 출판평론가는 "전공서들이 서울대 도서관 대출 순위 최상위권을 장악한 것은 사회가 '교양을 위한 독서'에서 '목적을 위한 독서'로 넘어갔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라고 평가했다.

사회 전반에 대한 견문을 키워야 하는 시기에 당장의 필요만을 고려한 독서 행태를 우려하는 시각도 적지 않다. 백원근 책과사회연구소 대표는 "10~20년 전만 해도 많은 대학생이 사회적으로 이슈가 된 책이나 고전을 많이 읽었고, 이를 통해 '생각하는 힘'을 길렀다"며 "대학생들이 폭넓은 기초 교양을 쌓을 수 있도록 돕는 방안을 찾아야 할 때"라고 말했다.

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