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use'에 '가정'을 붙이자 비로소 'Home'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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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강선애의 스무살 하콘 기획자 노트
얼마 전 하우스콘서트가 처음 시작된 연희동을 사무실 친구들과 함께 가보았다. 이곳은 초창기 하우스콘서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잠시 추억에 잠길 만한 곳이다.
스마트폰이 없던 때라 약도를 보면서 물어물어 길을 찾아와야 하던 골목길, 관객들에게 랜드마크처럼 이야기하던 연희파출소, 연희동의 명소이자 지근거리에서 각종 간식거리를 구입할 수 있었던 피터팬 제과, 하우스콘서트 장소로 착각해 초인종이 울리곤 했다던 어느 원로 피아니스트의 옛집….
꽤 많은 것들이 예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지만, 하우스콘서트가 열리던 집터 만큼은 달랐다. 공연이 있는 날이면 늘 하콘을 상징하는 간판이 걸리던 철제 대문의 집, 잘 가꾸어진 소나무가 드리워져 있고 때가 되면 빨간 장미 넝쿨이 대문 밖으로 넘실거리던, 딱 봐도 연식 오래되어 보이는 2층 주택 대신 5층 높이의 세련된 신축빌딩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오래된 2층 주택의 그 연희동 집을 우리는 2008년에 떠나왔다. 2002년에 하우스콘서트를 시작했으니, 집에 머문 지 6년 만의 일이었다. 엄연히 공연 이름에 ‘하우스’라는 단어가 있거늘, 정말 그 실체가 ‘집’이 아니어도 되는 걸까? 새로운 길을 떠나겠다는 박창수 선생님의 결심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지만, 수없이 많은 물음표가 머리 위에 떠다녔다. '과연 가능할까? 과연….' 우려를 뒤로한 채, 결국 하우스콘서트는 집을 떠났다.
우리는 200회 하우스콘서트를 연희동에서의 마지막 회차로 진행하고 다른 장소를 유목민처럼 옮겨 다녔다. 하우스콘서트가 단지 집이라는 공간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무한히 확장할 수 있다는, 공간과 공연의 개념을 전환하고자 했던 또 한 번의 도전이었다.
당시 하우스콘서트 열풍에 힘입어 여러 비슷한 형태의 공연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또 쉽게 없어지기도 하는 상황을 지켜보며 생각한 아이디어기도 했다. 하우스콘서트처럼 운영하고 싶다고 자문을 구해오거나, 연주자를 연결해달라는 부탁까지 여러 성격의 공간에서 연락을 자주 받던 우리가 직접 그 공간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연희동 이후의 하우스콘서트는 녹음 스튜디오와 사진 스튜디오 등에서, 강북과 강남을 종횡무진 누비며 열렸다. 공간을 확장한 것에는 일단 성공했지만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연희동 집에서는 많은 걸 갖춰 놓고 공연했다면, 다른 공간에서 여는 하우스콘서트는 매번 여행 가방을 싸고 풀어내는 일의 반복이었다.
공연마다 진행하는 녹음과 녹화 장비, 와인파티에 사용하는 각종 자재를 매번 풀어내고 정리하는 일은 편안한 ‘우리 집’에서 공연하던 시절과 비교할 수도 없이 많은 에너지와 체력이 필요했다. 거기에 공간과 일정을 맞추는 일, 무더운 시기 냉방기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눈물지었던 일, 새로 들어가는 공간의 공사가 예정보다 늦어져 애가 탔던 일 등 공간을 둘러싼 이슈는 언제나 예고 없이 찾아와 세입자의 신세를 서글프게 만들었다.
힘들게 공들인 덕분인지, 공간의 실체가 진짜 집은 아닌 하우스콘서트에 이질감을 갖는 이는 많지 않았다. 집을 떠나온 초반에는 하우스콘서트 옆에 스튜디오 콘서트라는 부제가 붙어 언론에 소개되기도 했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짧게는 5개월 길게는 10년 가까이 머물렀던 모든 공간에서의 하우스콘서트는 마치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아니, 자연스럽게 만들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 이유를 누군가는 스타 연주자들을 섭외할 수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없는 마룻바닥 음악회라는 고유의 성격을 유지하기 위한 고집과 노력, 그리고 어떠한 상황에도 공연을 유지해 온 지속성이 가장 중요한 성공의 열쇠이기 때문이다. 연희동부터 현재의 대학로까지 5개의 공간을 거쳐 온 22년간 1000회 이상의 모든 공연에서 마룻바닥 음악회라는 동일한 컨셉트를 유지해 왔다는 것이 많은 설명을 대신한다. 하우스콘서트는 집에서 시작됐지만, 22년 하우스콘서트 역사 속에서 ‘집’이라는 공간에 머문 기간은 그리 길지 않다. 회차로는 200회를, 기간으로는 만 6년을 집에서 보냈다. 이후 몇 번의 공간 이전을 거쳐 지금의 대학로 예술가의집(한국문화예술위원회 구청사)에 자리 잡았고, 이곳에서만 올해로 10년 차가 되니 이제는 거점이 되었던 공간보다 여행을 떠나온 곳에서 머문 시간이 훨씬 오래된 셈이다.
연희동 집에서의 하우스콘서트는 공간의 상징성이 커 하우스콘서트를 공연으로 부르기도, 공간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이후의 하우스콘서트는 공간이 아닌 공연의 형식 그 자체다. 집이라는 거점을 떠나오며 하우스콘서트 형식을 확장하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은 공간이라는 하드웨어보다는 콘텐츠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하우스콘서트라는 작은 공연을 통해 그 중요성을 끊임없이 말하고 있다.
연희동에서 가진 마지막 하우스콘서트에서 특별 세미나를 해주셨던 이어령 선생님의 강연을 되새겨본다. 'House'란 집이라는 실체의 하드웨어이며 여기에 '가정'이라는 소프트웨어가 더해졌을 때 비로소 'Home'이 된다는 것을 설명해 주셨다. 소프트웨어의 유무에 따라 House라는 차가운 벽돌 덩어리가 Home이 된다는 것이다. 하콘은 지금까지 우리가 거쳐온 모든 공간이 Home이 되기를, 하콘과 만난 지역의 문화예술회관조차 그 지역의 Home이 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지속성 있는 콘텐츠가 없는 공간은 차가운 벽돌 덩어리일 뿐이다.
제200회 하우스콘서트 – 이어령 강연 <예술의 공간 찾기>
스마트폰이 없던 때라 약도를 보면서 물어물어 길을 찾아와야 하던 골목길, 관객들에게 랜드마크처럼 이야기하던 연희파출소, 연희동의 명소이자 지근거리에서 각종 간식거리를 구입할 수 있었던 피터팬 제과, 하우스콘서트 장소로 착각해 초인종이 울리곤 했다던 어느 원로 피아니스트의 옛집….
꽤 많은 것들이 예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지만, 하우스콘서트가 열리던 집터 만큼은 달랐다. 공연이 있는 날이면 늘 하콘을 상징하는 간판이 걸리던 철제 대문의 집, 잘 가꾸어진 소나무가 드리워져 있고 때가 되면 빨간 장미 넝쿨이 대문 밖으로 넘실거리던, 딱 봐도 연식 오래되어 보이는 2층 주택 대신 5층 높이의 세련된 신축빌딩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오래된 2층 주택의 그 연희동 집을 우리는 2008년에 떠나왔다. 2002년에 하우스콘서트를 시작했으니, 집에 머문 지 6년 만의 일이었다. 엄연히 공연 이름에 ‘하우스’라는 단어가 있거늘, 정말 그 실체가 ‘집’이 아니어도 되는 걸까? 새로운 길을 떠나겠다는 박창수 선생님의 결심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지만, 수없이 많은 물음표가 머리 위에 떠다녔다. '과연 가능할까? 과연….' 우려를 뒤로한 채, 결국 하우스콘서트는 집을 떠났다.
우리는 200회 하우스콘서트를 연희동에서의 마지막 회차로 진행하고 다른 장소를 유목민처럼 옮겨 다녔다. 하우스콘서트가 단지 집이라는 공간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무한히 확장할 수 있다는, 공간과 공연의 개념을 전환하고자 했던 또 한 번의 도전이었다.
당시 하우스콘서트 열풍에 힘입어 여러 비슷한 형태의 공연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또 쉽게 없어지기도 하는 상황을 지켜보며 생각한 아이디어기도 했다. 하우스콘서트처럼 운영하고 싶다고 자문을 구해오거나, 연주자를 연결해달라는 부탁까지 여러 성격의 공간에서 연락을 자주 받던 우리가 직접 그 공간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연희동 이후의 하우스콘서트는 녹음 스튜디오와 사진 스튜디오 등에서, 강북과 강남을 종횡무진 누비며 열렸다. 공간을 확장한 것에는 일단 성공했지만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연희동 집에서는 많은 걸 갖춰 놓고 공연했다면, 다른 공간에서 여는 하우스콘서트는 매번 여행 가방을 싸고 풀어내는 일의 반복이었다.
공연마다 진행하는 녹음과 녹화 장비, 와인파티에 사용하는 각종 자재를 매번 풀어내고 정리하는 일은 편안한 ‘우리 집’에서 공연하던 시절과 비교할 수도 없이 많은 에너지와 체력이 필요했다. 거기에 공간과 일정을 맞추는 일, 무더운 시기 냉방기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눈물지었던 일, 새로 들어가는 공간의 공사가 예정보다 늦어져 애가 탔던 일 등 공간을 둘러싼 이슈는 언제나 예고 없이 찾아와 세입자의 신세를 서글프게 만들었다.
힘들게 공들인 덕분인지, 공간의 실체가 진짜 집은 아닌 하우스콘서트에 이질감을 갖는 이는 많지 않았다. 집을 떠나온 초반에는 하우스콘서트 옆에 스튜디오 콘서트라는 부제가 붙어 언론에 소개되기도 했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짧게는 5개월 길게는 10년 가까이 머물렀던 모든 공간에서의 하우스콘서트는 마치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아니, 자연스럽게 만들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 이유를 누군가는 스타 연주자들을 섭외할 수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없는 마룻바닥 음악회라는 고유의 성격을 유지하기 위한 고집과 노력, 그리고 어떠한 상황에도 공연을 유지해 온 지속성이 가장 중요한 성공의 열쇠이기 때문이다. 연희동부터 현재의 대학로까지 5개의 공간을 거쳐 온 22년간 1000회 이상의 모든 공연에서 마룻바닥 음악회라는 동일한 컨셉트를 유지해 왔다는 것이 많은 설명을 대신한다. 하우스콘서트는 집에서 시작됐지만, 22년 하우스콘서트 역사 속에서 ‘집’이라는 공간에 머문 기간은 그리 길지 않다. 회차로는 200회를, 기간으로는 만 6년을 집에서 보냈다. 이후 몇 번의 공간 이전을 거쳐 지금의 대학로 예술가의집(한국문화예술위원회 구청사)에 자리 잡았고, 이곳에서만 올해로 10년 차가 되니 이제는 거점이 되었던 공간보다 여행을 떠나온 곳에서 머문 시간이 훨씬 오래된 셈이다.
연희동 집에서의 하우스콘서트는 공간의 상징성이 커 하우스콘서트를 공연으로 부르기도, 공간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이후의 하우스콘서트는 공간이 아닌 공연의 형식 그 자체다. 집이라는 거점을 떠나오며 하우스콘서트 형식을 확장하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은 공간이라는 하드웨어보다는 콘텐츠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하우스콘서트라는 작은 공연을 통해 그 중요성을 끊임없이 말하고 있다.
연희동에서 가진 마지막 하우스콘서트에서 특별 세미나를 해주셨던 이어령 선생님의 강연을 되새겨본다. 'House'란 집이라는 실체의 하드웨어이며 여기에 '가정'이라는 소프트웨어가 더해졌을 때 비로소 'Home'이 된다는 것을 설명해 주셨다. 소프트웨어의 유무에 따라 House라는 차가운 벽돌 덩어리가 Home이 된다는 것이다. 하콘은 지금까지 우리가 거쳐온 모든 공간이 Home이 되기를, 하콘과 만난 지역의 문화예술회관조차 그 지역의 Home이 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지속성 있는 콘텐츠가 없는 공간은 차가운 벽돌 덩어리일 뿐이다.
제200회 하우스콘서트 – 이어령 강연 <예술의 공간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