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는 가족을 떠나 벨기에 앤트워프에 있을 때 특이한 그림을 그렸다. 이곳의 왕립미술원에 잠시 다녔는데 아마도 인체 해부학 드로잉을 하면서 그렸을 것이다. 「담배 피는 해골(Skull with burning Cigarettes)」(1886)은 비스듬한 각도로 보이는 두개골의 이빨 사이에 불타는 담배가 물려 있다.

경추, 빗장뼈, 견갑골, 늑골까지 포함하여 그렸으나 해부학적으로 제대로 위치해 있지는 않다. 그런 이유 때문에 자신이 다니던 미술원에 비난을 쏟아놓은 장난 섞인 그림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고흐는 이 그림을 자신의 자화상이라고 한다. 파멸해 가는 자신을 묘사한 그림으로 본다면 이 그림은 자신을 향한 일종의 자해와 관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반 고흐, 「담배 피는 해골(Skull with burning Cigarettes)」(1886)
반 고흐, 「담배 피는 해골(Skull with burning Cigarettes)」(1886)
자해란, 자신을 향한 통제하기 어려운 부정적 감정이나 강한 스트레스 때문에 자신을 해치거나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는 행동을 말한다. '담배 피는 해골'이 자해와 관련됨을 이해하려면 고흐가 당시 앤트워프에서 느꼈던 감정이 무엇인지 살펴야 한다. 농민 화가 밀레를 존경하며 시골로만 돌았던 고흐가 어색하고 취향에도 맞지 않은 혼잡한 대도시를 찾은 이유는 오직 하나 자신을 화가로 알리기 위해서였다. 앤트워프로 이주한 처음만 해도 화가로서의 삶에 대한 새로운 도전이자 부푼 꿈을 안고 있었다.

앤트워프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는 루벤스였다. 고흐는 이 도시에서 루벤스가 묘사했던 그 관능적이고 미끈한 육체를 지닌 여인들을 만나고 싶었다. 심지어 루벤스가 그린 종교화(성화)인 '성녀 테레사와 그리스도'를 보고도 작품 전경에 가슴을 드러낸 금발의 여인에게 마음이 끌렸다. 고흐는 이제 밀레를 버리고 루벤스의 제자가 되기로 작정한 이상 솔직히 그런 여인들과 친분을 쌓으면 본인도 근사한 화가가 될 것 같았다.

고흐는 앤트워프에 온 첫날부터 새 옷을 사서 입고 방을 마련하고 작업실로 꾸몄다. 새 캔버스와 고급 붓, 비싼 물감을 배치했다. 벽에는 당시 유행했던 다채로운 일본 판화들을 장식했다. 그리고 유명한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그곳에 있는 카페, 음악당, 무도회장, 뮤직홀 겸 버라이어티쇼 극장이었던 카페 콩세르스칼라 등에 자주 들렀다. 거기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초상화를 그려주겠다는 제안을 하면 모델도 쉽게 구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고흐가 그들과 친분을 쌓으면서 이전에 자신이 그렸던 대형 유화, 초상화, 작은 도시 풍경, 성과 성당 그림 등 다양한 작품들도 판매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고흐의 이런 바람은 예상대로 되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과도 친해질 수 없게 되자 이제 고흐는 대도시의 번잡한 술집과 사창가를 찾아다니면서 탄탄한 육체를 가진 사람들과 인맥을 쌓으려고 발버둥 쳤다. 그리고 아예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모델들에게 보수를 주고 덤으로 자신이 그린 초상화마저 선물로 주겠다고. 당시 그린 어떤 초상화도 고흐의 손에 남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급기야 테오가 주는 생활비도 부족하게 되었다.

고흐는 그동안 그렸던 농촌 사람들의 초상화를 루벤스식으로 재포장하여 판매하려는 시도도 했다. 또한 잘생긴 화가 지망생들에게 회화의 기본기를 가르쳐 레슨비를 받으려고 했지만 모두 다 실패로 끝났다. 어떻게든 자신이 가진 그림 실력으로 재정 문제를 해결하려고 간판, 식당 차림표 등 돈벌이가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가리지 않고 하려고 했지만 결국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다. 이후 삶은 고흐의 인생에서 최악의 상황이 되었다.

건강 악화와 아버지의 유령

이런 최악의 상황이 '담배 피는 해골'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특히 이 그림은 치아와 담배가 강조되어 있는데 이것은 고흐가 받았던 스트레스와 자신을 향한 부정적 감정에서 자신을 방치했던 자해와 무관하지 않다. 결국 고흐는 위장병을 잊으려고 지독스레 피워 댄 줄담배와 그 영향으로 치아의 3분의 1일을 발치하게 된다.
고흐, 「춤 추는 한 쌍」(1885년)
고흐, 「춤 추는 한 쌍」(1885년)
“지금까지 따뜻한 식사를 단 세 번밖에 못 했어.” 그곳에 간 지 한 달여 만에, 그러니까 1885년 12월 중순 고흐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다. 이전에 고흐는 농민 화가 밀레가 말한 식습관을 엄격히 지키며 강인한 체질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대도시로 이주한 후로는 불규칙한 생활 습관으로 끼니를 자주 거르고 있었고 생활에 필요한 영양소가 결핍되고 있었다. 고흐는 몸무게가 급격히 줄어들고 건강이 더욱 악화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피부에 발진이 돋더니 상처가 헐어 피가 났다. 욱신욱신 쑤시면서 신경이 곤두섰다. 몇 주 전까지는 그에게 의욕을 불러일으켰던 모든 일들이 이제 비관적으로 보였다. 결국 그는 깊은 우울증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던 12월 말 크리스마스가 되어 고흐는 또 하나의 고통에 치닫게 되었다. 고흐 전문가들은 이 고통을 고흐가 좋아한 작가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이야기'에서 '귀신 들린 사내'의 영향 때문이라고 보기도 하고 정신병이 깊어진 망상(illusion) 증상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바로 아버지의 유령이 고흐의 방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생전에 아버지가 성탄절 예배 때마다 훈계했듯이 지금 아버지의 유령이 고흐에게 날마다 나타나 그를 사정없이 꾸짖었다. 고흐는 방에 있는 게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서웠다. 고흐는 밤마다 유령을 피해 매서운 추위의 눈 덮인 거리를 끝없이 걸어 다녔다.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기보다는 자신의 사정을 들어주고 자신의 말에 맞장구쳐줄 사람들이 한없이 그리웠다. 고흐가 누릴 수 있는 성탄절의 즐거움은 오직 술집과 사창가에만 있었다. 고흐는 성탄 절기 내내 보름여간 이곳을 드나들었다.

그러는 사이 입에 생겼던 상처가 타액을 통해 잇몸, 목구멍까지 번졌다. 잇몸과 목구멍이 짓무르면서 음식을 씹거나 삼킬 수도 없게 되었고 가슴에서는 잿빛 가래가 가르랑거렸다. 몸의 모든 구멍에 악취를 풍기는 거대한 고름이 가득 차 있었다. 열이 들끓었다. 주변 사람들의 말만 듣고 자신에게 벌을 주듯 몸의 상태를 방치했던 고흐는 마침내 의사를 찾아갔다. 나선상균이 온몸에 퍼져 있단다.

고흐는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 신속하게 수은제 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심각한 부작용이 따랐다. 그는 위장에 장애가 생기면서 속이 거북하고 기름진 음식을 전혀 소화할 수 없었다. 갑작스러운 배고픔과 속쓰림을 잊으려고 파이프 담배를 계속 피워 댔다. 잇몸이 화끈거리고 마른기침이 그치질 않았다. 치아가 부식되어 손상되고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고흐는 이듬해 2월에 우선 일부 치료비 조로 50프랑을 지불하고 3분의 1에 이르는 치아를 모두 뽑았다. 래칫 렌치와 독주로만 치아를 발치하던 시절에 끔찍한 경험을 했고 제정신으로 버티기조차 힘든 상태였다.

반전의 해학: 다시 밀레의 제자로

이런 와중에도 고흐는 앤트워프에 계속 있기를 원했다. 이제는 허황된 꿈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 진정한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그러자 도시 예술가의 생활비를 줄이기 위한 묘안도 떠올랐다. 비록 서른세 살의 늦깎이 학생이지만 그곳 왕립미술원에 등록하여 10대들과 함께 초상화 공부를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방세와 물감 따위의 재료비, 특히 모델비를 아낄 수 있을 것이라 다행이었다.

하지만 막상 미술 수업을 받아 보니 신입생은 석고상만을 보고 그림을 그려야 했다. 실제 모델을 보며 그림을 그리려고 수업에 들어가면 쫓겨나기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름다운 밀로의 비너스 석고상이 모델로 제시되는 데생 수업이 있었다. 고흐는 자신의 위선적인 삶을 반성하듯 보란 듯이 농촌 여성의 몸을 그려 놓았다. '서 있는 나체 여인'(1886. 1)으로 알려진 이 그림을 통해 고흐는 다시 밀레의 제자로 돌아갔다. 이 수업은 왕립미술원에서 고흐가 참여한 마지막 수업이 되었다. 두 달 만에 학교를 그만둔 것이다.
고흐, 「서 있는 나체 여인」(1886년)
고흐, 「서 있는 나체 여인」(1886년)
왕립미술원에 다니던 두 달 동안 테크닉이 아닌, 자기성찰로 그린 그림이 '담배 피는 해골'이다. 아마도 해부학 교실에서 교육용으로 사용되는 해골을 참고하여 그렸을 것이다. 고흐는 편지에 이 그림을 자화상이라고 남겼다. 이 그림에 대한 분석가들의 견해는 대략 두 가지로 모아진다. 하나는 장난 섞인 그림이란 것과, 또 하나는 파멸해 가는 자신을 묘사한 자화상이라는 것. 그런데 분명한 사실은 고흐가 '담배 피는 해골'을 그리는 그 두 달 동안 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 자화상이 고흐 인생에 반전의 계기가 되었다.

“나는 10년 동안 감옥에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고흐는 자신을 묵묵히 바라보며 뼈만 남은 자신을 보았다. 이런저런 멋진 사람들과 어울려 화가로 인정받고 싶었지만 정작 그에게 남은 것은 친구 하나 없는 고독함이었고 죽을지도 모르는 성병과 발치로 인해 쏙 들어간 몰골이었다. 소화도 할 수 없어서 건강 회복도 어려웠다. 자신을 치유하거나 구할 수도 없었다.

당시 건강 악화와 유령 이미지 때문에 죽음을 떠올리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 이미지는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담배 피는 해골'에는 나선상균의 전염으로 다 짓무르게 되었던 자신의 입에 담배 한 개비를 물려줌으로써 반전의 해학을 보인다. 자해하던 자신을 똑똑히 관찰하고 새로운 다짐이 없었다면 이런 해학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자해는 자신에게 해를 가하는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 심리학에서는 자기상(self-image) 이해와 자기조절에 문제가 생긴 것으로 설명된다. 그러니까 자해란 지금까지 형성되었던 자기상, 이를테면 사랑받지 못한 인간이라는 자기 이미지에 자기 스스로 무의식적으로 벌을 주는 것이다. 쉽게 말해 스트레스나 긴장이 계속될 때 그것을 해소할 수 있는 적절한 방법을 모르고 자기상을 토대로 자기를 방치하는 것, 즉 자기관리에 실패하는 것이 자해인 것이다.

고흐는 가족이든 연인이든 그들과의 사랑에 계속 실패하면서 자기상 이해에 문제가 있었다. 고흐는 사랑받지 못했던 자기상을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화가라는 명분으로 멋진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새 옷으로 자기를 꾸미고 과도하게 자신의 방을 바꾸면서 자신을 드러내고자 했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을 관리하지 못하는 자책의 시작일 뿐이었다. 결과적으로 온몸에서 고름이 날 정도로 자신의 몸을 방치한 것은 자신은 사랑받지 못할 인간이라는 자기상에 무의식적으로 벌을 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담배 피는 해골'과 같은 자화상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면서 치유가 시작되었다.
화가로서의 자화상(1886년)
화가로서의 자화상(1886년)
지금 우리는 무엇에 급급한 것일까? 날마다 누구를 만나려고 나를 근사하게 꾸미는 것일까? 고흐가 망가지는 시기에 관능적인 사람들, 유명한 사람들에게 끌렸듯이 그것으로 보상하려는 것일까? 자기 자신을 살피기 전에는 자신이 스스로에게 해를 가하는 것도 알지 못한다. 새 옷을 사고 방을 고급 인테리어로 꾸미기 전에 자신의 자화상을 그려보면 어떨까. 모든 것이 다 사라지고 뼈만 앙상하게 남아도 괜찮다. 자기 자신에게 위로하듯 담배 한 개비 물려주는 그 마음만 있다면 거기에 반전의 해학이 있다. 거기서부터 시작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