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달과 윤슬이 주는 한결같은 환대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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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김현호의 바벨의 도서관
○ 하루: 반짝임의 으뜸, 윤슬과 별
보석처럼 반짝이는 것을 비롯해 화려한 물건을 탐내지 않는 편입니다만, 자연적인 현상 중에는 몇 가지 넋을 잃고 바라보는 게 있습니다. 바로 윤슬과 별입니다. 윤슬(반짝이는 잔 물결)의 반짝임은 불규칙성과 제한된 시간, 그 우연성 때문에 그리워하게 되며, 별은 오히려 언제나 변하지 않고 그 자리에 있기에 천착하게 됐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한강을 건너며 여름날 새벽에는 서광(曙光)을, 비교적 남중고도(하루 중 태양이 가장 높을 때)가 낮은 겨울에는 좀 더 뽀얗고 따뜻해 보이는 빛을 품은 윤슬이 마음을 달래 주었기 때문입니다. 일상 속에서도 작은 연못이나 물웅덩이, 하다못해 도랑이라도 있다면 윤슬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햇살이 좋은 날에는 아침 일찍부터 윤슬을 찾아 다니기도 합니다.윤슬을 향한 동경은 해가 진 이후에도 이어집니다. 그 모습이 마치 윤슬처럼 반짝이는 별 ‘플레이아데스 성단(우리말로는 좀생이 별)’이 있기 때문입니다. 딱 한번 고성능 망원경으로 관측했던 그 별은 꼭 윤슬처럼 마음을 설레게 했습니다. 다만 플레이아데스 성단이 아니더라도 모든 종류의 별빛이 항상 반갑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와 숙제를 하다가 지쳤을 때, 아내와 제가 온종일 삶의 현장에서 견디기 힘든 일을 버텨낸 날에는 주로 별을 보러 갑니다. 아이들은 어느덧 육안으로도 목성과 금성 정도는 구분해낼 정도이니 어느새 가족 모두가 별을 사랑하게 된 모양입니다. (물론 행성은 스스로 빛을 낼 수 없으니 ‘별’의 자격을 갖추지 못했지만, 그냥 ‘별’이라고 칭하겠습니다)
○ 한달: 보름달의 위로와 환대
유난히 지치고 힘들었던 어느 금요일 퇴근 길에 보름달과 마주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목에 잠시 섰는데 선명한 정도가 아니라 손에 닿을 것처럼 생생한 보름달이 떠있었습니다. 몹시 반가웠습니다.어린 시절 학교에서 까닭도 모른 채 꾸중을 들었거나 친구들과 갈등이 생기면서 종일 속상한 일을 겪고 귀가하면, 그날은 잠이 들 때까지 어머니의 얼굴과 목소리를 통해 위로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보름달을 보며 떠올린 감정은 어머니처럼 마냥 반가우면서도 울컥한 것이었습니다. 한편으로 ‘달은 계속 저 자리에 있구나’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아이들과 그림책 <부엉이와 보름달>을 함께 읽었을 때에도 주제와 상관없이 마음은 보름달만을 향해 있었으니 어쩌면 저는 한번도 그 존재를 잊은 적이 없었던 것이죠.
오래 전 드뷔시와 베토벤, 쇼팽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저마다 달빛을 바라보았을 때의 마음이 모두 달랐지만, 제가 봤던 금요일의 보름달처럼 예술가들에게도 반가움과 큰 감흥을 주었기에 위대한 작품(클레어 드 룬_Clair de Lune, 피아노소나타 14번 월광_Moonlight, 녹턴_Nocturne)을 탄생시켰을 것입니다.
사카모토 류이치가 세상을 떠나며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 하고 질문을 던졌을 때의 그 보름달도 반가움과 희망을 상징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석하고 싶습니다) 일찍이 미디어아트의 창시자이자 예술가들의 존경을 받는 선각자였던 백남준 선생은 ‘달은 가장 오래된 TV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보름달은 늘 한결 같고, TV보다 달을 더 자주 바라보는 제게 이 문장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어머니처럼 반가운 보름달을 앞으로는‘반갑고 정성스럽게 대접한다는 뜻의 환대(歡待)’라고 칭하겠습니다. 비록 한 달에 한 번뿐이지만 말입니다.
○ 한해: 껍질을 벗는 나무와 성찰
언제부터인가 일년에 한번씩 껍질을 벗는 나무를 동경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해를 오롯이 살아내고 “이 정도면 됐다”며 껍질을 벗는 모습이 마치 성찰하는 수행자 같아 고개가 숙여지기 때문입니다. 자세히 둘러보면, 우리 주변에는 껍질을 벗는 나무가 은근히 많은데, 그 만큼 위로 받을 기회가 자주 주어집니다.서애 류성룡 선생을 모시는 병산서원, 퇴계 이황선생을 모시는 도산서원 등 한국식 정원과 차경(借景, 자연의 경치를 빌린다는 의미의 한옥 건축 요소로, 우리 조상들은 창을 열었을 때 기둥과 처마 등이 만들어내는 가상의 틀을 액자처럼 간주했습니다)의 진수를 보여주는 서원에는 어김없이 배롱나무가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선비의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배롱나무의 또 다른 이름은 백일홍나무인데, 여름이 한창일 때에 흐드러지게 꽃을 피워 기쁨을 주기로 유명합니다. 세월을 머금어 빛깔이 바랜 서원 건축과 영롱한 백일홍 꽃잎이 참 조화롭기 때문입니다. 사계절 내내 아름답지 않은 나무란 없겠지만, 배롱나무는 껍질을 벗고 나서야 가장 근사한 모습을 갖게 됩니다. 추위가 오고 꽃잎이 다 사라져도 앙상하기는커녕 수려한 자태가 두고두고 기억에 남습니다. 이렇게 수려할 수가 있을까 싶습니다.
녹음이 사라지고 나서야 진짜 매력을 뽐내는 자작나무도 대표적으로 껍질을 벗는 나무입니다. 눈 내린 자작나무 숲을 거닐다 보면, 오래 전 한반도서 자취를 감춘 호랑이가 불쑥 나타날 듯 합니다. 이처럼 근사한 나무들은 껍질 하나만 벗었을 뿐인 데에도 탄성을 자아냅니다. 한 겨울은 아니었지만, 자작나무 군락지 가운데에서도 손에 꼽히는 강원도 인제군 원대리 숲을 거닐어 본 적이 있습니다. 비록 쌓인 눈이 없었어도 잎을 떨궈낸 자작나무숲은 바라보기만 해도 수묵화처럼 깊은 멋을 품고 있었습니다.
기후가 달라 (북반구 사람이 보기에) 낯선 생명체들이 주로 살아가는 남반구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도 껍질을 벗는 나무가 있습니다. 바로 유칼립투스 나무입니다. 동네 어귀마다 길을 뒤덮은 유칼립투스 나무 껍질을 치우기 귀찮다거나 지저분하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지만 기분 좋은 향을 내뿜으니 미워할 수가 없습니다. 유칼립투스 나무는 코알라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위로를 주는 모양입니다.
○ 때때로: 우아한 잉어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벼랑 위의 포뇨(2008)>에 인상적인 장면이 참 많습니다. 참혹한 쓰나미의 순간을 익살 맞은 파도로 표현했다거나 라면 위에 얹은 햄에 집착하는 포뇨를 보며 미소 짓곤 합니다.그런데 수많은 명장면 가운데에서도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 있습니다. 바로 대홍수 이후 잔잔해진 바다를 유유히 헤엄치는 물고기의 모습입니다. 영화에선 고생대 데본기에 번성했던 생명체가 대거 등장하는데 이들의 우아한 움직임에 감탄하게 됩니다. 물고기의 조상 격인 보트리올레피스, 에우스테놉테론 등이 주인공 포뇨와 소스케 곁을 한가로이 지나는 장면을 볼 때면 불현듯 비단잉어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데본기의 거대 물고기가 억겁의 시간 동안 어떤 진화를 거듭했는지에 대해선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만, 비단잉어의 그 우아한 몸짓과 서로 닮았습니다. 더군다나 비단잉어는 평균적으로 70년 이상을 살아간다고 하니, 어쩐지 그들은 진화의 비밀을 조금은 알고 있을 것 같습니다.
비단잉어를 생각하면 역시 ‘환대와 위로’가 떠오릅니다. 청계천을 따라 걷는 길에도, 국립중앙박물관의 거울못과 남원 광한루에 이르기까지, 어마어마한 시간을 살아낸 비단잉어를 보고 있으면 위로를 얻게 됩니다. 그저 느릿느릿 헤엄쳤을 뿐인데 말입니다. 운이 좋아 햇살이라도 풍부하게 비치는 날에는 비단잉어의 몸과 윤슬의 금빛 선이 만나 장관을 이루기도 합니다. 그 모습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