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가 자신의 이름으로 선보인 프랑스 살롱 출품작이 있다.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지 5년 만에 자신의 예술성을 증명하고 싶었던 성과물이다. 「감자 먹는 사람들」(1885년)은 어두운 방, 등불 아래서 한 가족이 식사하는 장면이다. 그 첫 느낌은 몹시 어둡고 우울하다. 천장이 낮고 공간도 비좁은 데다가 사람들이 입고 있는 옷마저 남루하고 칙칙하다. 그림 속 사람들은 광대뼈가 툭 불거지고 입이 돌출되어 있으며 손가락은 뼈마디가 굵고 말랐다. 하지만 이 작품은 한편으로 훈훈함을 준다. 분명 그림 자체는 어둡고 설렁한데 훈훈하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먼저 회귀본능에 대해 알아보자.

생명이 숨 쉬는 가정

‘회귀본능’이란 나이가 들어서 현재의 불안을 보상하려고 어린 시절의 집으로 돌아가려는 욕망을 말한다. 고흐는 아버지의 장례식 한 달 후에, 한 가정의 식사를 소개하면서 개인적 불행을 극복하고자 했다. 고흐는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감자 먹는 사람들」, 즉 끼니를 함께하는 식구(食口)를 소개했다.

“이 사람들은 등불 아래서 큰 소리로 대화하면서 감자를 먹었다.” 모델이 된 그루트 농부 가족은 큰 소리로 대화하고 있다. 온 식구가 함께 감자를 굽고 차를 준비하여 아침부터 힘들게 겪었던 일을 말하고 있다. 비록 단출한 음식을 나누고 있지만 이 식사는 서로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테오에게 보낸 편지(1885년)
테오에게 보낸 편지(1885년)
하지만 이 그림의 상황과 대조적으로 당시 고흐는 가족 문제로 상당한 고통을 겪고 있었다. 이미 결혼하여 아이를 양육하던 여동생 안나는 아버지의 장례식이 끝난 후에도 보모와 함께 어머니 곁에 머물렀다. 그녀는 혼자가 된 어머니를 도와 부모님 집을 최대한 빨리 정리했다. 첫 번째 과제는 장성한 오빠를 분가시키는 것이었다.

안나는 오빠가 아버지를 힘들게 한 것과 같이 어머니마저 힘들게 한다고 비난했고 이에 대해 다른 자매들의 지지까지 얻어냈다. 심지어 고흐가 좋아하던 여동생 빌레미나조차 같은 입장을 취했다. 고흐는 쓰라린 배신감과 지속적인 따돌림을 견디다 못해 결국 자신의 유산마저 가족들에게 단념한 채 집을 떠났다. 아버지 장례식 후 일주일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감자 먹는 사람들 석판화(1885년)
감자 먹는 사람들 석판화(1885년)
「감자 먹는 사람들」은 고흐의 새로운 작업실 이젤에 놓여 있었다. 고흐는 거처를 옮기기 전부터 가족의 상처를 보상하려는 듯 더욱더 이상적인 가정을 묘사하고 있었다. 농가였던 그루트 가정을 여러 차례 방문하였고, 거기서 느낄 수 있는 따스함을 캔버스에 담으려고 노력했다. 고흐는 그동안 습작했던 정물화, 주로 두상을 그린 초상화, 다양한 손동작 스케치 등 모든 것을 한 캔버스에 모았다.

그림을 그렸을 뿐만 아니라 석판으로도 만들었던 것을 더 세밀하게 캔버스에 담기로 했다. 식구들의 배치와 자세, 의자에 앉은 방법을 고민했다. 이전 작품들과 비교했을 때, 이번에는 가로 120cm, 세로 90cm의 큰 캔버스에 고흐의 아이디어가 담긴 새로운 작품이 제작되었다.

고흐는 「감자 먹는 사람들」이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겠지만 가정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는 생명력을 지닌다고 생각했다. 가정에 대한 생명력은 자신이 큰 영향을 받은 찰스 디킨스의 가정 개념을 토대로 했다. 이것은 두 가지가 강조되는데 첫째는 음식이 제공되고, 둘째는 난로에서 밝게 타오르는 불이 있다면 그 가정이 천국이라는 개념이었다. 감자와 차 한 잔이라도 불빛 아래서 서로 준비하고 큰 소리로 대화하는 농가의 저녁 식사에서 고흐는 생명력을 느꼈다. 당시의 경험을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이렇게 전했다. “가슴으로 직접 그리고 있어. 이 작품은 내가 느꼈던 것을 주제로 한 거야. 그 속에는 생명이 숨 쉬고 있어.”

아버지 ‘밀레 식 흙색’

농부 가족이 한 식탁에 둘러앉은 장면은 당시 유럽 회화에서 인기 있는 주제였다. 고흐도 이 주제를 따랐지만 다른 화가들이 사용하는 밝고 아름다운 색감 대신에 어두운 색조를 고집했다. 고흐가 이 그림을 유독 어둡게 그린 이유는 다음의 문구를 통해 유추할 수 있다. “감자가 있는 접시에 올린 손으로 직접 흙을 팠어.” 여기에서 보듯 고흐는 농부의 삶과 일상이 흙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또 다른 편지에서도 “이 농부들은 그들이 파종하는 흙으로 칠해진 것 같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고흐는 농부들의 삶을 표현하기 위해 흙 색깔을 고집했다.

그런데 흙과 관련된 중요한 사실 중 하나는, 흙과 관련된 한 인물을 존경했다는 점이다.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른 후 13일이 지난 뒤에, 고흐는 농민 화가였던 장 프랑수아 밀레를 자신의 영웅으로 인정하였다. 그리고 밀레를 언급할 때마다 ‘아버지’라고 불렀다. 밀레는 농민화에 헌신하는 모습에서 고흐의 본보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흙의 색깔을 중요시했다. 고흐는 흙의 색깔을 ‘밀레 식 흙색’이라고 불렀다.
밀레 만종(1857~1859년)
밀레 만종(1857~1859년)
이전에도 고흐는 감자를 주제로 여러 장의 그림을 그렸었다. 1883년 「감자를 파는 사람들」이나 1884년 「쟁기꾼과 감자 거두는 여인」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감자 먹는 사람들」은 이전 그림에 비해서 흙색이 더욱 강조된다. 이 그림에 있는 왼편의 젊은 여인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흙먼지로 누더기가 된 푸른 치마와 비바람과 빛에 바랜 윗도리를 입은 시골 처녀가 도시 여자보다 더 아름답다고 생각해. 만약 그녀가 도시 여자의 옷을 걸친다면 매력은 사라져 버리지.”
감자 먹는 사람들(1885년)
감자 먹는 사람들(1885년)
하지만 고흐가 선택한 흙의 색감 때문에 이 작품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낯설고 불쾌한 느낌을 주었다. 그 불쾌감 때문에 사람들은 그의 작품을 비난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중에서도 고흐의 친구인 안톤 반 라파드는 「감자 먹는 사람들」을 혹평하며 논쟁을 벌이다가 급기야 고흐와 결별하게 되었다. 고흐는 이 작품에서 흙을 활용한 새로운 시각과 표현방식을 통해 당시의 유행과는 다른 감정과 인상을 전달하고자 했다.

다른 화가들은 그림 속 농부들을 작게, 공간을 넓게 배치하여 밝은색을 사용했다. 그것으로 그림을 보는 이들의 마음을 유쾌하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고흐는 농부들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방식으로 농부들의 힘든 삶과 어려움을 솔직하게 보여 주며 색상을 어둡게 사용하여 우리가 보통 불쾌하게 여기는 면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이렇듯 어둡고 단조로운 색감으로 흙에 박힌 농민의 인상을 표현한 이 작품은 우리가 평소에 경험하지 않는 현실을 보여 주고 있다. 위에서 고흐는 이 작품에는 “생명력이 살아 숨 쉬고” 있다고 했다. 기묘한 흙 색깔에서 역설적인 생명력을 드러내려고 했던 것이다.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이제 이 작품에 묘사된 인물들을 꼼꼼히 살펴보자. 등불과 뒷모습만 보이는 소녀를 중심으로 좌우에 인물이 배치된 소박한 식탁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오른쪽에는 차를 따르는 나이가 들어 보이는 여인과 그녀를 바라보는 남자가 있는데, 그 남자는 감자로 보이는 음식을 이 여인에게 권하고 있다.

왼쪽에는 젊은 여인과 괴상한 모습의 남자가 있다. 이 괴상한 남자는 차를 따르는 나이 많은 여인을 바라보고 있지만, 그녀는 등만 보이는 전경의 소녀를 향하고 있으며 시선을 떨구고 있다. 가족들이 서로 시선을 마주치지 않아 단절감이 느껴진다. 그러나 고흐 자신은 편지에서 모델이 된 그루트 가족이 큰 소리로 대화하면서 식사를 한다고 언급했다. 현실과 상반된 표현은 작품에서 고흐가 자신만의 내면을 담아내기 위한 시도로 상세한 해석을 필요로 한다.

특히 전경 중앙에 위치한 인물이 신비롭게 묘사되어 있다. 그는 등을 돌리고 있으며, 구체적인 모습이나 형상은 없지만 감자에서 피어나는 김과 등불을 통해 후광이 빛나고 있다. 이 존재는 육체가 없는 망령인 듯 그의 것이 포함되지 않은 네 개의 찻잔만 식탁에 보인다.

연구자들은 왼쪽 남자의 의자 등받이를 확대한 부분에 ‘빈센트’라는 고흐의 이름을 발견했다고 한다. 즉 고흐는 왼쪽의 괴상한 남자가 자신임을 표시해 둔 것이다. 스탠퍼드대학교 심리학자 앨버트 루빈 박사는 이 그림이 태어나자마자 죽은 고흐의 형에 대한 어머니의 집착과 그로 인해 평생 어머니의 사랑이 결핍된 고흐의 심경을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오른쪽 나이 든 여인이 시선을 떨군 것은 마치 죽은 첫 아이의 무덤을 바라보듯이 땅을 바라보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등만 보이는 존재가 죽은 고흐의 형이라면 소녀로 묘사된 이유 등에 대해서는 여러 반론의 여지가 있다.

어찌 되었든 이 그림을 그릴 당시 고흐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마음이 어둡던 시기였다. 현재 그는 노란 불빛 아래에 모여 있는 시골 농가의 저녁 식사 장면을 바라보며, 자신의 어린 시절을 추억했을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아직도 저녁 식사 시간에 아버지가 읊어주시던 기도를 낱말 하나 놓치지 않고 외울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고흐는 가족의 식사 자리에서도 위로를 얻을 수 없다. 어쩌면 자신이 꿈꾸던 그 가정이 아니었음을 알고 인생의 덧없음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이 그림에서 강조되고 있는 흙의 색깔은 고흐 가문에 익숙한 성경의 한 문구인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창세기」 3장 19절)와 관련이 있다.

고흐는 이 그림을 프랑스 살롱에 출품한 지 5년 후 새로운 버전의 「감자 먹는 사람들」을 준비했다. 현재 우리에게는 두 편의 스케치가 남아 있다. 이 스케치가 완성된 지 몇 개월 후에 고흐는 죽음을 맞이했다. 고흐가 죽은 뒤 유족들은 고흐의 가정에 대한 소망을 받아들여 저녁 식사가 이루어지는 벽난로 위에 프랑스 살롱 출품작을 걸어두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고흐가 꿈꾼 가정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식사할 때는 늘 어머니의 사랑에 목말랐고 집을 나와서는 매 끼니를 혼자 해결해야만 했다. 그런 고흐는 죽기 전까지 작은 소망을 품고 있었다. 어차피 흙으로 돌아갈 인생이 흙먼지 속에서 하루 일과를 마치고 사랑하는 가족과 구수한 냄새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식탁에 둘러앉아, 말하고 싶은 모든 것을 맘껏 말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행복이었다.

「감자 먹는 사람들」은 처음 볼 때는 다소 불쾌한 느낌을 줄 수 있지만, 보면 볼수록 가슴이 먹먹하다가도 훈훈해진다. 어둡고 차가운 그 어떤 순간이라도 함께 뜨거운 감자와 차를 나눈다는 것과, 서로 시선이 마주쳐야 한다는 간절한 소망만으로도 따뜻한 온기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고흐가 죽기 전까지 완성하려던 그 소망, 어리광을 부리듯 마음껏 얘기할 수 있는 그 식탁은 ‘혼밥’ 하는 이 시대에도 더욱 절실하다. 단지 그림의 묘사에서만 그치지 않고 우리의 결핍된 그리움에 대한 기막힌 지적과 환기가 있기에 이 그림은 두고두고 훈훈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