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싸고 불편하지… 사실은 그것 때문에 LP가 끌린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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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코난의 맛있는 오디오
몇 년 전의 일이다. 직업상 항상 해외 매거진을 즐겨보는 편이다. 특히 오디오 관련 매거진이나 혹은 오디오, 음악과 관련된 잡지의 기사를 훑어보곤 한다. 때론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곳에서 음반이나 오디오에 관련된 칼럼을 발견하곤 하는데 해당 분야에 너무 깊숙이 들어와 있는 나머지 생각하지 못했던 비범한 비평에 놀라곤 한다.
특히 오디오 관련 삽화와 함께 글을 읽을 때면 무릎을 치며 혼자 키득키득 웃기도 한다. 예를 들어 방 안에서 혼자 새로 구입한 슈퍼 트위터의 초고역이나 서브 우퍼의 초저역에 귀를 기울이며 듣고 있는 한 오디오 마니아의 그림은 그 자체로 우스꽝스럽다. 압권은 그 미세한 차이를 느끼려 노력하는 남편에게 소리치는 아내의 모습이다. 그 작은 소리엔 귀 기울이면서 내 말은 왜 못 듣냐는 투의 잔소리다.
최근 본 가장 재미있는 삽화는 다른 의미에서 흥미롭다. 그냥 헛웃음을 치다가는 잠시 후 한 번 더 생각하게 만드는 삽화다. 우선 두 명의 중년 남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근사한 오디오 시스템 앞에 서있다. 둘 다 머리가 벗겨진 모습이 그 나이를 짐작케 한다. 머리가 완전히 벗겨진 한 명은 팔짱을 끼고 뭔가 말하고 있는 듯하고 나머지 한 명은 주머니에 가볍게 손을 찔러 넣고 있다. 아마도 미국의 주간잡지 뉴요커에 실렸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 한 장의 삽화가 내게 주는 통찰은 꽤 깊고 동시에 신선했다. 바로 아래와 같은 문장이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the two things that really drew me to vinyl were the expense and the inconvenience”.
생각해보면 하나도 틀린 말이 없다. 나 또한 LP에 끌린 건 아이러니하게도 비싸고 불편해서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예전에 턴테이블 리뷰를 쓰면서 서두에 유사한 주제로 글을 썼던 일이 퍼뜩 생각났다. 역시 느끼는 건 제각각이어도 생각하는 건 다 비슷비슷한 것 같다. 사실 타이달, 코부즈 같은 고음질 음원 서비스를 애용하고 이젠 애플뮤직, 스포티파이까지 고음질 음원을 도입한다고 하는 마당에 엘피로 빼곡히 채운 오디오 랙이나 디지털 기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저 일러스트 속의 시스템은 시대착오적일지 모른다. 하지만 들어가는 돈에 관한 부분은 차치하고서라도 음악에 대한 몰입도는 종종 편의성과 반비례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스트리밍에 비하면 수십 배 비싼 값을 치르고서라도 엘피를 모으는 것인지도 모른다. 최근엔 한동안 내 시스템에 공석이었던 CD 플레이어를 구입한 이후부터 절판된 CD를 수집하고 있다. 아니, 반대로 CD를 들어야 하다 보니 CD 플레이어를 다시 구입한 것. 온라인 스트리밍 사이트에선 찾기 어렵고 있어도 음질이 열악한 가요 혹은 고음질 음반들을 듣기 위해서다. 불편함을 따지자면 엘피보단 덜하지만 음반을 넣을 때의 적당한 긴장감과 물리적 움직임에 따른 약간의 불편은 음악에 대한 집중 상승에 대한 대가치고는 보잘 것 없는 것이다. 게다가 엘피에 비하면 CD 재생은 얼마나 편리한 문명의 이기였던가?
디지털 기술은 아날로그의 많은 것을 앗아갔다. 편의성이 좋아지면 질수록 사람은 게을러진다. 음악 듣는 일에서 이것은 서로 상충되는 의미를 갖는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음악을 소프트웨어가 찾아내 일깨워주기도 하며 내가 좋아하는 곡들만 추려 플레이리스트를 만들기도 편리하다. 스트리밍 서비스 업체는 하루 종일 플레이리스트 만들기에 바쁘다. 사람들이 이젠 무언가 찾아서 듣는 것도 귀찮아진 듯하다. 아니 디지털 포맷과 시스템이 사람을 그런 방향으로 인도했다고 하는 편이 옳다. 그리고 그들은 돈을 벌었지만 우리는 음악에 대한 보다 진지하고 깊이 있는 태도를 잃었는지도 모르다.
CD가 LP를 대체하면서 생겨났던 음악 감상 패턴의 변화는 대표적이다. 12인치 LP 한 면엔 20분 남짓 음악만 기록되어 있었고 A면이 끝나면 턴테이블 작동을 멈추고 뒤집어 B면을 들어야했다. 오토매틱 턴테이블이 아닌 경우엔 언제 끝날지 고려해 행동했다. 그 앞에 항상 있어야 안심이 되었다. 혹여 원치 않더라도 음악에 집중하게 만들었다. CD는 몇 십 분이 되었든 마음 편하게 플레이 버튼을 누르고 다른 일을 했다. 심지어 듣다가 말고 그냥 출타했다가 돌아와도 문제가 없었다. 종종 음악에 대한 집중력을 약화시켰다. 또 하나는 곡을 건너뛰는 스킵 기능이다. LP 등 아날로그 포맷이 메인이었을 때 스킵은 거의 없었다. 아날로그의 불편함은 편의성을 떨어뜨렸으나 다른 한 편으로는 앨범 전체를 모두 감상하게 만들었다. 모든 사람이 히트 싱글 단 한 곡만 좋아하지 않았다. 앨범 하나에도 저마다 자신만의 애청곡이 따로 있었고 사연이 있었다. 카라얀의 베토벤 9번 교향곡의 러닝 타임을 CD 수록 시간의 기준으로 정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사실 LP로 들을 때 더 집중하게 된다. A면을 듣다가 끊기는 부분에 지체 없이 B면으로 넘어가야 음악 감상의 지속성이 손상되지 않기 때문. 그런 과정에서 음악에 대해 다시 한 번 환기하게 되는 소득도 있다.
아나로그로 음악을 듣는 방식은 수학적 방정식으론 설명되지 않는 그 무엇이 있다는 걸 한참동안 방황한 뒤에 깨달았다. 그리고 그 가치가 절대 시간 낭비이거나 비효율이 아닌 음악을 대하는 보다 가치 있는 인터페이스라는 걸 알게 되었다.
최근엔 절판되었던 쳇 베이커의 ‘Sings’ LP를 단골 쇼핑몰에서 어렵사리 구입해 턴테이블 위에 올리고 주말의 평화로운 아침을 즐기고 있다. 스트리밍 서비스로 간간히 갈증을 축이고 있던 앨범이지만 해소되지 않던 목마름이 일거에 해소된다. 간만에 아마존에 가보니 소싯적 즐겨 듣던 페어포트 컨벤션과 멜로우 캔들 그리고 톰 웨이츠 앨범들이 LP로 다시 발매된다기에 한 달치 용돈을 쏟아부어 모두 결제해버렸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노력이든 돈이든 들인마큼 그것에 더 집중하게 되고 비로소 나에게 소중한 그 무엇이 된다.
특히 오디오 관련 삽화와 함께 글을 읽을 때면 무릎을 치며 혼자 키득키득 웃기도 한다. 예를 들어 방 안에서 혼자 새로 구입한 슈퍼 트위터의 초고역이나 서브 우퍼의 초저역에 귀를 기울이며 듣고 있는 한 오디오 마니아의 그림은 그 자체로 우스꽝스럽다. 압권은 그 미세한 차이를 느끼려 노력하는 남편에게 소리치는 아내의 모습이다. 그 작은 소리엔 귀 기울이면서 내 말은 왜 못 듣냐는 투의 잔소리다.
최근 본 가장 재미있는 삽화는 다른 의미에서 흥미롭다. 그냥 헛웃음을 치다가는 잠시 후 한 번 더 생각하게 만드는 삽화다. 우선 두 명의 중년 남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근사한 오디오 시스템 앞에 서있다. 둘 다 머리가 벗겨진 모습이 그 나이를 짐작케 한다. 머리가 완전히 벗겨진 한 명은 팔짱을 끼고 뭔가 말하고 있는 듯하고 나머지 한 명은 주머니에 가볍게 손을 찔러 넣고 있다. 아마도 미국의 주간잡지 뉴요커에 실렸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 한 장의 삽화가 내게 주는 통찰은 꽤 깊고 동시에 신선했다. 바로 아래와 같은 문장이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the two things that really drew me to vinyl were the expense and the inconvenience”.
생각해보면 하나도 틀린 말이 없다. 나 또한 LP에 끌린 건 아이러니하게도 비싸고 불편해서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예전에 턴테이블 리뷰를 쓰면서 서두에 유사한 주제로 글을 썼던 일이 퍼뜩 생각났다. 역시 느끼는 건 제각각이어도 생각하는 건 다 비슷비슷한 것 같다. 사실 타이달, 코부즈 같은 고음질 음원 서비스를 애용하고 이젠 애플뮤직, 스포티파이까지 고음질 음원을 도입한다고 하는 마당에 엘피로 빼곡히 채운 오디오 랙이나 디지털 기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저 일러스트 속의 시스템은 시대착오적일지 모른다. 하지만 들어가는 돈에 관한 부분은 차치하고서라도 음악에 대한 몰입도는 종종 편의성과 반비례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스트리밍에 비하면 수십 배 비싼 값을 치르고서라도 엘피를 모으는 것인지도 모른다. 최근엔 한동안 내 시스템에 공석이었던 CD 플레이어를 구입한 이후부터 절판된 CD를 수집하고 있다. 아니, 반대로 CD를 들어야 하다 보니 CD 플레이어를 다시 구입한 것. 온라인 스트리밍 사이트에선 찾기 어렵고 있어도 음질이 열악한 가요 혹은 고음질 음반들을 듣기 위해서다. 불편함을 따지자면 엘피보단 덜하지만 음반을 넣을 때의 적당한 긴장감과 물리적 움직임에 따른 약간의 불편은 음악에 대한 집중 상승에 대한 대가치고는 보잘 것 없는 것이다. 게다가 엘피에 비하면 CD 재생은 얼마나 편리한 문명의 이기였던가?
디지털 기술은 아날로그의 많은 것을 앗아갔다. 편의성이 좋아지면 질수록 사람은 게을러진다. 음악 듣는 일에서 이것은 서로 상충되는 의미를 갖는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음악을 소프트웨어가 찾아내 일깨워주기도 하며 내가 좋아하는 곡들만 추려 플레이리스트를 만들기도 편리하다. 스트리밍 서비스 업체는 하루 종일 플레이리스트 만들기에 바쁘다. 사람들이 이젠 무언가 찾아서 듣는 것도 귀찮아진 듯하다. 아니 디지털 포맷과 시스템이 사람을 그런 방향으로 인도했다고 하는 편이 옳다. 그리고 그들은 돈을 벌었지만 우리는 음악에 대한 보다 진지하고 깊이 있는 태도를 잃었는지도 모르다.
CD가 LP를 대체하면서 생겨났던 음악 감상 패턴의 변화는 대표적이다. 12인치 LP 한 면엔 20분 남짓 음악만 기록되어 있었고 A면이 끝나면 턴테이블 작동을 멈추고 뒤집어 B면을 들어야했다. 오토매틱 턴테이블이 아닌 경우엔 언제 끝날지 고려해 행동했다. 그 앞에 항상 있어야 안심이 되었다. 혹여 원치 않더라도 음악에 집중하게 만들었다. CD는 몇 십 분이 되었든 마음 편하게 플레이 버튼을 누르고 다른 일을 했다. 심지어 듣다가 말고 그냥 출타했다가 돌아와도 문제가 없었다. 종종 음악에 대한 집중력을 약화시켰다. 또 하나는 곡을 건너뛰는 스킵 기능이다. LP 등 아날로그 포맷이 메인이었을 때 스킵은 거의 없었다. 아날로그의 불편함은 편의성을 떨어뜨렸으나 다른 한 편으로는 앨범 전체를 모두 감상하게 만들었다. 모든 사람이 히트 싱글 단 한 곡만 좋아하지 않았다. 앨범 하나에도 저마다 자신만의 애청곡이 따로 있었고 사연이 있었다. 카라얀의 베토벤 9번 교향곡의 러닝 타임을 CD 수록 시간의 기준으로 정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사실 LP로 들을 때 더 집중하게 된다. A면을 듣다가 끊기는 부분에 지체 없이 B면으로 넘어가야 음악 감상의 지속성이 손상되지 않기 때문. 그런 과정에서 음악에 대해 다시 한 번 환기하게 되는 소득도 있다.
아나로그로 음악을 듣는 방식은 수학적 방정식으론 설명되지 않는 그 무엇이 있다는 걸 한참동안 방황한 뒤에 깨달았다. 그리고 그 가치가 절대 시간 낭비이거나 비효율이 아닌 음악을 대하는 보다 가치 있는 인터페이스라는 걸 알게 되었다.
최근엔 절판되었던 쳇 베이커의 ‘Sings’ LP를 단골 쇼핑몰에서 어렵사리 구입해 턴테이블 위에 올리고 주말의 평화로운 아침을 즐기고 있다. 스트리밍 서비스로 간간히 갈증을 축이고 있던 앨범이지만 해소되지 않던 목마름이 일거에 해소된다. 간만에 아마존에 가보니 소싯적 즐겨 듣던 페어포트 컨벤션과 멜로우 캔들 그리고 톰 웨이츠 앨범들이 LP로 다시 발매된다기에 한 달치 용돈을 쏟아부어 모두 결제해버렸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노력이든 돈이든 들인마큼 그것에 더 집중하게 되고 비로소 나에게 소중한 그 무엇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