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차례에 걸쳐 북한 핵시설 방문한 핵물리학자가 펴내
미국은 왜 북한의 핵전략 대응에 실패했나…'핵의 변곡점'
"우리가 만든 걸 좀 보시겠습니까?"
북한 영변 핵과학연구소 소장인 리홍섭 박사는 밀봉된 유리병에 든, 반 파운드에 달하는 플루토늄 조각을 보여줬다.

세계적인 핵물리학자이자 핵무기 전문가인 시그프리드 헤커(로스앨러모스국립연구소 명예소장)는 2004년 1월 북한 영변의 핵시설을 처음 방문했을 때의 기억을 이렇게 떠올렸다.

"그들의 핵시설이 잘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무엇을 달성했는지를 바깥세상에 보여주려 열심이었다.

" 당시 목격한 것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그의 생각을 흔들어놓았고 충격과 경각심을 불러왔다.

최근 국내에 번역 출간된 '핵의 변곡점'은 헤커가 2010년까지 일곱 차례에 걸쳐 북한의 핵단지를 방문하며 관찰한 사실과 정치·외교적 상황에 대한 통찰을 엮었다.

북핵 문제는 1993년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특별사찰 요구에 반발해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의사를 밝히며 본격화해 전진과 후퇴를 반복했다.

그러나 지금 북한은 2019년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이 실패한 뒤 30년의 노력을 청산하듯 대화의 문을 굳게 닫았다.

미국은 왜 북한의 핵전략 대응에 실패했나…'핵의 변곡점'
북한의 핵개발을 추적한 저자는 북한의 핵 외교를 파악하려면 이중경로 전략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라고 역설한다.

북한은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3대에 걸쳐 핵개발과 외교라는 이중경로 전략을 추구했다.

이를 통해 어느 한쪽 노선의 실패에 대비하고 자국의 불안정한 정치에 대비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의 초점은 오로지 비핵화에 맞춰졌고, 북한에 양자택일을 강요하며 정치적 중간지대를 없앴다.

저자는 그로 인해 미국이 북한의 전략에 대처하는 데 실패했다고 지적한다.

미국 정부가 이 문제를 합리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당파적 이해관계 속에서 주요한 결정을 내렸다고 주장한다.

미국은 왜 북한의 핵전략 대응에 실패했나…'핵의 변곡점'
그는 미국이 북한 대응에서 오판한 결정적인 핵심 사건을 '변곡점'(Hinge Points)이라고 칭한다.

그 변곡점으로 저자는 2009년 북한의 위성 발사 시도 이후 계속된 오바마 정부의 강경 노선, 2019년 하노이에서 열린 북미정상회담 실패 등을 꼽는다.

저자는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할 때 북한은 한 차례 핵실험을 실시했고 초보적 핵무기 다섯개 정도를 만들 만큼 플루토늄을 축적해놓았다"며 "그가 백악관을 떠나는 시점에 북한은 네 차례 더 핵실험 경험을 쌓았고 대략 25개의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충분한 플루토늄과 기농축 우라늄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미국은 왜 북한의 핵전략 대응에 실패했나…'핵의 변곡점'
또한 김정은과 트럼프가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에 이어 하노이 정상회담을 끌어내기까지 오간 친서들을 거론하며 "유례없는 소통 방식이 북한의 변화를 끌어내는 듯 보였으나 트럼프는 북한을 최대한 압박하는 작전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짚는다.

저자는 미국의 선의의 외교적 노력이 북한의 거듭된 합의 위반으로 무산됐다는 통념을 깨부수는데 무게를 둔다.

바이든 정부 역시 전반적으로 북한에 대한 무시 정책으로 회귀했다고 지적하며 워싱턴의 역할을 비판적으로 평가한다.

그는 "변변한 패 하나 손안에 없던 나라가 채 10개국도 안 되는 핵무기 보유국 중 하나, 그것도 미국을 겨냥할 가능성이 있는 단 3개국에 드는 동안, 어떻게 미정부는 번번이 그것을 막지 못하는지 답답할 따름이었다"고 회고한다.

북한은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 전략이 실패했다는 판단 아래 이제 러시아, 중국과 전략적 협력을 추구하겠다는 행보를 보인다.

한국에서 독자적인 핵무력 개발 가능성까지 들려와 한반도는 훨씬 더 위험한 곳이 됐다고 저자는 우려한다.

그러면서 북한이 워싱턴, 서울과 대화하려고 돌아설 때 이 책에 담긴 쓰라린 교훈을 새기라고 강조한다.

창비. 천지현 옮김. 612쪽.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