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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주에게 물려줄 아버지 고사성어] 뽐내는 글은 읽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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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경닷컴 더 라이프이스트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사진=게티이미지뱅크
    결혼 준비 때 벌어진 일이다. 예식장을 구하지 못해 안달 내다 지인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구했다. 토요일 오후 3시와 4시 결혼식 중간에 330분으로 끼워 넣었다. 30분 만에 결혼식을 끝낸다는 조건이었다. 예식장이 정해지니 일이 한번에 밀려들었다. 맘이 급해 청첩장은 전문업체에 가서 샘플을 보고 그 자리서 직접 문안을 만들었다. ‘저희 두 사람이 平素 저희를 아끼고 보살펴주시던 여러 어르신과 친지분들을 모시고 한 가정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부디 오셔서 축복해주시면 더없는 기쁨과 격려가 되겠습니다. 아버지의 장남 成權 올림.’ 그리고 욕심내 만년필로 글을 쓰고 동판으로 찍어 인쇄했다. 인쇄소는 이렇게 만드는 청첩장은 처음이라며 정성 들여 인쇄했다고 했다.

    아버지가 청첩할 지인들을 엄선했다며 300매만 달라고 했다. 인쇄된 청첩장은 드리기 전에 다시 봐도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청첩장을 받은 아버지는 문안을 보자 바로 이걸 나더러 보내라는 거냐고 역정을 내며 내던졌다. 부아가 나서 내뱉은 남들도 다 그렇게 합니다’라는 말 때문에 아버지 말씀만 길어졌다. 아버지는 세 가지를 지적했다. 맨 먼저 자식이 청첩인인 걸 아비가 보낼 수 있느냐?”며 격식성을 문제 삼았다. 두 번째는 청첩장은 속성상 자랑하는 글이다. 그러니 완곡하게 간청하는 문투여야 한다. ‘우리 둘이 결혼식을 하니 오라는 데 그치고 말았다. 진실성이 없다라고 꼬집었다. 아버지는 이어 “‘저희를을 왜 두 번씩이나 썼냐? ‘平素를 한자로 쓴 이유는 뭐냐?”고 캐묻고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그게 글의 여울()’이다. 읽는 이들은 거기서 저항을 느낀다. 글의 맥을 끊고 나아가 사람들을 멀리하게 만드는 교만한 글이다라며 크게 질책했다.

    아버지는 “‘자식 결혼식은 부모의 성적표고 아비의 장례식은 자식의 성적표다라는 말이 있다. 잘 키워 혼인하게 되는 자식의 혼사는 아비에게 큰 자랑거리다. 그래서 살아오며 여러 연을 맺은 지인들에게 모두 보내려 하는 거다라고 했다. 한 번 더 네가 제정신이냐?”며 역정 낸 아버지는 글은 오래 남는다. 적어도 예식장이 나와 있는 글이라 결혼 날까지는 보관할 텐데 저 글은 보존성을 잃었다라고 평가했다. 한편 부끄럽고 화가 나 도로 들고나온 청첩장은 일일이 모두 찢어 버렸다. 내 청첩장은 그대로 발송했지만, 아버지는 이튿날 거래하는 인쇄소에서 문안을 새로 써 인쇄한 청첩장을 보냈다.

    그날 밤 이슥할 때까지 아버지는 여러 고사성어를 인용해가며 전에 없이 심하게 나무랐다. 아버지는 뽐내는 글은 읽히지 않는다고 전제한 뒤, ‘예기(禮記)’ 석례편(釋禮篇)에 나오는 뽐내는 글은 읽는 사람을 멀어지게 한다[矜則不親]”라는 공자가 한 말을 설명했다. 원문은 군자의 말은 공손하고 예절 바르며, 온화하고 덕이 있으며, 명확하고 문체가 있고, 변론이 옳고 이치가 있는 것이다. 이 다섯 가지가 갖추어진 다음에야 말할 수 있다. 말이 맞지 않고, 시비를 분별하지 못하면, 그 마음은 반드시 자만하고, 그 행동은 반드시 불편하고, 그 말은 반드시 꾸미게 된다. 자만하면 친하지 못하고, 불편하면 믿을 수 없고, 꾸미면 진실하지 못하다이다.

    아버지는 교만(驕慢)은 자신의 능력이나 지위가 남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능력이나 지위를 과시하는 태도지만, 오만(傲慢)은 자신의 능력이나 지위가 남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해 남을 무시하는 태도다라고 구분 짓고 내 글은 교만하다고 했다. 이어 과시욕은 인간의 기본심리다. 그러나 이제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떡잎인 데다 서른여섯에 늦장가를 가는 주제에 세상을 다 얻은 듯이 쓴 글은 가관이다라고 혹평했다. 특히 글은 독자를 위한 것이다. 겸손해야 한다. 읽히게 써야 한다고 여러 차례 강하게 말씀했다. 아버지는 읽히게 쓰자면 쉽게 써야 하고 쉽게 쓰려면 어려운 단어나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간결하고 명확한 문장을 사용해 읽는 이가 이해하기 쉽게 해야 한다며 글의 평이성(平易性) 원칙을 지키라고 당부했다.

    아버지는 쉬운 글이라 해서 격이 떨어지는 게 아니다라며 쉬운 글이라야 이해도와 전달력을 높여 주의력을 끌고, 독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 했다. 아버지는 글의 객관성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쉽게 써야 한다이는 비단 글뿐만 아니라 일을 추진할 때도 반드시 갖추어야 할 행동 양식이고 그게 성공 비결이다라고 했다. 지금도 보관하는 청첩장을 다시 꺼내보며 아버지의 지적을 되새겨본다. 쉬운 글을 쓰기란 결코 쉽지 않다. 이제 글을 배우기 시작하는 손주들에게도 몸에 배도록 오래 연습시켜 물려줘야 할 습성이다.

    <한경닷컴 The Lifeist> 조성권 국민대 경영대학원 객원교수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독자 문의 : thepen@hankyung.com
    조성권 필진
    *약력
    우리은행 홍보실장, 서여의도지점장
    예쓰저축은행장/대표이사
    국민대 행정대학원 겸임교수
    이투데이 선임연구위원
    현 국민대 경영대학원 객원교수

    *소개 글
    20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만큼 살다 보니 그때는 듣기 싫던 잔소리가 나를 이만큼이나 키워준 거란 걸 알았습니다.
    그 지겹던 잔소리들이 모두 고사성어에서 나온 거란 걸 깨달았습니다. ‘아이는 부모 등을 보고 배운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불초(不肖)‘라는 고사성어에도 나오듯 아버지를 닮지 못합니다.
    학교 공부도 중요하지만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인성이 더없이 중요한 시대입니다.
    시집간 딸이 딸을 낳고 장가든 아들이 아들을 낳아 손주가 생기고 나니 손주들에게도 물려주고 싶은 아버지의 고사성어를 100여 개 추려 잔소리를 회억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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