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행세계 목각인형, 그들의 느릿한 움직임이 내 안에서 공명할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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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이혜원의 파리통신
썽트할 브뤼셀에서 열린
안젤리크 오브리, 루도빅 베이야흐의 2인전
전시 중 열린 <Le spectacle (공연)> 리뷰
썽트할 브뤼셀에서 열린
안젤리크 오브리, 루도빅 베이야흐의 2인전
전시 중 열린 <Le spectacle (공연)> 리뷰
벨기에 브뤼셀현대미술관(Centrale for Contemporary Art Brussels)에서 열린 안젤리크 오브리(Angélique Aubrit)와 루도빅 베이야흐(Ludovic Beillard) 의 2인전 'Le Spectacle' 공연을 지난 달 찾았다.
어딘가의 공간을 흉내낸 공간들, 그곳은 마치 드라마나 영화 촬영의 세트장처럼 현실과 닮은듯 동떨어져 있다. 반듯하게 두줄로 놓여져 있는 작은 책상과 의자들, 가짜 창틀과 솜으로 빵빵한 강아지 인형을 보고 있자면 귀엽게 꾸며진 아이들을 위한 작은 교실같기도 하고, 또 그 위에 걸린 목각인형의 뭉뚝한 인상들과 부푼 의상, 투박하고 거대한 손발을 보면 어떤 외계 종족의 공간에 잘못 들어와버린듯 이질적인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 반복되어 재생되는 영상들은 이 알 수 없는 공간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해줄 열쇠이자 우리를 이 세계관으로 몰입하게 만드는 어떤 이야기들이다. 전시 관람객을 둘러싼 목각 인형들이 극에서는 살아 움직이며 어떤 감정들을 주고 받는다. 그러나 표정이 극대화되고 과장된 폭의 몸짓으로 표현하는 여타의 가면극과는 다르다. 상영되고 있는 여러 개의 영상들은 모두 감정이 절제된 얼굴 표정과 제한된 몸짓의 표현으로 아주 사소한 것에서 부터 시작된, 우리 안의 아주 작게 심어져 있는 씨앗같은 감정에 대해서 말한다. 안젤리크 오브리와 루도빅 베이야흐는 2021년부터 듀오로 활동하기 시작한 아티스트들이다. 안젤리크는 주로 천을 다루며, 이를 내러티브가 있는 이미지로 나타내는 작업을 해왔고, 루도빅은 좀 더 거친 재료들을 연극의 요소를 가진 형태로 다듬는다. 이들은 희망이 없다고 느껴지는 상황이나 공간을 연출하고, 공허한 감정이나 관계성을 나타내거나 사회와 거리를 두는 사람들을 무대에 올려 각각 이야기의 유일한 주인공으로 등장시킨다. 등장인물들인 목각인형들은 그 형태가 기묘하다. 어떤 감정인지 읽을 수 없는 표정은 평온해 보이는 동시에 괴로워 보이기도 한다. 몸은 천과 솜으로 만들어져 부피가 크게 느껴지지만 그 무게가 없는듯 흐물거리고, 반대로 커다랗고 딱딱한 손과 발은 한없이 무거워 움직임을 저지하고 속박한다. 두 작가의 첫번째 전시를 본 것은 파리 3구에 위치한 발레히아 세트라호 갤러리에서 였다. 원래 갤러리의 구조가 큰 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가벽을 세워 더 좁고 더 희게 직사각형 공간을 만들었고, 그 공백을 가득 채우는 거대한 목각 인형들이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벽에 나있는 조그마한 창과 그 안에 재생되고 있던 영상은 이러한 설치와 공간의 변형이 어떤 공간을 흉내내기 한 의도임을 보여주었다. 창백하게 질려있는 인공적인 공간의 세계관은 벽 안의 영상에서도 이어진다. 관람객들은 먼저 좁은 공간의 면적으로 인해 이 알 수없는 코스튬같기도 하고 어떤 존재의 탈피의 흔적 같기도 한 목각인형의 나열과 계속해서 마주보게 된다. 그리고 나서 벽의 구멍을 발견하고 그 안을 들여다 본다. 벽 속에서는 아까의 그 인형들이 죽은 듯한 생명력을 가지고 무성의 대화를 하고, 끊기는 움직임으로 서로를 쓰다듬다가, 적막 속에서 격렬하게 서로 소리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우주선이라 명명된 하얗고 인위적이고 부서질 것같은 공간 속에서 끊임없이 감정을 표출하며 문에서 문으로 이동한다. 문 뒤의 공간은 연극 무대 뒤 처럼 잠시 까맣고 그들은 다시 하얀 공간으로 자꾸만 돌아온다. 파리에서 열렸던 지난 전시의 제목이자, 이번 전시에도 상영된 영상 작업의 제목인 <네가 죽어버렸으면 좋겠어>는 이런 아주 섬세하고 미묘한 감정의 발화와 그로부터 흘러나오는 카타르시즘과 고통스러움에 대해서 표현하고 있다. 다소 폭력적으로 느껴지는 이러한 제목에서는 아주 가깝고, 제일 친밀한 사이인 사람에게 죽음이 찾아오길 바라는 그 순간이 얼마나 모순되고, 당황스럽고, 어떤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듯한 해방감이 들었다가, 다시 죄책감이라는 고통을 주는지. 또는, 단순히 멍청하게 떠벌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의 입을 틀어막거나, 정도를 모르고 한계를 마구 침범해오는 사람을, 그 존재를 참기 힘든 감정이 물리적으로 변해 몸을 지배하는 상황을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표현된 죽음은, 단어 그대로의 죽음의 의미보다는, 순간의 솟구쳐오르는 격한 감정으로 인해 그 존재를 거부하게 되는, 잠깐이나마 눈 앞에 보이지 않지 않았으면 하는, 다분히 현실적이고 휘발성을 가진 분노를 나타낸다. 안젤리크와 루도빅의 작업과 전시의 제목은 <우린 다른 곳으로 가야겠어>,<불안과, 하지만 또 희망과도 함께>처럼 묘한 불안감을 자극하거나 또는 <공연>단순하고 중립적이다. 이번 브뤼셀에서 열린 전시 <공연>에서는 공간 안에 만들어진 또다른 네모 형태의 반개방적인 공간 안에서 마리오네트 퍼포먼스가 진행되었다. 무대가 주로 관객보다 위쪽에 위치해 있고 완전히 개방적인 공간에서 끈으로 위에서 움직임을 조종하는 여느 인형극과는 다르게 <공연>에서의 마리오네트 공연은 위쪽으로는 개방되어 있지만, 정작 관객은 잘 볼 수 없도록 가려진 무대에, 배우의 몸앞에 인형이 붙어있는 모습으로 기존의 공연에서의 방향성을 뒤틀었다. 인형과 배우의 몸이 겹치는 형태는 마치 인형이 그의 움직임을 그대로 따라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중간하게 분리된 이중자아 같기도해 오묘한 느낌을 들게 한다. 작가들은 이번 전시 공간의 연출의도에 대해 사람들이 그들이 꾸며놓은 무대에 들어와 공연자과 관람객으로서 동시에 존재하기를 바랬다고 말한다. 실제로 이 전시를 관람하는 동안 공간의 모든 의자에 사람들이 앉아있었던 적이 있었는데, 후에 들어온 다른 사람들이 공간 안의 사람들을 작품으로 착각했던 재밌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전시 <공연>에서는 이처럼 구분과 분리가 어려운 것들과 그 혼란에 대해서 우리가 그 어려움을 직접 체험하게 한다. 그리고 그 혼란에 대해 긍적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은 시각을 제시한다. 사람과 닮은 듯 닮지않은 이 목각인형들은 우리에게 반문하는 듯 하다. 죽음, 절망, 괴리감, 분노 등의 상황에서 우리는 정말 스스로의 모습과 감정 앞에 솔직한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말이다.
어딘가의 공간을 흉내낸 공간들, 그곳은 마치 드라마나 영화 촬영의 세트장처럼 현실과 닮은듯 동떨어져 있다. 반듯하게 두줄로 놓여져 있는 작은 책상과 의자들, 가짜 창틀과 솜으로 빵빵한 강아지 인형을 보고 있자면 귀엽게 꾸며진 아이들을 위한 작은 교실같기도 하고, 또 그 위에 걸린 목각인형의 뭉뚝한 인상들과 부푼 의상, 투박하고 거대한 손발을 보면 어떤 외계 종족의 공간에 잘못 들어와버린듯 이질적인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 반복되어 재생되는 영상들은 이 알 수 없는 공간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해줄 열쇠이자 우리를 이 세계관으로 몰입하게 만드는 어떤 이야기들이다. 전시 관람객을 둘러싼 목각 인형들이 극에서는 살아 움직이며 어떤 감정들을 주고 받는다. 그러나 표정이 극대화되고 과장된 폭의 몸짓으로 표현하는 여타의 가면극과는 다르다. 상영되고 있는 여러 개의 영상들은 모두 감정이 절제된 얼굴 표정과 제한된 몸짓의 표현으로 아주 사소한 것에서 부터 시작된, 우리 안의 아주 작게 심어져 있는 씨앗같은 감정에 대해서 말한다. 안젤리크 오브리와 루도빅 베이야흐는 2021년부터 듀오로 활동하기 시작한 아티스트들이다. 안젤리크는 주로 천을 다루며, 이를 내러티브가 있는 이미지로 나타내는 작업을 해왔고, 루도빅은 좀 더 거친 재료들을 연극의 요소를 가진 형태로 다듬는다. 이들은 희망이 없다고 느껴지는 상황이나 공간을 연출하고, 공허한 감정이나 관계성을 나타내거나 사회와 거리를 두는 사람들을 무대에 올려 각각 이야기의 유일한 주인공으로 등장시킨다. 등장인물들인 목각인형들은 그 형태가 기묘하다. 어떤 감정인지 읽을 수 없는 표정은 평온해 보이는 동시에 괴로워 보이기도 한다. 몸은 천과 솜으로 만들어져 부피가 크게 느껴지지만 그 무게가 없는듯 흐물거리고, 반대로 커다랗고 딱딱한 손과 발은 한없이 무거워 움직임을 저지하고 속박한다. 두 작가의 첫번째 전시를 본 것은 파리 3구에 위치한 발레히아 세트라호 갤러리에서 였다. 원래 갤러리의 구조가 큰 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가벽을 세워 더 좁고 더 희게 직사각형 공간을 만들었고, 그 공백을 가득 채우는 거대한 목각 인형들이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벽에 나있는 조그마한 창과 그 안에 재생되고 있던 영상은 이러한 설치와 공간의 변형이 어떤 공간을 흉내내기 한 의도임을 보여주었다. 창백하게 질려있는 인공적인 공간의 세계관은 벽 안의 영상에서도 이어진다. 관람객들은 먼저 좁은 공간의 면적으로 인해 이 알 수없는 코스튬같기도 하고 어떤 존재의 탈피의 흔적 같기도 한 목각인형의 나열과 계속해서 마주보게 된다. 그리고 나서 벽의 구멍을 발견하고 그 안을 들여다 본다. 벽 속에서는 아까의 그 인형들이 죽은 듯한 생명력을 가지고 무성의 대화를 하고, 끊기는 움직임으로 서로를 쓰다듬다가, 적막 속에서 격렬하게 서로 소리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우주선이라 명명된 하얗고 인위적이고 부서질 것같은 공간 속에서 끊임없이 감정을 표출하며 문에서 문으로 이동한다. 문 뒤의 공간은 연극 무대 뒤 처럼 잠시 까맣고 그들은 다시 하얀 공간으로 자꾸만 돌아온다. 파리에서 열렸던 지난 전시의 제목이자, 이번 전시에도 상영된 영상 작업의 제목인 <네가 죽어버렸으면 좋겠어>는 이런 아주 섬세하고 미묘한 감정의 발화와 그로부터 흘러나오는 카타르시즘과 고통스러움에 대해서 표현하고 있다. 다소 폭력적으로 느껴지는 이러한 제목에서는 아주 가깝고, 제일 친밀한 사이인 사람에게 죽음이 찾아오길 바라는 그 순간이 얼마나 모순되고, 당황스럽고, 어떤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듯한 해방감이 들었다가, 다시 죄책감이라는 고통을 주는지. 또는, 단순히 멍청하게 떠벌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의 입을 틀어막거나, 정도를 모르고 한계를 마구 침범해오는 사람을, 그 존재를 참기 힘든 감정이 물리적으로 변해 몸을 지배하는 상황을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표현된 죽음은, 단어 그대로의 죽음의 의미보다는, 순간의 솟구쳐오르는 격한 감정으로 인해 그 존재를 거부하게 되는, 잠깐이나마 눈 앞에 보이지 않지 않았으면 하는, 다분히 현실적이고 휘발성을 가진 분노를 나타낸다. 안젤리크와 루도빅의 작업과 전시의 제목은 <우린 다른 곳으로 가야겠어>,<불안과, 하지만 또 희망과도 함께>처럼 묘한 불안감을 자극하거나 또는 <공연>단순하고 중립적이다. 이번 브뤼셀에서 열린 전시 <공연>에서는 공간 안에 만들어진 또다른 네모 형태의 반개방적인 공간 안에서 마리오네트 퍼포먼스가 진행되었다. 무대가 주로 관객보다 위쪽에 위치해 있고 완전히 개방적인 공간에서 끈으로 위에서 움직임을 조종하는 여느 인형극과는 다르게 <공연>에서의 마리오네트 공연은 위쪽으로는 개방되어 있지만, 정작 관객은 잘 볼 수 없도록 가려진 무대에, 배우의 몸앞에 인형이 붙어있는 모습으로 기존의 공연에서의 방향성을 뒤틀었다. 인형과 배우의 몸이 겹치는 형태는 마치 인형이 그의 움직임을 그대로 따라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중간하게 분리된 이중자아 같기도해 오묘한 느낌을 들게 한다. 작가들은 이번 전시 공간의 연출의도에 대해 사람들이 그들이 꾸며놓은 무대에 들어와 공연자과 관람객으로서 동시에 존재하기를 바랬다고 말한다. 실제로 이 전시를 관람하는 동안 공간의 모든 의자에 사람들이 앉아있었던 적이 있었는데, 후에 들어온 다른 사람들이 공간 안의 사람들을 작품으로 착각했던 재밌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전시 <공연>에서는 이처럼 구분과 분리가 어려운 것들과 그 혼란에 대해서 우리가 그 어려움을 직접 체험하게 한다. 그리고 그 혼란에 대해 긍적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은 시각을 제시한다. 사람과 닮은 듯 닮지않은 이 목각인형들은 우리에게 반문하는 듯 하다. 죽음, 절망, 괴리감, 분노 등의 상황에서 우리는 정말 스스로의 모습과 감정 앞에 솔직한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