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2번째 높은 411m 건물에 전국 각지 소방관과 함께 도전
"로봇·드론 등 첨단 화재진압·인명구조 장비 도입 시급"
엘시티 101층 산소통 매고 올라보니…초고층 화재 대비 훈련
'헉∼ 헉∼'
호흡은 망가진 지 이미 오래.
한발 한발이 천근이다.

빌려 입은 소방관 방재복 안은 땀범벅이다.

등에 멘 산소통은 계단을 오를 때마다 몸을 옥죄어 왔다.

한층만 더, 한층만 더….
걸어도 걸어도 쉽게 다가오지 않을 것 같았던 100층이라는 숫자가 어느새 눈앞에 있었다.

마지막 있는 힘을 쥐어짜 101층 결승선에 몸을 던졌다.

가쁜 숨이 터지며 몸이 반으로 푹 꺾였다.

엘시티 101층 산소통 매고 올라보니…초고층 화재 대비 훈련
25일 오전 부산 해운대 엘시티(LCT)에서 전국소방공무원 계단 오르기 대회가 열렸다.

소방관들의 노고를 조금이나마 느껴보려는 취지에 기자도 무거운 방재복을 빌려 입고 도전에 나섰다.

높이 411m의 엘시티는 551m 롯데월드타워 다음으로 높은 건물로, 우리나라에서 초고층 건물이 가장 많은 부산을 상징하는 곳이기도 하다.

엘시티 1층에서 101층 정상까지 계단은 모두 2천372개.
지난해 방화복과 산소통을 맨 채 엘시티 101층을 23분 48초에 가장 먼저 올라간 충북 청주 동부소방서 윤바울 소방교는 이번 대회에서 21분 03초로 기록을 더 당기며 1등을 차지했다.

이는 1개 층, 약 23개의 계단을 12.5초에 오르는 속도로 101층을 꾸준히 올라야 나올 수 있는 기록이다.

윤 소방교는 "술을 끊었고 한 달간 달리기, 근력강화운동을 열심히 준비했지만 올해도 20층부터 힘들었다"며 "꾸역꾸역 참고 올라갔는데 결과가 좋았다"고 말했다.

올해엔 지난해보다 670명보다 많은 전국 소방공무원 895명이 참가해 대회 규모가 더 커졌고 그만큼 경쟁도 더 치열했다.

정년을 한해 앞둔 최고령 참가자인 대구 중부소방서 서정관 소방경의 분투도 빛났다.

서 소방경은 "방화복을 입고 완주하는 모습을 후배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며 "고층 건물 화재에 대비해 평소 많은 노력과 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대회가 끝난 뒤 소방관들은 엘시티 계단을 오르며 실제 화재 등의 긴급 상황이라면 무엇을 가장 먼저 고려했을지 궁금해 물어봤다.

인명을 구조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우선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한 소방관으로부터 들은 대답은 의외였고 재난 구조활동이 나아가야 할 길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방화복을 입고 완주한 대전 동부소방서 소속 방덕귀(49) 소방장은 "재난 상황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순발력이 중요하다"며 "하지만 소방관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그것을 이루지 못하면 작전 실패"라고 말했다.

현재 소방 당국이 보유한 고가 사다리차가 작전을 펼칠 수 있는 최대 높이는 지상 23층, 70m 정도다.

고가 사다리차에서 물을 쏠 수 있는 한계는 50층 정도로 높이 411m, 101층에 달하는 엘시티 같은 초고층 건물에서는 어림도 없는 수준이었다.

첨단 초고층 건물에는 화재 등에 대비한 비상용 엘리베이터나 피난안전구역이 있지만 이마저도 여의찮은 경우엔 소방관의 직접 구조가 불가피하다.

엘시티 101층 산소통 매고 올라보니…초고층 화재 대비 훈련
2001년 미국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빌딩이 알카에다의 공격을 받은 9·11 테러 때 수백명의 소방관들이 상층부에 고립된 인명을 구하러 1층에서 계단으로 걸어 올라가다가 건물이 무너져 내리는 바람에 숨졌다.

세계 역사상 단일 사건으로 가장 많은 340명의 소방관이 숨졌다.

당시 세계무역센터 최상층 높이가 411m로 공교롭게도 이날 소방관들이 오른 엘시티 높이와 같았다.

화재·재난 현장에서 소방관의 사명감에만 기대어 구조활동을 펴는 것은 너무 가혹하고 큰 희생을 담보할 수밖에 없다.

로봇과 드론 등을 활용한 첨단 화재진압·인명구조 장비가 시급히 개발돼야 할 이유다.

2013∼2022년 10년간 순직한 소방관은 모두 41명이며 이 중 13명이 화재 진압 현장에서 숨졌다.

같은 기간 직무 중 다쳐 공상이 승인된 소방관은 6천909명이었고 이 중 화재 진압 과정에서 다친 이는 1천472명이었다.

소설가 김훈은 2021년 11월 9일 소방의 날을 기념한 헌정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살려서 돌아오라, 살아서 돌아오라.'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