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 손 내민 시진핑…한국판 '디리스킹' 고민할 때다
"우리의 관계는 흑백이 아니고 대응 역시 흑백일 수 없다.

디커플링(decoupling)이 아니라 디리스킹(de-risking)이 필요한 이유다". 지난 4월6일 에마뉴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중국을 찾은 우즈룰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이 시진핑 국가주석에게 한 말이다.

전방위 대중 압박 정책을 펴는 미국과 다르게 온건한 위험회피 전략을 펴겠다는 공개 언급이었다.

미국과 보조를 맞춰 중국을 체제적 라이벌로 규정해온 유럽연합의 태도가 달라진 것이었다.

'진영 대 진영' 싸움으로 커져 버린 미·중 패권경쟁 속에서 유럽의 이익을 어떤 식으로든 지켜보려는 고민이 읽혔다.

흥미로운 대목은 디리스킹이라는 개념을 미국이 곧바로 넘겨받은 것이다.

같은 달 27일 브루킹스연구소 연단에 선 제이크 설리번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우리가 바라는 것은 중국과의 디커플링이 아닌 디리스킹과 다변화"라며 "우리의 목표는 대중 고립이 아닌, 산업 공급망의 유연성과 안보"라고 말했다.

미국의 변화된 입장은 그 다음달 20일 히로시마 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에서 발표된 공동성명에 명문화됐다.

이는 디리스킹이 미국이 주도하는 서방진영, 즉 글로벌 웨스트(Global West) 대중정책의 새 개념으로 자리매김하는 계기가 됐다.

특히 "미중관계가 조만간 해빙될 것으로 믿는다"고 한 조 바이든 대통령의 언급은 미·중 양국 간 소통의 물꼬를 텄다.

6월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 7월 재닛 옐런 재무장관, 8월 지나 러몬드 상무장관 등 고위급 인사의 방중이 러시를 이룬데 이어 설리번 국가안보보좌관과 왕이 중국 외교부장이 9월 중순 몰타에서 회동했다.

11월로 예상되는 미·중 정상회담의 사전 정지 작업임은 물론이다.

[논&설] 손 내민 시진핑…한국판 '디리스킹' 고민할 때다
레드라인까지 건드리며 중국을 옥죄던 미국이 디리스킹을 공식화하고 나선 까닭은 뭘까.

일단은 탈중국화가 자국의 이익을 침해한다는 유럽과 동맹국들의 불만이 컸다.

그러나 미국 역시 미·중 패권 다툼 장기화에 따른 경제적 피해를 줄여야 할 처지다.

물론 미국 대중정책의 근본 기조가 바뀐 것은 결코 아니다.

중국의 군사·기술적 굴기를 억제하면서도 미국 경제에 미칠 수 있는 위험을 최소화하려는 일종의 위기관리 전략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중국도 미국의 디리스킹을 외교적 수사로 여기면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대미 강경노선을 고수하고 있다.

그러나 미·중 간 고위급 대화와 소통의 빈도와 폭이 커지면서 양국 관계의 가변성은 커지고 있다.

미·중 패권 경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운신의 폭이 좁은 한국으로서는 양강 관계 변화의 흐름을 정확히 주시하며 기회의 창을 엿볼 필요가 있다.

패권 경쟁의 장기화는 한국 외교에 중대한 위험 요인이다.

대중 경제의존도가 높은 한국의 경제·외교적 피해로 이어질 소지가 다분하다.

인플레이션 감축법이나 대중 반도체 수출 규제에서 한국의 이해가 충분히 반영되지 못한 것이 한 예다.

동맹인 미국과 적극 소통하는 한편으로, 중국과는 불필요한 외교 마찰을 줄이며 전략적 소통을 강화하는 한국판 '디리스킹' 전략이 필요하다.

[논&설] 손 내민 시진핑…한국판 '디리스킹' 고민할 때다
외교소식통들 사이에서는 최근 한국을 대하는 중국의 행보에서 다소간의 초조감이 읽힌다는 얘기가 나온다.

자신의 영향권 하에 놓인 것으로 여겼던 한국이 동맹인 미국은 물론이고 불편한 사이였던 일본과도 손을 잡으며 3국간 사실상 '준(準) 동맹체제'에 가까운 관계를 구축한 데 따른 당혹스러움이 있다는 것이다.

최근 관계 개선을 서두르려고 한국의 오피니언 리더들을 잇따라 초청하고 있는 것도 이런 배경이라는 풀이가 있다.

시 주석이 23일 항저우 아시안게임 개막식 참석차 방중한 한덕수 국무총리를 만나 "방한 문제를 진지하게 검토하겠다"고 먼저 손을 내민 것은 의미심장하다.

물론 한국 사회 저변을 파고들며 친중 세력화를 꾀하는 '공작적' 태도는 반드시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국익 관점에서 유럽과 미국의 디리스킹을 모델로 새로운 대중정책을 짤 필요가 있다.

러시아와 북한의 위험한 밀착을 제어하는 차원에서도 중국과의 관계 개선은 중요하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되는 게 국제외교 무대의 현실이다.

가치 연대를 근간으로 삼는 원칙론을 견지하면서도 방법론에서는 국익 관점의 전략적 유연성을 갖기를 한국 외교에 기대해본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