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남미의 국민화가 페르난도 보테로.
91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남미의 국민화가 페르난도 보테로.
‘남미의 피카소’라 불린 콜롬비아 출신 세계적인 화가 겸 조각가 페르난도 보테로가 15일(현지시간) 세상을 떠났다. 향년 91세. 엘티엠포 등 현지 매체는 이날 모나코의 자택에서 폐렴 등 지병으로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91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남미의 국민화가 페르난도 보테로.
91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남미의 국민화가 페르난도 보테로.
보테로는 1932년 콜롬비아 메데인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열두 살 때 삼촌의 권유로 투우사 양성학교에 입학해 틈틈이 그림을 익혀 1948년 일러스트레이터로 그림 인생을 시작했다. 스무 살 유럽으로 건너간 뒤에는 벨라스케스, 고야 등 거장들의 작품을 보고 모사하며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패러디한 ‘12세의 모나리자’ 등이 대표적이다.
91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남미의 국민화가 페르난도 보테로.
91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남미의 국민화가 페르난도 보테로.
그는 르네상스 명화를 비틀며 자신의 스타일을 굳혔다. 미술사의 명작들에 부여된 권위주의를 해체하고 웃음을 자아내게 만들고선 거장들에 대한 '경의'라고 표현했다. 70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자신만의 독자적 예술의 경지를 개척해온 보테로는 피카소와 함께 평가되면서 '남미의 피카소'라는 별칭으로 세계인의 사랑을 받았다. 그의 고향인 콜롬비아 보고타는 2022년을 '보테로의 해'로 지정했다. 그의 작품은 전세계의 경매에서 억대의 가격에 거래된다.

보테로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공기를 넣은 풍선처럼 잔뜩 부풀려진 작품 속 인물들이다. 그가 그린 인물들은 모두 작은 눈코입, 터질 듯 통통한 볼살과 몸집을 하고 있다. 밝고 다채로운 색감이 사용된다는 것도 보테로 작품의 특징이다. 이를 통해 남미 특유의 다채로운 색감과 풍만함, 유머를 표현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2018년 10월 콜롬비아의 거장 페르난도 보테로의 모습.
2018년 10월 콜롬비아의 거장 페르난도 보테로의 모습.
보테로는 사망 한두 해 전까지도 활발하게 활동하며 약 3000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비례에 대한 상식을 뒤집고 새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한 그는 때론 희화화한 모습으로 삶의 단면을 표현해 우리 삶 속에 숨겨진 희망을 발견하도록 이끌었다.

보테로는 2009년 6월 서울 덕수궁미술관에서 열린 ‘페르난도 보테로 전’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적이 있다. 당시 기자들과 만난 그는 자신의 작품에 관해 “지오토, 라파엘로 등 양감을 중요시하는 이탈리아 작품들에서 영향을 받았다”며 “양감이 감성적인 것을 건드린다고 생각해 그런 작품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그림에서 중요한 것은 색채와 구성, 드로잉, 형태 등이며 나는 그 요소들 간의 연결된 부분을 찾고 있다”고 했다.

그는 생전 제작된 다큐에서 자신의 화풍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저는 뚱뚱한 여자들을 그리는 게 아니에요. 남자·동물·풍경·과일의 관능적 느낌을 표현하는 거예요. 그런 풍만함과 넉넉함이 좋은 거죠. 현실은 상당히 메말랐으니까요. 예술이란 삶의 잔인함에서 벗어나게 하는 아름다움과 존엄성의 자리입니다."
91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남미의 국민화가 페르난도 보테로.
91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남미의 국민화가 페르난도 보테로.
그는 미술가로서 사회적 불평등과 부조리를 고발하는 데에도 주저하지 않았다. 2003년 이라크 아부 그라이브 수용소에서 자행된 미군의 포로 학대를 생생하게 고발하는 이라크판 ‘게르니카’를 2005년 완성했다. ‘게르니카’는 파블로 피카소의 걸작 중 하나로,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소도시 게르니카가 나치 독일 공군기에 의해 무차별 폭격을 받아 폐허가 된 현장을 담고 있는 작품. 당시 보테로는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전 세계가 폭력과 만행이 무참하게 짓밟고 지나간 현장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그림을 그렸다. 만약 피카소가 없었더라면 그 누가 게르니카의 학살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겠는가”라고 했다.
91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남미의 국민화가 페르난도 보테로.
91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남미의 국민화가 페르난도 보테로.
그의 별세 소식이 전해지자 콜롬비아 보고타 등 세계 곳곳에선 추모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쿠스타보 페드로 콜롬비아 대통령은 이날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우리의 전통과 결함의 화가, 미덕의 화가인 페르난도 보테로가 세상을 떠났다”고 발표했다. 보테로의 고향 메데인시는 7일간 애도 기간을 선포했다.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