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시연이 인도한 리게티…소리로 풍경화를 그렸다
베토벤으로 시작해 라벨과 리게티에 이르기까지 매 프로그램 음악의 색깔이 달라졌다. 작곡가의 음악 언어를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는 작품들로만 음악회가 구성되니, 한 회차의 공연 안에서도 서양 음악사의 결정적인 순간들을 경험할 수 있었다.

1부는 피아니스트 이진상이 만드는 베토벤의 시간이었다.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을 협연한 이진상의 연주에서 음악의 다양한 모습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풍부한 상상력을 연주로 녹여냈을 뿐만 아니라, 작품 곳곳에 투영시킨 아이디어도 번뜩였다. 특히 피아니스트에게 상상력을 발휘할 여지를 많이 줬던 1악장이 그랬다.

작품 내내 소리의 울림도 굉장히 안정적이었는데, 순간적으로 변하는 다이내믹에도 피아노의 톤은 흔들리지 않았다. 또 베토벤의 작품을 피아노로 연주하고 있지만, 이진상 피아니스트는 때로는 규모를 키워 오케스트라의 울림을 만들었다. 그 울림을 만드는 기술이 탁월했을 뿐만 아니라 그 때마다 선택한 포인트들도 굉장히 설득력이 높았다. 덕분에 장대한 규모의 1악장과 3악장 사이에서 고요한 2악장이 부각될 수 있었다. 더욱 더 피아노의 독백처럼 느껴졌다.
성시연이 인도한 리게티…소리로 풍경화를 그렸다
2부는 리게티와 라벨의 작이 연주되었다. 두 작품 모두 작곡가의 상상력이 극적으로 발휘된 작품이다. 특히 연주회 마지막으로 연주된 라벨의 ‘어미 거위’ 전곡은 장면 장면 동화적인 요소들로 가득했다. 성시연 지휘자는 작품이 가진 색채감과 동화적인 효과음들을 적절하게 연출해 무리 없이 관객들을 마지막 ‘요정의 정원’까지 인도했다. 한경아르떼필하모닉 백수련 악장의 활약도 모든 장면에서 돋보였다. 자신의 솔로 파트를 수월하게 소화하며 관객들을 동화 속에 더욱 몰입하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이날 연주회에서 가장 특별한 무대는 리게티의 ‘콘서트 로마네스크’였다. 사실 2023년은 죄르지 리게티의 탄생 100주년이지만, 라흐마니노프 탄생 150주년에 가려져 빛을 보지 못했다. 라흐마니노프의 150주년을 기념하는 공연들은 넘쳐났지만, 리게티의 공연은 상대적으로 소외됐다. 그런 이유로 한경아르떼필하모닉이 이날 연주회에서 ‘콘서트 로마네스크’를 선택한 건 특별했다. ‘콘서트 로마네스크’는 리게티의 음악적 배경을 살펴볼 수 있는 다큐멘터리 같은 음악이기 때문이다.

작품의 제목처럼 각 악기 파트들은 자신만의 목소리로 민속 선율들을 노래했다. 그리고 지휘자는 관객들에게 이 노래들이 어떻게 발전해 나가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려고 시도했다. 물론 작곡가의 언어가 단원들에게도 생소했기 때문에, 그 독특한 리듬을 완벽하게 소화하진 못했지만, 이 음악에서 줄 수 있는 심상은 충분히 전달되었다.
성시연이 인도한 리게티…소리로 풍경화를 그렸다
3악장과 4각장에선 호른의 역할이 작품의 분위기를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콘서트 로마네스크’는 한 대의 호른이 다른 호른들과 조금 떨어져 배치되는데, 이날 롯데콘서트홀에선 무대 뒤편에 한 대의 호른을 따로 배치했다. 이처럼 섬세하게 조율된 연주는 카르파티아 산맥 저 멀리서 들려오는 듯한 소리를 효과적으로 연출했다.

특히 음악의 마지막 장면은 한편의 풍경화를 떠올리게까지 했다. 산맥 너머 메아리가 울리는 것처럼 호른이 연주되었고, 동시에 백수련 악장이 만드는 새소리가 아주 잘 어우러졌다. 지휘자와 오케스트라는 소리들을 정교하게 다듬어, 무대 위에 멋진 풍경화를 만들어 낸 것이다.

‘콘서트 로마네스크’가 처음 세상에 알려졌을 땐 굉장히 독특한 음악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실제 무대에서 연주되기까지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만 했다. 하지만 이날 한경아르떼필의 연주가 끝나고선 큰 환호가 터져 나왔다.

음악을 친절하게 전달하려는 지휘자의 노력과 이 음악이 주는 야성적이고 강렬한 분위기가 그만큼 관객들을 설득했기 때문이다. 모든 공연이 끝나고 ‘콘서트 로마네스크’의 마지막 악장이 앙코르로 다시 한번 연주되었다. 죄르지 리게티의 탄생 100주년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허명현 음악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