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방가로 유치장 가는 걸 민주화 운동이나 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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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정준모의 아트 노스탤지어 - 한국의 실험미술 (4)
1960~70년대를 관통하면서 치열하게 열정적으로 실험과 도전을 거듭해 온 당시의 젊은 20~30대 작가들의 고군분투는 새로운 예술을 두고 내적 갈등도 컸지만, 외적 즉 사회의 이해와 동의를 얻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당시 그들의 행위와 작업은 전통적인 수묵채색화의 틀 속에 갇혀있는 일반 국민의 고정 관념과 맞닥뜨려야 했다. 새로운 미술에 관심과 이해를 갖춘 일부 지식인을 제하고는 모두 이들의 행위와 작업을 치기 어린 장난처럼 여겼다. 특히 해프닝은 “웃지 못할 촌극”정도로 인식되었다.
수천 년간 전통처럼 지켜온 농경문화와 유교문화가 쉽게 새로운 서구의 모더니즘을 수용하거나, 아직 익숙하지 않은 서구의 미학이 관습의 규범으로 자리 잡지 못한 상황에서 이들의 반예술, 반문명, 반 합리주의를 표방한 새로운 예술이 외면당하는 것은 인지상정이었다.
따라서 이들 행위와 예술은 당시 보도에 의하면 ‘예술적(?) 쇼’정도로 인식되었다. 이들의 현실인식이나 자신들의 작업에 대한 이해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최초의 해프닝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을 실연한 후 다음과 같이 자신들의 작업을 “해프닝이란 캔버스를 벗어난 우연적인 행위와 물체와의 충돌에서 일어난 미적사건이며, 그 자체가 표현행위인 것입니다. 우리들이 행한 해프닝은 단순한 제작행위이며 미술현실의 무위와 관념적 질서에서 벗어난 의식표백입니다. 당신들은 이 해프닝에서 현실과의 어떤 연상작용을 얻을 생각을 버리십시오. 우연적인 행위와 물체와의 충돌에서 일어난 아름다운 현상을 직접 체험하는 것 만이 여기 온 목적의 전부입니다.” 라고 설명해야 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자신들의 행위를 ‘미적 사건’, ‘아름다운 현상’이란 말을 써서 설명하고있어 여전히 그들도 미술은 ‘아름다움’의 ‘표현’이자 ‘실천’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들의 당시 미술은 “철없는 젊은이들의 세상을 놀리려는 짓” 정도로 인식되어 당시 낙양의 지가를 날리던 선데이 서울 등 비정치적이며 오락적인 주간지의 단골 뉴스원이 되었다.
이들의 전위적인 예술은 주간지의 한번 읽고 무심하게 버려도 되는 기사에 자니지 않았다. 오직 호기심과 성적 환타지를 자극하는 또는 일반 대중은 쉽게 알 수 없는 ‘통속’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이들도 자신들의 행위와 작업이 대중매체를 통해 센세이션(sensation)을 일으켜 관심을 모으는 것을 즐긴 측면도 있다.
이러한 일군의 젊은 작가들의 새로운 움직임은 외국에서 들어오는 잡지와 신문을 통해 해외의 새로운 미술 현상을 속속 접할 수 있는 환경의 변화도 컸다. 1967년 백남준과 무어맨의 <오페라 섹스토로니카> 공연과 무어 맨이 공연 중 체포되었다는 소식이나 이후 <인간첼로>(1968) ,<살아있는 조각을 위한 TV 브라> 공연 소식은 이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이와 함께 마샬 맥루한(Herbert Marshall McLuhan, 1911~80)의 “미디어는 인간의 확장이다”이란 개념이 1968년 한국에 소개되면서 일렉트릭 아트, 라이트 아트, 해프닝에 힘을 보탰다. 또 혼합매체(Mixed Media)에 대한 찬양과 전인적 오감의 참여로 육체와 정신의 연장 및 확대를 가져온다는 주장은 젊은 작가들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
하지만 앞서 지적처럼 성급하게 새로운 것을 위해 새로운 것을 선택했다는 지적도 생각해 볼 대목이다. 이번 전시에서 이런 반성과 당시 세계미술 동향에서 미국이나 유럽 또는 일본의 미술과의 변별력 즉 우리만의 독창성은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이 빠져 아쉽다. 사실 이번 전시는 2001년 <한국현대미술의 전개 : 전환과 역동의 시대 (1960년대 중반-1970년대 중반)>의 개정판 또는 욕심을 낸다면 개정증보판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특히 당시를 회고하고 평가하는 전시에서 사용한 ‘실험미술’이란 용어의 정의도 분명하지 않다. 어느 시대건 모든 미술은 실험적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어느 시대고 실험과 새로운 시도가 없었던 시기는 없었다. 다만 왜 한국의 6~70년대 미술을 실험미술이라고 명명했는지에 아무리 답을 찾으려 해도 보이지 않는다.
‘실험’이란 새로운 방법이나 형식을 시도해 본다는 점에서 한국의 6~70년대 미술에 적용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새로운 방법이나 형식을 사용해 봄”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생각하면 그런 점에서 이 전시에 사용된 실험미술이란 용어의 정의가 전시보다 우선했어야 한다.
이번 전시에서 ‘실험미술’이란 어떤 의미로, 어떤 경우를 의미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설명보다는 다소 뭉뚱그려 ‘실험’이란 말로 애둘러 규정했다. 용어는 그 대상의 형식과 내용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실험의 의미를 분명하게 구정하고 시작했어야 한다. 사실 20세기 들어 등장한 ‘새로운’ ‘대담한’ ‘이상스러운’ ‘자극적인’이란 의미를 지니는 ‘실험적’이란 말은 ‘아방가르드(Avantgarde) 또는 전위 예술(前衛藝術)이란 말과 같은 의미다.
이때 이 단어는 긍정적 의미와 부정적 의미를 동시에 갖는데 긍정적인 경우는 예술가들이 뭔가 가치있는 결과를 기대하면서 실제로 작품을 제작해 보는 것을, 부정적으로는 ‘시도, 미완성, 과도기적인’ 등의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미술사학자 곰브리치(Ernst Gombrich, 1909~2001)의 경우 20세기 모든 미술을 총괄해 시험적, 과도기적, 잠정적이라는 의미에서 ‘실험미술’이라고 규정했다는 점에서 전시에 사용된 ‘실험미술’에 대한 정교하고 세부적인 규정이 선행되어 전시를 보기 전에 ‘실험’의 개념을 분명하게 규정했다면 하는 아쉽다.
또 과학적 실험과 예술적 실험의 ‘개념’을 구분하지 않고 사용한 점도 오해를 사기 십상이다.곰브리치가 자신의 미학을 과학, 심리학, 철학을 차용해서 설명하는 과정에서 사용하는 ‘도식(Schemata)’이라는 개념의 골자가 “작가는 ‘시각적 인상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아이디어나 개념에서 시작한다’”는 생각과 그에 맞추어 작가가 아이디어를 조정한다는 것이다.
즉 작가는 그 앞에 놓여있는 사물, 풍경, 또는 사람을 “만들기와 짝짓기”를 통해 “개념으로 지식을 표상하는 구조”라는 점에서 한국의 실험미술관 곰브리치의 ‘실험’ 사이의 ‘차이’는 무엇인지가 분명하지 않은 점도 또한 옥의 티다.
한편 당시의 미술을 너무 이분법적으로 탄압과 저항, 규제와 반항, 억압과 자유 등으로 해석해 특정한 시각을 드러냈다는 점도 아쉬운 대목이다. 최근 “정치적 올바름 (Political Correctness)”이란 입장을 강요당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소위 “개념있는 사람”의 굴레에서 모든 사안을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그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중간’이 없거나 사안의 다양성 또는 다의성이 억제되는 ‘심리적 강요’를 말한다.
그런데 이런 ‘심리적 강요’ 때문에 당시 새로운 미술운동에 헌신했던 작가들의 행동과 작품이 모두 독재나 억압에 저항한 한 걸음 더 나가면 ‘민주화 운동’의 일환이었던 것이처럼 과도한 해석과 설명은 불편하다. 또 당시 작가들의 회고담을 어떤 검증이나 확인 없이 그대로 인용하는 것도 유감이다.
장발이나 미니스커트 등 미풍양속을 해치는 일을 단속하는 일은 전통적인 유고적 가치관이 여젼했던 농경문화에 기반한 유교문화를 전옹으로 지닌 당시 한국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젊은이들의 새로운 문화를 보는 이들이 일부 불편했던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다양한 상황에 따른 해석을 멀리하고 단순하게 억압과 저항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
특히 당시에는 1·21 사태나 삼척 무장 공비 남파사건 등으로 북한과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과도하게 국가보안법이 적용되던 ‘막걸리 보안법’의 시대였다. 이때 통행금지위반, 가두행진, 고음방가, 공공장소에서 탈의 등 풍속사범으로 단속된 일을 마치 민주화 운동을 한 것처럼, 모든 작품과 행위가 반독재 운동의 일환처럼 말하는 작가의 회고도 또 이를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과한 해석이자 주장이다.
물론 시대를 앞서가는 시대를 아방가르드 한 전위정신은 당시 정부는 불온하게 보기도 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시선은 이들의 작업을 반체체 또는 민주화 운동의 불온함이 아니라 풍속을 해치는 불량함으로 보았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게다가 전시가 연대기, 나열식 구성으로 일관해 당시 작품을 결정하던 시대적 배경을 상상만 하도록 한 것도 아쉽다. 당시 젊은 작가들이 반항과 자포자기를 표현했던 데카당스 한 양면성을 강요당하던 시대를 문화적으로 일컫는 “퇴폐적이면서 한편으로는 예술적인 상황”이 빠져 졌다.
당시 미술이 종합예술로서 패션, 광고, 음악 같은 장르와의 관계를 살폈다면 좋았을 것이다. 또 해프닝이나 행위예술 등 공연성이 강한 시간예술이라는 점 그리고 속성상 작품이나 자료가 부실하고 때로는 망실된 경우 착실하게 재현, 재제작, 재구성을 통해 입체적으로 구성했다면 어떠했을까.
또한 2001년 전시에서 놓쳤던 점들을 보완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특히 특정 작가의 당시 활동에 집중된 듯한 구성이나 전시 비중도 아쉬운 대목이다. 특히 당시 시대의 변화에 따라 미술 외에 총체예술을 지향했던 점을 감 안해 현대미술 외에 현대음악과 실험영화, 현대무용의 아방가르드한 점도 함께 아울렀다면 더욱 좋은 전시가 되었을 터이다.
예를 들면 제 1회 서울국제현대음악제(1969년9월 5일~6일, 국립극장)의 백남준의 <피아노 위에서 정사> 외에 당시 윤희상, 박준상, 강석희 등 현대음악가의 작품과 자료와 당시 실험영화도 전시에 포함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김구림의 <1/24초의 의미>도 중요하지만, 현재 한국영상자료원에 소장된 유현목(1925~2009)감독의 실험영화 <손>(50초, 1966/67)과 1972년 결성된 이화여자대학의 실험영화 동아리 <카이두실험영화클럽>과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의 <씨네클럽>도 있었다.
<카이두>는 이황림, 김현주, 박상천 등이 중심이던 서강대학교 <영상연구회>에서 함께 활동하던 이화여대의 한옥희가 1972년 이대 재학생들을 규합한 실험영화 집단이었다. 이들은 가부장적 사회에 대한 반발, 표현의 자유와 다양성을 영화 형식으로 실험했던 최초의 여성들이다.
이들은 국문학, 시청각 교육, 신문방송학, 순수미술학 등을 전공하던 한옥희, 김점선, 한순애, 이정희, 정묘숙, 왕규원등으로 구성되어 각기 연출, 각본, 촬영, 미술 등을 맡아 공동제작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당시 영화 모임이 주로 영화이론과 영화에 대한 인식의 확장보다는 시대적 상황에 대한 ‘저항’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저항은 유신이나 반독재가 아니라 저항의 도구로 영화와 여성을 선택한 것이었다.
연극단체 에저또의 방태수와 마임이스트 유진규, 연출가 기국서와 연극배우 기주봉 형제도 당시 1960년대 미국의 실험무용을 이 땅에 이식했던 육완순(1933~2021)의 1962년 국립중앙극장에서 열린 육완순 귀국 무용 발표회에서 공연된 <흑인영가>, <공포>, <마음의 파도> 등도 주목해 현대미술과의 상관성을 살펴보았으면 하는 생각이다.
이밖에도 곽인식(1919~88)의 1960년대 ‘물성’에 주목한 전위적 작품을 통해 일본의 모노하와 한국현대미술의 변별성을 가늠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점에서는 이우환의 존재와 영향도 아울러 살폈어야 한다. 1960~70년대 한국 아방가르드 미술의 중심에 섰던 주역이자 80년대 이후부터 뉴욕에서 정크 아트와 행위예술로 일관한 정찬승(1942~94)의 존재도 더 살펴보았어야 한다.
또 개념적인 작업으로 형식이나 양식에 얽매이지 않고 실천적 지식과 사실적 경험에 기반해 인간문명의 근원을 탐구했던 지식인 하여 김차섭(1942~2022), 1960년대부터 지금껏 설치, 퍼포먼스, 사진, 비디오, 판화, 회화, 조각 등 매체에 구애받지 않고 특정 사조나 형식적 방법론에 안주하지 않았던 실험의 작가 이강소(1943~ ) 존재도 좀 더 살펴야 한다. 그는 현대미술을 세계가 고정 불변이라는 서구 근대의 기반인 존재론적 사고에서 벗어나 현대물리학의 양자역학의 생성 운동의 ‘과정’을 ‘실재’를 추구해왔다는 점에서 당시 전위적인 미술과 형식은 비슷하지만 내용은 다르다는 점을 볼 필요가 있다.
당시 데카당 했던 젊은이들이 정치적인 이분법에 선택을 강요받았던 시기, 절대빈곤을 벗어난 경제적인 후진국형 풍요(?) 속에서 해방구처럼 탐닉했던 예술의 막다른 골목에서 처절하게 상황을 견디기 위해 탐미주의와 악마주의에 탐닉했던 60~70년대에 극단적인 전통에 대한 부정, 파괴, 배덕, 생에 대한 반역으로 남긴 ‘작품’을 읽기 위해서는 더욱 정치한 논리와 세심한 배려가 필요해 보인다.
세계미술의 흐름 속에서 동시대와 호흡하면서 독자적인 면모를 갖추어 나간 60~70년대 한국미술의 성과를 미국전시를 앞두고 좀 더 가다듬어 완성도를 높였으면 한다.
당시 그들의 행위와 작업은 전통적인 수묵채색화의 틀 속에 갇혀있는 일반 국민의 고정 관념과 맞닥뜨려야 했다. 새로운 미술에 관심과 이해를 갖춘 일부 지식인을 제하고는 모두 이들의 행위와 작업을 치기 어린 장난처럼 여겼다. 특히 해프닝은 “웃지 못할 촌극”정도로 인식되었다.
수천 년간 전통처럼 지켜온 농경문화와 유교문화가 쉽게 새로운 서구의 모더니즘을 수용하거나, 아직 익숙하지 않은 서구의 미학이 관습의 규범으로 자리 잡지 못한 상황에서 이들의 반예술, 반문명, 반 합리주의를 표방한 새로운 예술이 외면당하는 것은 인지상정이었다.
따라서 이들 행위와 예술은 당시 보도에 의하면 ‘예술적(?) 쇼’정도로 인식되었다. 이들의 현실인식이나 자신들의 작업에 대한 이해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최초의 해프닝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을 실연한 후 다음과 같이 자신들의 작업을 “해프닝이란 캔버스를 벗어난 우연적인 행위와 물체와의 충돌에서 일어난 미적사건이며, 그 자체가 표현행위인 것입니다. 우리들이 행한 해프닝은 단순한 제작행위이며 미술현실의 무위와 관념적 질서에서 벗어난 의식표백입니다. 당신들은 이 해프닝에서 현실과의 어떤 연상작용을 얻을 생각을 버리십시오. 우연적인 행위와 물체와의 충돌에서 일어난 아름다운 현상을 직접 체험하는 것 만이 여기 온 목적의 전부입니다.” 라고 설명해야 했다.
2001년 열린 한국현대미술-전환과 역동의 시대 전시전경,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그런데 이 과정에서 자신들의 행위를 ‘미적 사건’, ‘아름다운 현상’이란 말을 써서 설명하고있어 여전히 그들도 미술은 ‘아름다움’의 ‘표현’이자 ‘실천’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들의 당시 미술은 “철없는 젊은이들의 세상을 놀리려는 짓” 정도로 인식되어 당시 낙양의 지가를 날리던 선데이 서울 등 비정치적이며 오락적인 주간지의 단골 뉴스원이 되었다.
이들의 전위적인 예술은 주간지의 한번 읽고 무심하게 버려도 되는 기사에 자니지 않았다. 오직 호기심과 성적 환타지를 자극하는 또는 일반 대중은 쉽게 알 수 없는 ‘통속’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이들도 자신들의 행위와 작업이 대중매체를 통해 센세이션(sensation)을 일으켜 관심을 모으는 것을 즐긴 측면도 있다.
이러한 일군의 젊은 작가들의 새로운 움직임은 외국에서 들어오는 잡지와 신문을 통해 해외의 새로운 미술 현상을 속속 접할 수 있는 환경의 변화도 컸다. 1967년 백남준과 무어맨의 <오페라 섹스토로니카> 공연과 무어 맨이 공연 중 체포되었다는 소식이나 이후 <인간첼로>(1968) ,<살아있는 조각을 위한 TV 브라> 공연 소식은 이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이와 함께 마샬 맥루한(Herbert Marshall McLuhan, 1911~80)의 “미디어는 인간의 확장이다”이란 개념이 1968년 한국에 소개되면서 일렉트릭 아트, 라이트 아트, 해프닝에 힘을 보탰다. 또 혼합매체(Mixed Media)에 대한 찬양과 전인적 오감의 참여로 육체와 정신의 연장 및 확대를 가져온다는 주장은 젊은 작가들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
하지만 앞서 지적처럼 성급하게 새로운 것을 위해 새로운 것을 선택했다는 지적도 생각해 볼 대목이다. 이번 전시에서 이런 반성과 당시 세계미술 동향에서 미국이나 유럽 또는 일본의 미술과의 변별력 즉 우리만의 독창성은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이 빠져 아쉽다. 사실 이번 전시는 2001년 <한국현대미술의 전개 : 전환과 역동의 시대 (1960년대 중반-1970년대 중반)>의 개정판 또는 욕심을 낸다면 개정증보판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특히 당시를 회고하고 평가하는 전시에서 사용한 ‘실험미술’이란 용어의 정의도 분명하지 않다. 어느 시대건 모든 미술은 실험적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어느 시대고 실험과 새로운 시도가 없었던 시기는 없었다. 다만 왜 한국의 6~70년대 미술을 실험미술이라고 명명했는지에 아무리 답을 찾으려 해도 보이지 않는다.
‘실험’이란 새로운 방법이나 형식을 시도해 본다는 점에서 한국의 6~70년대 미술에 적용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새로운 방법이나 형식을 사용해 봄”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생각하면 그런 점에서 이 전시에 사용된 실험미술이란 용어의 정의가 전시보다 우선했어야 한다.
이번 전시에서 ‘실험미술’이란 어떤 의미로, 어떤 경우를 의미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설명보다는 다소 뭉뚱그려 ‘실험’이란 말로 애둘러 규정했다. 용어는 그 대상의 형식과 내용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실험의 의미를 분명하게 구정하고 시작했어야 한다. 사실 20세기 들어 등장한 ‘새로운’ ‘대담한’ ‘이상스러운’ ‘자극적인’이란 의미를 지니는 ‘실험적’이란 말은 ‘아방가르드(Avantgarde) 또는 전위 예술(前衛藝術)이란 말과 같은 의미다.
이때 이 단어는 긍정적 의미와 부정적 의미를 동시에 갖는데 긍정적인 경우는 예술가들이 뭔가 가치있는 결과를 기대하면서 실제로 작품을 제작해 보는 것을, 부정적으로는 ‘시도, 미완성, 과도기적인’ 등의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미술사학자 곰브리치(Ernst Gombrich, 1909~2001)의 경우 20세기 모든 미술을 총괄해 시험적, 과도기적, 잠정적이라는 의미에서 ‘실험미술’이라고 규정했다는 점에서 전시에 사용된 ‘실험미술’에 대한 정교하고 세부적인 규정이 선행되어 전시를 보기 전에 ‘실험’의 개념을 분명하게 규정했다면 하는 아쉽다.
또 과학적 실험과 예술적 실험의 ‘개념’을 구분하지 않고 사용한 점도 오해를 사기 십상이다.곰브리치가 자신의 미학을 과학, 심리학, 철학을 차용해서 설명하는 과정에서 사용하는 ‘도식(Schemata)’이라는 개념의 골자가 “작가는 ‘시각적 인상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아이디어나 개념에서 시작한다’”는 생각과 그에 맞추어 작가가 아이디어를 조정한다는 것이다.
즉 작가는 그 앞에 놓여있는 사물, 풍경, 또는 사람을 “만들기와 짝짓기”를 통해 “개념으로 지식을 표상하는 구조”라는 점에서 한국의 실험미술관 곰브리치의 ‘실험’ 사이의 ‘차이’는 무엇인지가 분명하지 않은 점도 또한 옥의 티다.
한편 당시의 미술을 너무 이분법적으로 탄압과 저항, 규제와 반항, 억압과 자유 등으로 해석해 특정한 시각을 드러냈다는 점도 아쉬운 대목이다. 최근 “정치적 올바름 (Political Correctness)”이란 입장을 강요당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소위 “개념있는 사람”의 굴레에서 모든 사안을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그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중간’이 없거나 사안의 다양성 또는 다의성이 억제되는 ‘심리적 강요’를 말한다.
그런데 이런 ‘심리적 강요’ 때문에 당시 새로운 미술운동에 헌신했던 작가들의 행동과 작품이 모두 독재나 억압에 저항한 한 걸음 더 나가면 ‘민주화 운동’의 일환이었던 것이처럼 과도한 해석과 설명은 불편하다. 또 당시 작가들의 회고담을 어떤 검증이나 확인 없이 그대로 인용하는 것도 유감이다.
장발이나 미니스커트 등 미풍양속을 해치는 일을 단속하는 일은 전통적인 유고적 가치관이 여젼했던 농경문화에 기반한 유교문화를 전옹으로 지닌 당시 한국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젊은이들의 새로운 문화를 보는 이들이 일부 불편했던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다양한 상황에 따른 해석을 멀리하고 단순하게 억압과 저항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
특히 당시에는 1·21 사태나 삼척 무장 공비 남파사건 등으로 북한과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과도하게 국가보안법이 적용되던 ‘막걸리 보안법’의 시대였다. 이때 통행금지위반, 가두행진, 고음방가, 공공장소에서 탈의 등 풍속사범으로 단속된 일을 마치 민주화 운동을 한 것처럼, 모든 작품과 행위가 반독재 운동의 일환처럼 말하는 작가의 회고도 또 이를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과한 해석이자 주장이다.
물론 시대를 앞서가는 시대를 아방가르드 한 전위정신은 당시 정부는 불온하게 보기도 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시선은 이들의 작업을 반체체 또는 민주화 운동의 불온함이 아니라 풍속을 해치는 불량함으로 보았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게다가 전시가 연대기, 나열식 구성으로 일관해 당시 작품을 결정하던 시대적 배경을 상상만 하도록 한 것도 아쉽다. 당시 젊은 작가들이 반항과 자포자기를 표현했던 데카당스 한 양면성을 강요당하던 시대를 문화적으로 일컫는 “퇴폐적이면서 한편으로는 예술적인 상황”이 빠져 졌다.
당시 미술이 종합예술로서 패션, 광고, 음악 같은 장르와의 관계를 살폈다면 좋았을 것이다. 또 해프닝이나 행위예술 등 공연성이 강한 시간예술이라는 점 그리고 속성상 작품이나 자료가 부실하고 때로는 망실된 경우 착실하게 재현, 재제작, 재구성을 통해 입체적으로 구성했다면 어떠했을까.
또한 2001년 전시에서 놓쳤던 점들을 보완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특히 특정 작가의 당시 활동에 집중된 듯한 구성이나 전시 비중도 아쉬운 대목이다. 특히 당시 시대의 변화에 따라 미술 외에 총체예술을 지향했던 점을 감 안해 현대미술 외에 현대음악과 실험영화, 현대무용의 아방가르드한 점도 함께 아울렀다면 더욱 좋은 전시가 되었을 터이다.
예를 들면 제 1회 서울국제현대음악제(1969년9월 5일~6일, 국립극장)의 백남준의 <피아노 위에서 정사> 외에 당시 윤희상, 박준상, 강석희 등 현대음악가의 작품과 자료와 당시 실험영화도 전시에 포함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김구림의 <1/24초의 의미>도 중요하지만, 현재 한국영상자료원에 소장된 유현목(1925~2009)감독의 실험영화 <손>(50초, 1966/67)과 1972년 결성된 이화여자대학의 실험영화 동아리 <카이두실험영화클럽>과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의 <씨네클럽>도 있었다.
<카이두>는 이황림, 김현주, 박상천 등이 중심이던 서강대학교 <영상연구회>에서 함께 활동하던 이화여대의 한옥희가 1972년 이대 재학생들을 규합한 실험영화 집단이었다. 이들은 가부장적 사회에 대한 반발, 표현의 자유와 다양성을 영화 형식으로 실험했던 최초의 여성들이다.
이들은 국문학, 시청각 교육, 신문방송학, 순수미술학 등을 전공하던 한옥희, 김점선, 한순애, 이정희, 정묘숙, 왕규원등으로 구성되어 각기 연출, 각본, 촬영, 미술 등을 맡아 공동제작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당시 영화 모임이 주로 영화이론과 영화에 대한 인식의 확장보다는 시대적 상황에 대한 ‘저항’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저항은 유신이나 반독재가 아니라 저항의 도구로 영화와 여성을 선택한 것이었다.
연극단체 에저또의 방태수와 마임이스트 유진규, 연출가 기국서와 연극배우 기주봉 형제도 당시 1960년대 미국의 실험무용을 이 땅에 이식했던 육완순(1933~2021)의 1962년 국립중앙극장에서 열린 육완순 귀국 무용 발표회에서 공연된 <흑인영가>, <공포>, <마음의 파도> 등도 주목해 현대미술과의 상관성을 살펴보았으면 하는 생각이다.
이밖에도 곽인식(1919~88)의 1960년대 ‘물성’에 주목한 전위적 작품을 통해 일본의 모노하와 한국현대미술의 변별성을 가늠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점에서는 이우환의 존재와 영향도 아울러 살폈어야 한다. 1960~70년대 한국 아방가르드 미술의 중심에 섰던 주역이자 80년대 이후부터 뉴욕에서 정크 아트와 행위예술로 일관한 정찬승(1942~94)의 존재도 더 살펴보았어야 한다.
또 개념적인 작업으로 형식이나 양식에 얽매이지 않고 실천적 지식과 사실적 경험에 기반해 인간문명의 근원을 탐구했던 지식인 하여 김차섭(1942~2022), 1960년대부터 지금껏 설치, 퍼포먼스, 사진, 비디오, 판화, 회화, 조각 등 매체에 구애받지 않고 특정 사조나 형식적 방법론에 안주하지 않았던 실험의 작가 이강소(1943~ ) 존재도 좀 더 살펴야 한다. 그는 현대미술을 세계가 고정 불변이라는 서구 근대의 기반인 존재론적 사고에서 벗어나 현대물리학의 양자역학의 생성 운동의 ‘과정’을 ‘실재’를 추구해왔다는 점에서 당시 전위적인 미술과 형식은 비슷하지만 내용은 다르다는 점을 볼 필요가 있다.
당시 데카당 했던 젊은이들이 정치적인 이분법에 선택을 강요받았던 시기, 절대빈곤을 벗어난 경제적인 후진국형 풍요(?) 속에서 해방구처럼 탐닉했던 예술의 막다른 골목에서 처절하게 상황을 견디기 위해 탐미주의와 악마주의에 탐닉했던 60~70년대에 극단적인 전통에 대한 부정, 파괴, 배덕, 생에 대한 반역으로 남긴 ‘작품’을 읽기 위해서는 더욱 정치한 논리와 세심한 배려가 필요해 보인다.
세계미술의 흐름 속에서 동시대와 호흡하면서 독자적인 면모를 갖추어 나간 60~70년대 한국미술의 성과를 미국전시를 앞두고 좀 더 가다듬어 완성도를 높였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