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반도체가 산업 전면에 등장한 이후 기술 경쟁력의 척도는 ‘단일 칩을 얼마나 잘 만드느냐’였다. 삼성전자, 인텔, TSMC는 제조 경쟁력을 바탕으로 각각 D램, 중앙처리장치(CPU),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영역에서 넘볼 수 없는 입지를 다졌다. 최근엔 판이 바뀌고 있다. 인공지능(AI) 기술 확산으로 대용량·고성능 반도체 수요가 커지면서 여러 칩을 잘 묶어 성능을 극대화하는 ‘첨단패키징(advanced packaging)’ 기술이 전면에 등장했다. 반도체업계에선 “앞으로 첨단패키징 경쟁력이 반도체 기업의 명운을 가를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83조원으로 커지는 첨단패키징 시장1일 반도체업계에 따르면 최근 고성능 D램을 뜻하는 고대역폭메모리(HBM)와 연관된 시장을 놓고 삼성전자, 인텔, TSMC 등 주요 반도체기업 간 첨단패키징 기술·투자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첨단패키징은 반도체 원판인 웨이퍼에 새겨진 칩을 잘라 기기에 연결 가능한 상태로 가공하는 ‘일반 패키징’을 넘어 이종(異種) 반도체를 연결하거나 개별 칩을 높게 쌓아 적층하는 등의 최신 공정을 뜻한다. 시장조사업체 욜인텔리전스에 따르면 2021년 374억달러(약 48조원) 규모였던 첨단패키징 시장은 2027년 650억달러(약 83조5000억원)로 확대될 전망이다. 생성형 AI 확산으로 첨단패키징 부상첨단패키징의 부상은 챗GPT 같은 생성형 AI의 확산과 함께 시작됐다. 생성형AI 기술 고도화를 위해선 반도체를 통해 대규모 데이터를 빠르게 학습하고 신속히 서비스하는 게 중요하다. 대용량 데이터 동시 처리(병렬 컴퓨팅)에 최적화된 엔비디아의 그래픽처리장치(GPU), GPU와 실시간으로 데이터를 주고받으며 소통하는 저장장치인 D램에 주목하게 된 이유다.지금까지 반도체 기업은 나노미터(㎚: 1㎚=10억분의 1m) 단위까지 선폭(회로의 폭)을 줄여 초소형·저전력·고성능 칩을 만드는 경쟁을 벌였다. 하지만 최신 공정의 선폭이 3㎚ 이하에 진입하면서 칩을 미세화하는 비용이 증가한 데다 추가적인 기술 개발도 힘들어졌다.이런 가운데 첨단패키징이 대안으로 떠올랐다. 여러 칩을 쌓고 묶으면 고성능 칩 하나를 작동하는 것 못지않게 뛰어난 성능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반도체기업들은 D램 4개, 8개, 12개 등을 수직으로 쌓아 일반 D램 대비 10배 이상 빠른 HBM을 만들고, HBM과 GPU를 최대한 가깝게 배치해 ‘데이터 병목 현상’을 줄이는 ‘2.5D(차원) 패키징’에 주력하고 있다. 삼성, 인텔, TSMC 조(兆)단위 투자현재 HBM, GPU 관련 첨단패키징 레이스에서 가장 앞서 있는 건 파운드리 업체인 TSMC다. 이 회사는 2011년부터 2021년까지 10년간 5세대에 걸쳐 2.5D 패키징인 ‘CoWos’를 발전시켰다. TSMC는 지난달 25일엔 900억대만달러(약 3조6600억원)를 투자해 대만 북부에 첨단패키징 공장을 신축하겠다고 발표했다.삼성전자도 첨단패키징 육성에 팔을 걷어붙였다. 2021년 2.5D 패키징 기술 ‘아이큐브’를 공개했고, 작년 말엔AVP(첨단패키징)팀을 신설했다. 내년 2분기부터는 4개의 HBM을 GPU 등과 함께 배치한 ‘아이큐브4’를 양산하고 3분기엔 8개의 HBM을 배치한 ‘아이큐브8’을 양산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는 올 연말께 엔비디아에 3세대 HBM인 ‘HBM3’를 공급하고 이를 개별 GPU칩과 패키징하는 아이큐브4를 활용할 것으로 전망된다. 인텔도 적극적이다. 첨단패키징 설비에만 47억5000만달러(약 6조1000억원)를 투자할 계획이다.황정수/김익환 기자 hjs@hankyung.com
삼성전자가 미국 반도체 기업 엔비디아에 그래픽처리장치(GPU)의 필수 부품인 고대역폭메모리(HBM)와 첨단패키징 서비스를 함께 공급한다. 엔비디아가 기존 공급사인 TSMC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생산 시간·비용을 줄이기 위해 HBM 제조와 첨단패키징 역량을 동시에 갖춘 삼성전자를 낙점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1일 반도체업계에 따르면 최근 삼성전자는 엔비디아와 GPU용 HBM3·첨단패키징 서비스 기술 검증 작업을 하고 있다. 기술 검증 절차가 끝나는 대로 삼성전자는 HBM3를 엔비디아에 공급하고, 개별 GPU 칩과 HBM3를 묶어 고성능 GPU ‘H100’으로 가공하는 첨단패키징을 담당할 전망이다.엔비디아는 그동안 TSMC에 GPU 첨단패키징 물량 대부분을 맡겼다. TSMC는 자사 공정을 통해 제조한 개별 GPU 칩에 SK하이닉스 HBM3를 패키징해 엔비디아의 H100을 생산했다. 하지만 최근 생성형 인공지능(AI) 확산으로 H100 수요가 빠르게 늘면서 TSMC가 엔비디아의 주문량을 모두 소화하기 힘들어졌다. 마이크로소프트 등 고객사가 “GPU가 없어 서비스에 차질이 생긴다”고 밝힐 정도다. 엔비디아는 HBM3와 첨단패키징 역량이 있는 삼성전자로 눈을 돌렸다.삼성전자는 엔비디아와의 거래를 발판으로 메모리 반도체,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첨단패키징 등 반도체 모든 공정을 책임지는 ‘원스톱 서비스’를 강화할 계획이다.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석학교수는 “삼성전자의 강점은 다양한 포트폴리오를 갖춘 종합반도체기업이라는 것”이라며 “AI 반도체 생산을 위해 삼성을 찾는 기업이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김익환/황정수 기자 lovepen@hankyung.com
삼성전자는 ‘반도체 턴키(일괄 진행) 서비스’를 앞세워 글로벌 빅테크 기업의 인공지능(AI)용 반도체 일감을 확보해 나갈 계획이다. 이 서비스 덕분에 경쟁이 치열한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고대역폭메모리(HBM) 수주전에서도 TSMC, SK하이닉스를 따라잡을 발판을 마련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1일 반도체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 파운드리사업부는 올초 반도체 턴키 서비스를 시작했다. 이 서비스는 파운드리와 메모리 반도체 공급, 첨단패키징, 테스트까지 반도체의 모든 제조 과정을 책임지는 것이다. 삼성전자 파운드리사업부가 팹리스(반도체 설계전문 기업)의 중앙처리장치(CPU) 같은 시스템반도체를 생산하고, 여기에 삼성전자의 대표 상품인 고성능 D램을 묶어 포장(패키징)하는 등 ‘원스톱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현재 메모리 반도체를 아우르는 턴키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회사는 삼성전자뿐이다. 인텔은 CPU 생산과 파운드리·패키징 사업을 하고, TSMC는 파운드리·패키징을 병행하는 데 그치고 있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삼성전자는 그래픽처리장치(GPU)에 들어가는 HBM을 생산하는 데다 파운드리, 패키징 역량을 모두 갖춘 유일한 회사”라고 설명했다.삼성전자 턴키 서비스의 수요는 갈수록 커질 전망이다. 삼성전자에 파운드리, D램, 패키징을 한꺼번에 맡기는 것이 각각 다른 업체에 맡기는 것보다 시간과 비용을 절감할 수 있어서다. 삼성전자는 턴키 서비스를 앞세워 파운드리와 HBM 수주 물량도 늘려나갈 계획이다.삼성전자는 지난 6월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연 ‘삼성 파운드리포럼’에서 턴키 서비스 등을 통해 파운드리 고객사를 추가로 확보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SK하이닉스, 마이크론과 주도권 경쟁을 벌이는 HBM 시장에서도 점유율을 늘려갈 가능성이 제기된다. 파운드리사업부가 수주한 GPU 등에 HBM을 적용하고 패키징 서비스까지 일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삼성전자의 턴키 서비스를 견제하는 기업도 늘고 있다. 한 메모리 반도체 기업 관계자는 기업설명회(IR)에서 “고객사들은 삼성전자처럼 한 업체가 메모리·시스템 반도체 공정을 모두 주도하는 걸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주문을 맡기는 팹리스로선 제작 공정을 모두 틀어쥔 ‘슈퍼 을(乙)’의 등장을 반기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다.다른 의견도 나온다. 한 반도체 전문가는 “반도체 기업이 파운드리, D램, 패키징 업체를 일일이 찾는 번거로움이 상당하다”며 “삼성전자 턴키 서비스가 업계에 적잖은 반향을 일으킬 것”이라고 말했다.김익환 기자 lovepen@hankyung.com